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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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경기도 부천에서 30년을 살았다. 처음 부천으로 이사왔을 땐 아직도 시골같은 정서를 듬뿍 지니고 있어, 배가 고픈데 부모님이 안계시면 아무 집이나 문 열고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다녔고, 김장도 온 동네 아주머니가 모여 함께 하곤 했다. 여름철 해질 무렵이면 동네 골목 끝 수퍼마켓 앞에 놓인 평상에 아저씨, 아주머니, 아이들 다 모여 어른들은 술을 마시고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놀곤 했었다. 

중동에 신도시가 세워질 무렵, 나는 그 부근의 여고에 다녔었다. 선생님들은 "야! 저기 우리 집 올라간다." 하며 좋아하셨지만 나는 그 건물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복도 유리창으로 보면 넓은 논이 보이고, 그 논의 끄트머리에 지평선으로 해 넘어가는 게 보이고, 그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자판기 커피 손에 들고 친구들과 속닥거리는 기쁨을 누리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천이 아파트촌으로 바뀌면서 내가 기억하는 정감있는 부천은 사라져갔다.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아파트에 살면서 결혼살림을 꾸려갔지만, 내 기억 속에 고향처럼 남아있는 부천의 이미지는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인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머물러있다.

김용택에겐 진메마을이 그런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속엔 김용택이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진메마을에 대한 그리움과 변해가는 농촌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이 한가득 담겨 있다. 천장에서 쥐들이 활개를 치고 다녀도, 차비가 없어 세 시간이 걸려 자취방까지 걸어가도, 기계에서 튕겨나오는 강냉이 받아먹다 정강이를 홀딱 데여도 가족, 이웃과 함께여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그 어린 시절...! 작가는 그런 개인적인 추억과 함께 마을 인물들을 구성진 어투로 소개하며 잃어버렸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도 함께 일깨워준다.

나는 특히 '그 집'이라는 글에 마음이 찡했다. 6.25가 끝나 피난생활에서 돌아와 작가의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에 관한 글이다. 초가지붕으로 구렁이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던 단칸 방, 식구가 늘어나면서 한 칸 한 칸 아버지 손수 방을 늘려가며 살았던 집. 작가는 그 집에서 마냥 재미나던 어린 시절과 첫사랑에 가슴설레던 청년시절을 보냈으며, 집을 손수 지으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단다. 해와 달과 별과 온갖 벌레들이 함께 살았던 집에 대한 이야기는 가난하지만 자기들이 살 집을 자기들이 손수 지어 단출하고 수수한 삶을 살았던 우리네 할아버지들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좋은 글이었다.

아직도 고향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가는 학교의 아이들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고향에서 젊은이들이 사라지는 세태가 누구보다 가슴아픈 듯 하다. 책의 맨 끝 '짧은 생각들'이라는 글에서 이런 세태에 대해 '그것이 진짠지 알지. (중략) 거기선 인간을 따뜻하게 감사고 눈물로 어루만지고 사랑으로 따독이는 인류애가 나오지 않아. 거긴 희망이 없어. 도시에서 저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재빠른 삶 속에선 인간을 구원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라고 가슴아픈 독설을 쏟아낸다. '인간의 냄새는 땅에서 나올 뿐이야. 땅에서만 창조가 있어. 사람의 꽃은 땅에서만 흙에서만 피어나 시들 줄 안다. 헛소리 같지만 신념과 믿음의 인간을 세울 수 있는 곳은 흙뿐이야.' 라며 한탄하기도 한다.

어쩌면 흙에서 인간의 신념과 믿음을 세우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도시에서 희망을 만들고 사랑으로 따독이는 인류애를 만들어내는 것도 인간 아닐까? 작가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줄을 '그래도 인간은 있어.'라는 말로 맺은 것은 아닐까? 

책을 덮은 후에도 그 마지막 말이 잊히질 않는다. 그래도 인간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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