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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었다. 부패해가는 권력과, 부패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언론통제의 음모를 읽으며 인간에게 과연 합리적 이성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의문스러웠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권력을 장악했다 하여 한없이 부패해가지도 않을 것이고, 민중들 역시 부패해가는 권력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지만은 않을 터인데, 저자는 인간에게 사회를 질서있고 안정되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믿는 듯 했다. 아니면, 권력의 속성이 인간을 그렇게 타락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그리고 며칠 동안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동물농장>과는 주제도, 내용을 전개해가는 방식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이 책 역시 인간의 '이성'과 '양심', 즉 '인간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를 깊이있게 천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느껴졌다.
이 책에서는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갑작스럽게 눈이 머는 질병에 걸린 뒤 서서히, 또는 급작스럽게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고자,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눈 먼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자 그 질서를 잃고 짐승으로서의 본능에만 의지해 삶을 연명코자 한다. 누군지 모르는 이성과 교미를 하고, 강간을 일삼고, 약탈을 일삼으며, 아무 곳에서나 배변 욕구를 해결하는 사람들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품위 따위는 내버린 지 오래다. 마지막까지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 역시 자신과 다른 눈 먼 사람들을 위해 살인을 하게 되니, 눈 먼 사람이 다수가 된 상태에서는 눈 멀지 않은 사람 역시 온전히 인간성을 유지하며 살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본다"는 것은 타인만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자신을 타자화해서 관찰하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스스로에게 떳떳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인간성"은 자신과 타인을 "볼 수 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눈은 떴지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모르고,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 욕심에만 급급한 현대인을 풍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풍자는 참으로 신랄하면서도 위트가 넘쳐 책 읽는 재미와 묵직한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정말 오랫만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책 한 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