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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탄 자는 지나가다
한수산 / 민음사 / 199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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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미지가 없어 다른 사이트에서 복사해 왔습니다.)
이 소설이 처음 쓰여진 것은 1982년. 당시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이 작품을 게재할 예정으로 조판까지 끝내놓은 상태였는데, 결국 편집진에서 "당국에 의해 문제화될 가능성이 높고, 작가의 안위는 물론 잡지의 존폐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황 판단에서 게재를 무효화 했단다. 그 이후 몇 번 더 다른 출판사를 통해 출간할 계획을 세웠지만 번번이 같은 이유로 출판은 좌절되었고, 결국 처음 작품이 쓰여졌던 시점으로부터 16년이나 지난 1998년에서야 민음사를 통해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말(馬)은 권력의 토대, 기반을 의미한다. 작가는 "말(馬)은 말(言語)이 되고 힘이 되었고, 힘은 혁명이 되었다."(21p)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말을 장악하고 있던 마상인(馬上人)들은 말 위의 질서, 말 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혁명(실은 쿠데타)을 일으킨다. 그리고 별다른 저항없이(물론 어느정도의 살육은 있었지만...) 너무도 쉽게 혁명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뒤, 천지가 요동할 사건이 생긴다. 그건 "죽음"이 사라진 것.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총을 쏘고 목을 베도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아니 죽지 못한다. 노인들은 죽음없이 계속 늙어가고, 도축장의 소, 돼지들은 머리에 도끼를 꽂고도 죽지 못해 어슬렁 돌아다니고, 화살맞은 새들은 화살을 꽂은 채로 날아다니는 아비규환의 지옥이 펼쳐지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피하고 싶은 삶의 종착이지만, 그 죽음 때문에 삶은 아름다워진다. 태어날 땐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는 것. 언제 다가올 지 모르는 죽음이 후회스럽지 않도록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삶을 아름답게 해 주는 죽음이 없어진 삶은 더이상 참다운 삶이 될 수 없다.
결국 죽음이 돌아온 것은 혁명을 일으킨 마상인들이 철수를 선언한 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남은 것은 "말 탄 자들. 지나가다."라는 짧은 글이 적힌 표지판 뿐이다.
새롭고 온전한 질서를 세우겠다고 시작된 혁명이 삶의 가장 기초적 질서인 죽음을 없애 모든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풍자는 새롭고 신선하다. 작가는 "영혼의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 영혼의 구제든 다른 영혼의 구제든, 정치의 길에서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52p)고 말하며 정치 권력이 가진 파괴적인 속성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사실 출간된 지도 오래되었고, 한수산의 책이라곤 고등학교 때 순정만화같은 줄거리를 가진 <바다로 간 목마> 한 편밖에 읽은 적이 없어서 처음 읽을 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단호하면서 정확한 문체에, 매서운 작가의 시선에 매료되었다. 뒤쪽에 실린 짧은 소설 <맑고 때때로 흐림> 역시 풍자는 아니지만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이해와 청산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와 닿았다.
독서의 매력은 이런 데 있는 것 같다. 때로 아무런 생각없이 집어든 책 속에서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배우는 것... 다음에는 또 어떤 책에서 무엇을 배우며 살아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