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윌 듀랜트는 무려 이 책을 11년간 준비했고, 3년 동안 집필하는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에 걸맞게 이 책은 전문적이면서도 너무 딱딱하지 않게, 논리학, 미학, 윤리학, 정치철학, 형이상학 등 철학의 각 분야와 연관된 철학자의 삶과 사상을 펼쳐보임으로써 저자가 주장하는 철학의 최고 효용 가치인 "종합적 해석"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외관은 철학사의 연대기에 따라 철학자를 단순하게 소개하는 것 같지만, 각론에 들어서면 철학사의 변곡점에 있는 철학자의 삶과 사상을 통해, 철학의 흐름과 변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다. 특히 단순히 철학적 사상의 개요을 설명하기 보다는, 철학자의 다양한 저술을 직접 인용하면서도 그의 삶, 시대적 배경과 연합시켜 사상적 탄생의 줄기를 가늠하도록 한다. 


가장 흥미 있게 읽은 부분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이었다. '범신론'과 '창조적 진화'라는 대표적 특징만 외워야했던 일천한 암기식 공부의 허상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느낌이랄까. 저자의 주장처럼 철학은 독립적인 삶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될 수 있는데도, 삶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해답의 단초는 적확하면서도 간결한 저자의 기술에서 한껏 드러난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이 보여주는, 나란 존재와 외부라는 세계의 양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외부의 세계가 나라는 존재와 합치될 수 있는 통일성, 그 근간을 추구하고자 했다. 가족으로부터의 배척, 종교적 파문, 외부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도 그를 구원해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던 그의 철학이 아니었을까. 스피노자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평온이 가능한지, 철학과 삶으로 대변한다. 


스피노자는 성경은 오류와 모순이 아니라 이성적 합리성에 의해 기술 된 것으로 오히려 은유와 비유로 표현되었다고 단언한다. 직접적인 기술이라면 자연이 평소 질서에 따라 움직이면 신의 활동이 없는 것이며, 기적은 신의 선민들을 위해 신이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신과 자연의 대립되는 힘을 가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하는 방식은 인간으로부터 신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므로, 성경은 은유와 시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파괴되면 또 다른 신앙 형태를 만들어 낼뿐이라고 진단한다. 즉 자신들을 끊임없이 추종하는, 기적과 이적의 신이 존재해야 것. 이단으로 몰렸던 철학자는 이성으로써 기적의 신앙이 갖는 부조리를 간파한다. 


그러므로 신과 자연이 불변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철학자는,  불변하는 법칙에 따라 활동하는 동일한 존재인 법칙, 즉 영원한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 듀랜트는, 이러한 점에서 스피노자가 추후 헤겔 철학으로 이어지는 연결점을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베르그송은 기계론과 유물론에 잠식당한 인식 세계에 생경한 관점을 투척한다. 그는 우리가 공간적 개념으로 사고하려는 경향성 때문에 유물론에 기울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공간처럼 시간 역시 모든 생명과 실재를 지탱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 성장, 지속되는 것으로써, 과거 전체가 연장되어 현재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되고 있다. 즉 모든 단계에서 새로운 축적이 생겨 결코 과거와 같지 않으며 기계론적이고 기하학적인 예측 가능성은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는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는 정신이 곧 뇌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지성은 고정된 것을 포착할 뿐 생명의 지속적인 흐름을 보지 못하므로, 물질을 보면서도 에너지는 보지 못하는 맹점을 찾아낸다. 또한 생명은 관성과 우연에 반대되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산하는 우주적 충동이라고 정의하면서,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할 때, 즉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우리의 삶을 계획할 때 우리는 내면에서 창조를 경험한다고 제시한다. 


지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기획을 바탕으로 철학자의 사상과 삶을 꼼꼼하게 기술한 저자 덕분에, 이 책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두터워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상 위인들은 우리들에게 그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와 영혼이 있을 때에만, 적어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꽃피게 한 사상의 뿌리가 간직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위인들과 같은 경험을 했으나 우리는 이러한 경험에 간직된 비밀과 미묘한 의미를 남김없이 흡수하지 못했다. 우리는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실재의 배음을 들을만큼 민감하지 못했다. 천재는 실재의 배음과 천체의 음악을 듣는다. 천재는 피타고라스가 철학을 최고의 음악이라고 말한 의미를 알고 있다 - P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헌법 - 대한시민 으뜸교양 憲法 톺아보기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지음 / 지안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법치주의, 상위법 우선의 원칙, 법률 우위의 원칙.. 몇 가지 법 원칙을 아는 것 외에 딱히 법률을 찾아보거나 법원에 근거해 법의 체계를 뒤쫓는 일은 줄곧 논외로 생각했다가, 헌법 개정이 사회적 화두가 된 후 다시 한번 헌법에 대해 읽어야겠다는 막연한 욕심이 생겼다. 


우리 사회의 큰 화두를 바꾸게 될 헌법 개정 논의가 잠깐 사회적 이슈를 끄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여러 지난한 정치 공방에 막혀 지지부진한데다가 개정의 논의도 주로 정치 체제 중심으로 모아지는 것 같아 더더욱 독서 의지에 불이 붙었다고 할까. 다양한 지표는 경제적, 물질적 부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권리나 권익은 크게 향상된 것 같지 않은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나름 뿌리를 찾던 차에 마주하게 된 책이다. 


저자들은 우리가 사는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정책이나 제도들의 외연을 만드는 가장 바깥쪽의 테두리인 헌법을, 암기식 고준담론이 아니라 시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에세이식으로 기술하였다고 소개하면서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난 후 우리가 만들어야할 헌법의 현실을 꿈꾸어나가기를 희망한다. 


이 책은 헌법의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국회, 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선거관리, 지방자치, 경제, 헌법개정, 부칙의 순서대로 조문을 세세히 설명하고, 다시 조문에 대한 주석, 그리고 조문과 관련된 사회적 사건이나 이슈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또 일부 조문의 경우에는 법률의 명확성에 근거하여 간결하고 명료한 조문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가장 눈길을 끈 부분은 아무래도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규정된 제2장으로, 우선 제11조제2항 사회적 특수계급의 불인정 조항, 제11조제3항 훈장 등의 효력 및 특권에 대한 조항 등에 대한 설명이었다. 실제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가중화되는 상황과 연결하여 형평성을 제고하는 방식으로 개정해야 하며, 귀족이 사라진 시대 훈장에 대한 조항의 불필요성 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 있다. 


한편 국민의 주요 권리 중에 건강권이 단순히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거나,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한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관련 조항은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새롭게 개정될 필요성이 있다는 데 생각이 더해졌다.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역량 발휘의 핵심이 되는 건강 보장에 대한 권리와 사회적 책무가 보다 구체적으로 헌법에 명시될 필요가 있겠다. WHO가 제시하는 건강에 대해 알 권리, 건강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 건강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바탕으로 우리 헌법을 살펴보면, 건강의 3대 권리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테크노크라트의 등장도 주의 깊게 생각해볼 주제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법률안을 ,국민의 대표인 국회보다 전문지식과 과학기술을 갖춘 엘리트 공무원들이 정책 수립 및 필요 입법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새로운 시대, 정부나 국회뿐만 아니라 새로운 입법 주체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하고 있지만, 테크노크라트는 사실상 정치적 권력을 구사하고 있는 격인데다 여전히 '국민의 지배'가 아니라 '왕 또는 어떤 지배층의 지배'가 익숙한 것 같은 우리 정치 문화를 돌아보며 잠깐 엉뚱한 상상도 했다. 


헌법 제119조제2항 경제의 민주화 부분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적정한 소득 분배와 더불어 경제 주체간 조화를 통해 경제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조문은 그 의미를 제대로 되살려내야할 부분. 우리 헌법이 엄연히 경제 민주화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불평등이 심화되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면, 이에 대한 엄중한 인식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 책의 새로운 개정판이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지만, 저자들의 문제 의식은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헌법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제대로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것. 헌법 개정의 논의가 다시 이루어질 때, 정치 체재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장하거나 또는 외면하고 있던 주요한 규정들의 진의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좀더 치열해졌으면 하는 희망도 갖게 된다. 

헌법은 단순한 법률이 아니다. 꼭 필요한 내용만 갖추었다고 우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렇다고 헌법이 문학 작품일 수도 없다. 그 문장과 내용이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워도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을 바람직한 삶의 규범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실현의 의지다. 그 헌법을 만들어 지니고 있는 모든 ‘나‘의 의지가 실제의 헌법 현실을 창조한다. 그래서 헌법을 읽어야 한다 -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강 격차 - 평등한 사회에서는 가난해도 병들지 않는다
마이클 마멋 지음, 김승진 옮김 / 동녘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건강이 단순히 '질병 없음'의 인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상태, 의 개념으로 변해가면서, 건강 영향 요인 또는 건강 결정 요인에 대한 관심도 의학적, 개인적인 부분에서 사회적, 문화적인 부분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건강의 권리와 사회적 책무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은 개인이 알아서 챙겨야하고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이 첩경이라고 치부한다면, 가장 '교과서격인' 답변은 마멋의 응답일 수 있겠다. 건강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사회적인 결과라는 명쾌한 답변. 그는 건강, 그리고 사람들간의 건강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역량의 박탈을 해소해야한다고 단언한다. 


이 책의 주제는 서두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단순하지만 예리한 그의 질문은, '왜 기껏 환자를 치료하고서는 그가 병을 얻었던 환경으로 돌려보내는가'로 시작한다. 


의사 출신인 저자는 환자들의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이고, 병을 일으킨 여건이 사회에 있는데, 그 요인에 대한 적절한 개입 없이 병만 치료한다면, 의료는 결국 '실패한 예방'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그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을 두루 소개하면서, 그동안 사회적, 정치적으로 의제화되기 어려웠던  건강의 문제를 다양한 사례로 제시한다. 


그의 관심사는 건강과 생활 습관에 초점을 맞추는 보건 정책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일례로 식습관, 운동, 흡연 등등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러한 선택을 용이하게 하는 광고, 마케팅, 가격, 접근성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보건 정책은, 단순히 습관을 바꾸라고 권면하기 보다는,  건강에 좋은 선택이 쉬운 선택이 되도록 만들고,  동시에 건강에 좋은 의사결정을 하도록 역량을 강화하면서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고 향유할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고 부연한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에 대한 그의 주장은 역량 중심 접근법과 맞닿아있는데, 그는 역량의 박탈을 세 가지 차원에서 고려해야한다고 정리한다. 우선 가장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부분이 우선 풍부해지도록 해야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며(사회심리적 차원),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정치적 차원) 역량이 박탈된 것이라고 정리하는데, 건강 및 보건 정책이 왜 사회권과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자유권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건강 의제의 정치화가 왜 필요한지 가늠하게 한다. 


또 생애 결정적 시기에 대한 신경학적 연구, 교육과 건강의 기여 연구, 노동조건이나 일 등과 건강의 연관성 연구, 지속가능성 및 회복력과 지역 공동체 연구, 자본주의 및 공정성 등과 건강의 연계성  연구 등 다양한 사례가 제시되고 있는데, 건강의 사회적 책임, 건강 격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필요성에 대해 꼼꼼하게 뒷받침한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물질적 문제는 어느 정도 넘어선 지금, 마멋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는 건강 역량의 측면에서 건강 격차에 대한 관심을 쏟아야할 때가 아닐까. 사람이 사는 동안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근간이 되는 건강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면, 더 치열하게, 그리고 더 집중적으로 건강의 공정성, 형평성에 대해 물어야하지 않을까. 

나는 물질적, 심리사회적, 정치적 역량 박탈이 건강과 건강 형평성에 해롭다고 주장했다. 역량 박탈은 국가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띤다. 하지만 건강이 공정하게 분포하도록 해야 한다는 일반론은 나라마다 다르지 않다...무언가를 하자, 더 많이 하자. 더 잘 하자. - P4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토리의 빈약성을 문체의 유려함으로 가리거나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과도해 문체의 아름다움을 살려내지 못하는 게 일반이라면, 짜임새 있는 전개는 물론 문장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 싶다.  오르한 파묵의 최대 장점은 흥미진진한 삽화를 끊임없이 투척하면서도 문장의 정확한 묘사와 미적 감각을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 연극, 음악의 선사하는 아름다움보다 더 황홀한 것이 어쩌면 문학이 주는 고혹미가 아닐까 싶다. <내 이름은 빨강>이 주는 인상은 '미'의 황홀경으로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 


단순히 그림을 주제로 채택해서가 아니다. 그는 시종일관 인물, 동물, 상황, 배경, 그 모든 것을 생생한 색체와 살아 움직이는 생명, 탄탄한 근육과 골격을 갖추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몸 자체인 것처럼 그려낸다. 그의 탁월한 솜씨 덕분에 잠잠한 독서가 아니라, 시종일관 무언가의 등에 올라탄 것만 같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긴장하고 조바심 나는 독서로 침잠하게 된다. 


더불어 작가의 노련한 소설의 구성 방식도 한 몫을 한다. 소설은 놀랍게도 등장 인물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들의 심리, 관찰, 의견 등을 명확하게 들려주는 방식과 함께 살인자를 쫓는 추리 방식을 적절하게 교차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술이란 신의 관점에서 묘사해야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중심에 두고 접근해야하는가, 종교와 예술의 오래된 질문을, 전혀 진부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세련되게 제시한다. 


시작은 우물 바닥에서 죽은 엘레강스가 자신이 살해당한 상황을 고백하는 데서 출발하며 이야기는 줄곧 엘레강스를 죽인 살인자를 파고든다. 그와 함께 유럽의 화풍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열어가려는 에니시테, 그리고 그의 딸 세큐레와 두 손자, 에니시테를 따르면서 세큐레를 사랑한 카라와 세큐레를 유혹하는 시동생 하산, 세밀화가 나비, 황새, 올리브, 화원장 오스만 등이 차근차근 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예술 세계, 일상의 풍습에도 흠뻑 젖을 수 있는데, 신의 색이자 죽음의 빛깔인 "빨강'의 색채감은 그 어떤 매체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되는 느낌이다. 단순한 빨강이 아니라 너무도 강렬하고 치명적이어서 더 유혹될 수 밖에 없는 그 신묘한 힘이 작가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 나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중심, 터키에 대한 매력으로 굳어진다. 

자네는 왜 순수함 속에 남으려는 건가, 우리처럼 되어서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자고..자네들은 평생 자신의 화풍을 갖기 위해 유럽인들을 모방할 거야. 유럽인들을 모방한 결과로 끝내 자신의 화풍도 가질 수 없을 거야 - P3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브리의 천재들 - 전 세계 1억 명의 마니아를 탄생시킨 스튜디오 지브리의 성공 비결
스즈키 도시오 지음, 이선희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독한 '성실'이 얼마나 설레고 떨리는 울림이 되는지 오랫만에 느껴본 것 같다. 제목은 <지브리의 천재들>이지만, 독자에게 부제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지브리, 성실함이 여는 새로운 세계>정도로 붙여두고 싶다. 그만큼 이 책의 상당 부분은 다카하타 이사오의 고집스러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 스즈키 도시오의 배짱이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지브리가 어떤 집요함과 성실함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냈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지브리의 연이은 수작들은 결코 허튼 행운이나 시대의 인기에 기댄 요행이 아니라는 것을 꼼꼼하게 짚어낸다. 


개봉 일정이 코 앞인데도 자기 페이스를 밀어부치는 장인 정신으로, 독특한 미학을 펼쳐보인 다카하타 이사오의 삽화, 끊임없이 번복과 수정을 마다않는 완벽주의 때문에 스텝을 질리게 만들지만 그러함으로 결국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저력,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을 특유의 감성으로 풀어냈지만 요절한 콘도 요시후미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마움, 철저한 기획을 바탕으로 소소한 이야기에서 웅장한 주제의식을 끌어내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재능,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려는 미야자키 고로, 지브리의 영광을 뒷받침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마침내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까지 얻어내는 저자 스즈키 도시오까지, 책은 개성있는 이들의 흥미돋는 숨은 이야기를 쉬지 않고 풀어냄으로써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지브리의 작품이 가진 놀라운 마력은, 단순히 캐릭터의 표현이 예뻐서, 환상과 현실을 잇는 스토리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명감으로 눌러담은 삶을 대하는 자세가, 지브리의 작품에서는 깊이 뿜어나온다. 추함과 아름다움이 섞이고 두려움이 놀라움으로 변하며 경계와 적대감이 공존과 화해로 재해석될 수 있는 까닭은, 흔들리지 않는 성실함으로 버티는 지브리의 면면이 뒷받침하기 때문은 아닐까. 


가장 반가운 대목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노구를 이끌고 2022년 개봉을 목표로 새로운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브리의 작품을 습관처럼 되새겨 볼 때, 한번씩 꺼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소수정예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원하는 소수정예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작업할 수 밖에 없습니다. - P3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