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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이전의 버마 아웅산 폭발 사건이나 이웅평 소령 귀순 사건에 대한 기억은 생생한 데 반해 체르노빌 사건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다가올 아시안 게임에 국력의 대부분을 쏟고 있을 때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사실에 대한 정확한 보도가 국민들의 동요를 불러올까 봐 보도를 자제했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체르노빌 사건은 "우리나라에는 영향이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텔레비전 뉴스 보도를 무심히 보았던 게 전부였다.
체르노빌에 대한 관심은 사건이 있은 뒤 십여 년이 지나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되살아났다. 여전히 폐허인 채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발전소와 그 주변 지역, 방사능 피폭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과, 여전히 각종 암에 시달리며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 끔찍한 기형을 지니고 태어난 짐승과 아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심히 지켜보았던 뉴스 속의 사건이 실은 세상을 뒤흔들 만한 크나큰 사고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고 발생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책을 통해 체르노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사실적이고, 잔인하고, 무섭고, 두려운 책 <체르노빌의 아이들>
이 책은 15살의 소년 이반이 최초의 원전 폭발을 목격하는 것으로부터 내용이 시작된다. 주로 원전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가족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살고있던 이반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라고 여겼던, 아버지의 직장이기도 한 그 곳의 폭발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이젠 끝장이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경황없이 떠나게 된 피난길... 사람들은 방사능에 피폭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채 알지도 못한 채 버스로, 자가용으로 길을 떠나게 되지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나가고, 실명을 하고, 점막과 장기의 출혈로 고통을 받으며 죽음이 자신들을 향해 엄습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남아서 화재진압과 뒷처리 작업을 하던 인부들과 발전소 직원들 역시 방사능에 대한 대비 없이 거의 맨 몸으로 현장에 투입되어 처참하게 죽어간다.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인 책의 내용은 책장을 넘기는 손을 주저하게 했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은 고통으로 먹먹해졌다. '차라리 허구였으면, 작가의 머리 속에서 그냥 재미삼아 만들어낸 내용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을 읽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저자는 '지금 사람들이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지구는 끝장이다.'(167p)라는 생각 때문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장 안전한 에너지 생성 방법이라 일컬어지는 원자력 발전이 실은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군수산업(166p)의 일종이며, 원자력 발전소 추진책은 에너지 부족 문제가 아니라 독점자본의 이익과 결부된 문제(167p)라고 고발하기도 한다.
책을 읽고 나서 문득 박혜경의 맑은 목소리와 함께 한동안 방영되던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의 광고가 생각났다. 우리나라도 역시 원자력 발전소의 안정성과 유용성을 알리기에만 급급했을 뿐, 발생 가능한 사고를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알리고 사고발생시 대처 방법을 교육하는 데에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이대로 가면 인류에게 내일은 없다."는 진정한 고백이 지금의 비극을 극복하는 데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168p)고 가슴을 치며 호소하고 있는데, 과연 인류는 그 희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얄팍한 책이지만 그 울림이 너무나 크고 깊어 밤 늦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