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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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요즘 따라 자주 듣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행복할 권리가 있기에 반드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한 조건과 방법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빠지지 않고 하는 말,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저 행복하고 말지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겠다고, 그것도 돈까지 받아가면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 같으면 자신이 행복한 순간에 남에게 돈 받고 그 이야기를 전달해 주고 싶은가.

어쨌든 어떤 한 사림이 있는데, 마음껏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부러운 사람이다, 그는 행복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여러 나라를 다닌다. 특정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행복할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계 여러 나라 중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행복의 원리를 찾고자 한다. 평화, 안정, 날씨, 태도, 가치관, 돈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행복조건을 보며 이들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한다. 그러나 결론은 본질적으로 행복에 가득찬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시각이 다르고, 이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보면 저자 역시, 아무리 행복한 나라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남는 나라가 하나 있는 것 같다. 바로 시간개념과 소유욕, 문명과는 거리가 먼 부탄이다. 그는 마지막 글에서 부탄의 이야기를 몇 번 되풀이한다. 문명과는 거리가 먼 나라의 모습을 그리며 거기에 만난 사람 이야기, 그곳의 자유스러움, 문명에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다. 저자는 그곳이 행복과 가장 가까운 곳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이 책을 보면서, 만약 나에게 책에 나온 나라들 중 어떤 곳에서 살고 싶은가 물으면 부탄을 이야기할 것 같다. 물론 전제조건은 어떤 나라를 선택하든지간에 먹고 사는 것은 어느 정도 해결된 상황에서 말이다.

저자는 행복이란 돈이나 명예, 과학 기술 같은 것이 아니고, 또 일정한 규격과 형태가 있는 명사나 움직임을 말하는 동사가 아니라고 한다. 도리어 행복이란 관계 속에서만이 느낄 수 있기에 ‘접속사’라고 한다. 나와 너와의 관계,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동질의식을 느끼게 하는, 자신보다 초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종교인이 비종교인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저자는 고향이 가장 편안하다고 한다. 친근한 곳이며 가장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고향이란 개념이 희박하다. 여러 곳을 이사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직장 때문에, 어떤 때는 집을 사다보니 이곳저곳을 다니게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행복을 찾아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습관적으로 태어난 곳을 말할 뿐이다. 저자는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아보려면 ‘어디서 죽고 싶은가’ 물어보라고 한다. 바로 그곳이 진정한 고향이라는 것이다.

내 고향은 어디일까? 즉 내가 죽고 싶은 곳이 어딘지 물어봤다. 하지만 나에게는 특정 장소는 아닌 것 같다. 만약 나에게 죽을 곳을 선택하라면 내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곳, 그들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에서 나는 새로운 것을 하나 배웠다. 본질적으로 행복에 충만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돈이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젓,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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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
애덤 필립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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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을 보다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색에 빠진 충무로...개봉영화들 선정성 경쟁’이라는 타이틀이다. 신문 내용은 이번 초겨울에 사극에선 권문세도가 며느리와 스님이 사찰에서 정사를 벌이는 ‘미인도’가, 왕과 왕후, 호위무사가 삼각관계를 보이는 ‘쌍화점’이 상영되고, 현대극에서는 아내가 두 남편과 잠자리를 하는 ‘아내가 결혼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가장 절친한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나의 친구, 나의 아내’란 영화가 동시에 개봉한다는 기사다. 불황기에 장사가 잘 안 되니 자극적인 섹스영화로 시장을 달구겠다는 것이 아닌가 라고 결론을 맺는 기사다.

평소 같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갈 기사였지만 오늘따라 눈에 이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조금 독특한 책인 ‘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멀쩡함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침 튀기며 이야기를 하고 있고, 광기와 멀쩡함의 차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책을 보면 저자는 멀쩡함이란 것이 무척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의 자체가 어렵고 이에 대한 자료 자체도 거의 없어 자신이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특히 성문제와 멀쩡함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꼈는지 몰라도 내가 볼 때는 무척 강조점을 많이 찍은 것 같다. 특히 같은 동물이면서도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성’문제를 광기와 연결시키고 있는 인간이란 무리가 무척 독특하다고 한다. 동물은 길거리에서 성관계를 맺어도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성관계에서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이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실 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거기에 말 한마디 못할 사람은 없다. 특히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성문제에 대해서는 한창 예민할 때이니까 말이다. 저자는 성문제 이야기의 시발점을 동물과 달리 본능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만의 특이한 체질에서 시작한다. 그는 인간 역사의 많은 부분은 바로 성문제에서 야기되었고, 특히 종교가 세상을 지배할 당시에는 ‘성’은 곧 죄악이며, 광기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성은 인간이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본능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종교를 생각할 때 성문제는 거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천주교는 과거중세 시절의 마녀사냥 때 성문제를 가장 먼저 끄집어냈고, 그 이후에도 섹스와는 담을 쌓고 산다. 아직도 신부나 수녀는 결혼하지 않고 살지 않는가. 물론 그 이유를 들라면 여러 가지 복잡한 교리 이야기를 하겠지만. 불교는 또 어떤가? 그들은 아예 인간 자체를 자연의 하나로 보자고 하니 성문제는 아예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이다.

이런 성문제가 가장 예민할 때가 언제일까? 저자는 사춘기라고 한다. 평소 부모에 의존하던 아이가 이제 자신이 무엇인가를 직접 할 수 있게 된 나이, 비록 사회적으로는 제한을 받지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분신을 낳을 수도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나이가 바로 사춘기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들은 자위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또 실제 하게 된다. 하지만 자위라는 것 자체를 섹스와 거의 같은 것으로 보니 이 또한 죄스러운 것이 된다.

그렇다면 멀쩡한 사람은 섹스와는 관계없는 사람인가? 그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성관계에 대해 눈 감고 사는가? 그런데 이게 멀쩡한 사람인가? 남들은 다 생각하는 것을 자기 혼자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 말이다.

저자는 멀쩡함이란 것을 정의하려 무척 고심한 것 같다. 멀쩡함이란 단어 자체를 깊이 생각한 사람도 많지 않다보니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위에서 말한 질문 같은 것이 가끔 떠오른다. 분명히 멀쩡함을 건강하고 행복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라 정의하는 것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일반사람들과 다른 사람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을 가끔 느끼기 때문이다. 일반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은 모두 광기 있는 사람이란 의미 아닌가.

사실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광기라는 것이 꼭 나쁜 것 같다. 이런 광기 없이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같은 대음악가가 존재할 수 있는지, 또 수많은 영웅, 정치가와 군인, 예술가들 마음속에서 광기를 빼 버리면 남는 것은 무엇인지? 광기 없이 징기스칸이, 알렉산더대왕이, 세종대황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광기란 열정과 같은 의미의 내용이다.

어쨌든 이 책을 덮으며 머릿속에 남는 것은 말이 조금 어렵다. 구어체를 쓴다. 그래서 교수가 쓴 책 같다. 저자가 멀쩡함이란 단어를 정의하려 무척 고생한 것 같다. 이게 다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 이 책의 핵심인 멀쩡함과 광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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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시네 - 르 클레지오, 영화를 꿈꾸다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이수원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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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르 클레지오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소설을 별로 안 보는 나로서는 남프랑스 니스출신의 소설가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신문에서 언뜻 본 기억이 나 이 책을 보게 되었고,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필체가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되었다. 뭐라고 할까. 화려한 문체, 감성을 건드리는 단어, 누에고치가 실타레를 풀어내듯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주변상황과 자신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능력 등이다. 그렇기에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말이 너무 늘어지고 재미없다고 하기엔 내용자체가 무게가 있는 그런 책이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칸 국제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위원장인 질 자콥이 저자에게 영화에 대한 단상을 책으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아마 위원장은 프랑스 대표작가인 그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칸 국제영화제 60주년이라는 의미를 좀 더 강하게 부각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 같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이 책은 일단 성공적인 것 같다.

오랜 시절, 인공적으로 빛을 만들기 시작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얀 백지위에 단순한 영상이 움직이는 초기 영화와 무성영화에서 최근 우리나라 영화까지 오랜 시간동안의 영화변천사가 저자의 개인이야기와 함께 정당하게 버물어져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서특히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던 하얀 백지위에서 사람이 움직이고 나뭇잎이 떨리는 장면에 감격했고, 그것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웃음을 자아냈다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보며 그리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책에 나와 있는 영화의 대부분을 본 적이 없었고, 게다가 <발라시네>를 보고자 했을 때는 서평 보듯이 영화 하나하나에서 관람객이 얻을 수 있는 것, 이미 본 영화를 다시 한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은 에세이라서 그런지, 에세이라고해서 반드시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단지 영화라는 소재를 갖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같았다.

화려한 문체를 통해 창고에 쌓아놓았던 지난 앨범을 꺼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 같은 분위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래전에 나와 상처투성이인 LP판을 켜 놓은 채 와인 한잔을 들고 시거를 피고 있는 프랑스의 한 농부를 떠올렸다. 이것이 저자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지난 과거의 일기를 뒤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책은 죽었다’는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셔먼 영은 이제 출판사는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책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볼만한 책, 즉 트렌드에 맞거나 저자 자신이 유명세를 타고 있어 저자 브랜드만으로 팔릴 수 있는 책,을 만드는 데 급급하다는 말을 했다. 사람들이 책을 워낙 안 읽다보니 과거처럼 좋은 책만을 갖고서는 출판사 역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이상하게 이 책을 보며 셔먼 영의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문학상까지 수상한 저자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출판사의 기획에 의한 책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물론 글을 어떻게 쓸지는 저자의 마음이겠지만, 이 책을 보며 계속적으로 느낀 감정은 빛바랜 영화필름을 앞에 놓고 그것에 묻은 먼지를 닦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상을 받은 작가들의 책이 수상과 동시에 몇 권씩 출간되는 현 출판계의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영화 속에 담겨있는, 특히 저자의 마음속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잘 봤다. 그저 영화관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지나치듯 봤던 영화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 안에 녹아있는 감독과 배우들의 노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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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죽었다
셔먼 영 지음, 이정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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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사람들이 책을 보려하지 않고, 출판사 역시 책다운 책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더 재미있고 간단하고 흥미진진한 다른 매체로 눈을 돌리고, 출판사는 문화적인 공헌이라는 고상한 목적보다는 수익에 초점을 두고 책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책은 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다.

요즘 뉴스나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들을 보면 사람들의 독서량은 점점 줄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출간되는 책의 종류는 많아지는데 보는 사람은 줄고 있으니 이것도 문제다. 그럼 사람들은 왜 책을 안 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볼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해서 예전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중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인터넷 서핑에 사용하고,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보고, 하루 종일 뭔가를 극적 거리면서 보낸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인쇄된 두꺼운 책을 보지 않을 뿐이다.

보통 책, 300페이지 정도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려면 하루가 걸리고, 짬짬이 시간을 내어 읽으려면 3~4일이 걸린다. 그것도 내용이 쉽고 생각할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고 만약 내용이 어렵거나 생각할 것이 많다면 시간은 그 이상이 소요된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꼭 봐야 할 책이 아니라면 이런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책을 볼 사람이 많지 않다. 더 빠르고 쉽게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주변에 널리 있다. 이제 책의 경쟁대상은 책이 아니라 영화, TV, 인터넷 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위에서 말한 이유로 책을 좋아한다. 언제든지 들고 다닐 수 있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으며 자신의 속도에 맞춰 독서할 수 있다는 점, 책을 보면서 생각하고 두꺼운 책의 무게감이 주는 만족감, 많은 시간을 들여 볼 수 있는 부피 등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책을 보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저자와 간간히 대화하며 생각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 간다.

게다가 책은 인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읽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매체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만약 해리포터의 소설과 그것을 영화로 만든 것을 봤을 때 어떤 것이 더 재미있을까. 아마 책을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며 실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유는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재미있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극적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감독의 상상력과 영화제작 기법, 영화배우들의 행동이 독자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한 결과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책을 미리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고, 일단 영화를 본 사람에게 책을 다시 보라고 하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단 두 시간동안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볼 수 있는 내용을 무엇 때문에 긴 시간을 투자하며 꼼꼼히 박힌 검은 글자를 읽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책은 영화나 동영상, 게임보다 재미없는 것을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책의 문제, 즉 인쇄된 책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책을 살릴 수 있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책의 한계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위에서 이야기한 독자들에게 주는 재미의 부족이고 또 하나는 출판사 자체의 문제다. 이들은 수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책이란 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보게 되고, 이는 결국 잘 팔리는 책만 만들어 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출판업계 자체를 편향되게 만들어 책을 더더욱 제한되게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저자는 조금 아이러니칼하지만 책이 살려면 지금의 책은 죽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즉 현재와 같은 인쇄물로서의 책은 잊고 이를 다른 매체들과 같이 디지털화, 네트워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책이란 그 안에 담겨진 사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꼭 그것이 인쇄물로 존재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질문한다. 마치 오래전 음악팬들에게 각광받던 LP판이 어느새 CD로 대체되더니 지금은 네트워크를 통해 단일 곡을 각기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저자는 책도 인쇄물이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천국 같은 도서관’화가 되어야만 살아날 수 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이 보고 싶은 책을 보다 저렴하게 구입하고, 검색하고, 정리할 수 있는 모양으로 구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만 출판사도 인쇄비용과 재고 부담 없이 좋은 사상이 담긴 책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고,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을 통해 판매지역을 배송과 상관없이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봐도 말 되는 것 같다. 물론 책을 다운받아 보는 리더기의 개발문제와 기존 인쇄물인 책을 디지털화하는 장애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책은 죽었다’이지만 내용을 보면 책은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 책이다. 다만 현재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아나로그가 아닌 디지털화, 예를 들어 아이팟과 아이튠즈가 만들어낸 음악세상,를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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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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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평을 쓰다보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내용이 풍부하고 생각할 것이 많아 이를 몇 장의 종이에 요약하기 어려울 때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글 솜씨도 뛰어났지만 가비오따쓰라는 곳 자체가 낮 설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놀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인간들에게 버려진 땅을 찾아 그것을 신천지로 만들어 가는 콜롬비아의 한 마을 이야기는 단 몇 글자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또 하나하나의 내용들이 새롭고 놀라운 것들이라 요약한다고 해도 그 느낌이 제대로 전달될 것 같지도 않고.

가비오따스를 만든 가비오따스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버려진 땅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 것이고, 더 이상 지구를 파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한다.

콜롬비아는 1948년, 자유당과 보수당의 내전으로 인해 2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이를 폭력의 시대(라 비올렌씨아)라 부른다, 1960년대 초반부터 결성된 좌익무장 군과 정부군간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어 매년 수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 결국 전 국토(대한민국의 4배에 달하는)의 40%를 좌익반군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아직도 돈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를 보호하기 위해, 돈 없는 사람은 이를 빼앗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콜롬비아의 외지에 한 마을이 생겼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황량한 땅에 가비오따스인들은 자연을 되살리며 사람과 동물, 식물, 그 땅의 원주민이 함께 어울리는 생태공동체를 구성한 것이다. 물론 이런 공동체가 단순히 사람만 옮겨 산다고 해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땅 자체가 독성을 품고 있는 곳에서 생태계의 가장 기본축인 식물을 키운다는 게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곳에 일차적으로 소나무를 심음으로써 환경을 되살리기 시작했고, 현대문명의 이기 없는 자연 상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양한 기계와 도구들을 만들어 냈다. 특히 환경을 황폐하게 만드는 연료나 프레온 가스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자연 동력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태양과 바람을 이용한 대체에너지다. 물론 이들이 개발할 당시에는 기름 값이 얼마 안 비쌀 1970년 당시라 크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를 개발한 것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대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콜롬비아의 오지주민과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오염된 물로 인해 고생 받는 원주민을 위한 정수장치,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지역을 위한 대체에너지 생성기구들이다.

물론 이런 개발은 가비오따쓰를 만들기 시작한 몇 명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콜롬비아의 유수대학과 손잡고 그들에게 생태계를 활용할 수 있는 연구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가비오따쓰 자체가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철저한 생태공동체였기에 한번 이 곳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비록 허름한 오지이지만 모든 사람이 공평한 대우를 받는 곳,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분위기,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완벽한 자연, 이것 모두가 사람들에게 주는 안정감과 평화로움이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우리가 파괴한 환경의 저주 속에서 고통 받으며, 현대의 이기 문명에 쫓기듯이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편리함을 포기한 채 오래된 미래라는 개념의 삶을 찾아 되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보며 가비오따쓰에서 그 해답을 찾을 듯했다. 누구도 더 가지고자 하는 않는, 누구에게도 지시하거나 지시받지 않는,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함께 고민하며 더 나은 해답을 찾아가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 뭔가 세상에 이로움을 남기며 만족을 얻는 삶. 이런 삶이 가비오따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도 중간에는 무척 어려웠다. 세상을 돕겠다고 나선 많은 사람들이나 기관, 콜롬비아 정부나 UN 등, 들도 지속적인 지원보다는 주변정세에 의해 쉴 새없이 지원정책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들도 먹고 살아야했고 최소한의 소득이 필요했다. 이들은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우리도 남들처럼 상품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가?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들이 키운, 정확히 표현하면 자연이 알아서 키워준 소나무가 그들에게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 주기 시작했다. 바로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이다. 그것도 팔기 위해 소나무의 자양분을 억지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 스스로가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살충제로서의 송진 말이다.

이들은 요즘 꿈에 부풀어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 자체가 수익을 보장해주는 모습으로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연을 무시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어떤 나라도 스스로의 자연을 파괴하며 그것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연을 보호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삶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가비오따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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