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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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의 빈약성을 문체의 유려함으로 가리거나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과도해 문체의 아름다움을 살려내지 못하는 게 일반이라면, 짜임새 있는 전개는 물론 문장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 싶다.  오르한 파묵의 최대 장점은 흥미진진한 삽화를 끊임없이 투척하면서도 문장의 정확한 묘사와 미적 감각을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 연극, 음악의 선사하는 아름다움보다 더 황홀한 것이 어쩌면 문학이 주는 고혹미가 아닐까 싶다. <내 이름은 빨강>이 주는 인상은 '미'의 황홀경으로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 


단순히 그림을 주제로 채택해서가 아니다. 그는 시종일관 인물, 동물, 상황, 배경, 그 모든 것을 생생한 색체와 살아 움직이는 생명, 탄탄한 근육과 골격을 갖추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몸 자체인 것처럼 그려낸다. 그의 탁월한 솜씨 덕분에 잠잠한 독서가 아니라, 시종일관 무언가의 등에 올라탄 것만 같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긴장하고 조바심 나는 독서로 침잠하게 된다. 


더불어 작가의 노련한 소설의 구성 방식도 한 몫을 한다. 소설은 놀랍게도 등장 인물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들의 심리, 관찰, 의견 등을 명확하게 들려주는 방식과 함께 살인자를 쫓는 추리 방식을 적절하게 교차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술이란 신의 관점에서 묘사해야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중심에 두고 접근해야하는가, 종교와 예술의 오래된 질문을, 전혀 진부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세련되게 제시한다. 


시작은 우물 바닥에서 죽은 엘레강스가 자신이 살해당한 상황을 고백하는 데서 출발하며 이야기는 줄곧 엘레강스를 죽인 살인자를 파고든다. 그와 함께 유럽의 화풍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열어가려는 에니시테, 그리고 그의 딸 세큐레와 두 손자, 에니시테를 따르면서 세큐레를 사랑한 카라와 세큐레를 유혹하는 시동생 하산, 세밀화가 나비, 황새, 올리브, 화원장 오스만 등이 차근차근 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예술 세계, 일상의 풍습에도 흠뻑 젖을 수 있는데, 신의 색이자 죽음의 빛깔인 "빨강'의 색채감은 그 어떤 매체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되는 느낌이다. 단순한 빨강이 아니라 너무도 강렬하고 치명적이어서 더 유혹될 수 밖에 없는 그 신묘한 힘이 작가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 나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중심, 터키에 대한 매력으로 굳어진다. 

자네는 왜 순수함 속에 남으려는 건가, 우리처럼 되어서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자고..자네들은 평생 자신의 화풍을 갖기 위해 유럽인들을 모방할 거야. 유럽인들을 모방한 결과로 끝내 자신의 화풍도 가질 수 없을 거야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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