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우리가 함께 진실을 궁리하려면. <빨간약>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를 가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19대 대선이 부정선거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해도 가리기 어려운 주장과 논점이 난무한다. 같은 주장을 하는 쪽이라 해도 그 안에는 음모론에 가까운 목소리와 적절한 문제 제기라 할 목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럽다. 이 어려움과 혼란스러움이 정리된 이상적 상태를 우리는 때로 진실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진실은 달성되기 이전, 추구의 대상으로 호명되는 데서 머무른다. “진실을 규명하라”,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은 진실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지시한다. 특히 어떤 진실을 갈망하는 이가 소수일 때에, 진실은 더 멀고 먼 곳에서만 머문다.


이는 누군가는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 세계의 슬픈 사실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혹자는 진실을 은폐해야 할 필요가 있고, 혹자는 진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지금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기에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이다. 아니, 지금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이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처해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을 향해 말을 거는 만화책이 나왔다. 부제부터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에 대하여. 제목은 심지어 <빨간약>이다. 제목과 부제가 한데 어우러져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혁명 세력의 수장 모피어스가 파란 알약과 함께 내민 빨간 알약, 그것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된다.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하고, 비로소 자신이 살던 세계가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세계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장면과 그에 이어진 영화의 이야기는 네오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내게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의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였다. 세계에 내가 모르는 어떤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의 틈이 열렸고, 따라서 그때부터 나는 비로소 세계에서 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관찰하게 되었다. 어쩌면 공부하는 사람이 된 결정적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처럼 강력한 이야기에 기대어 책 제목을 지은 <빨간약> 속 여섯 만화는, 네오에게 작용한 빨간 알약만큼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내게 작용한 그 이야기와 같은 싹을 틔운다. 한국 사회의 진실을 궁리하게 하는 싹을 말이다.


진실의 궁리라는 측면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한수자 작가의 <두 할머니>. 50여년 전에 북한에서 남파되어 남한 땅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두 할머니를 작가가 찾아간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생각과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 에피소드의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인터뷰가 아닌 르포 만화답게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표정을 과감히 드러낸다. 그 가운데 제기한 그의 물음은 진실을 향한 첫걸음으로 더할 나위 없다. “그분들 말씀이 허황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만큼 / 우리가 북한의 실상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지 않나?” 이렇게 물꼬를 튼 진실에 대한 궁리는 북한을 경유해 작가가 살고 있는 남한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계속 전하던 작가는 이제 일상의 현실 속에서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선 이들의 계기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계기는 다시 보기다르게 보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다시 다르게 보기는 대개 이해 불가능한 만남에서 비롯한다. ‘와는 어떤 사안을 달리 보고 있는 어떤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다름을 깊이 지각할 때, 혹은 어떤 큰 사건 앞에서 더 이상 가 보던 방식으로는 세계를 보는 일이 불가능해졌을 때, 다시 다르게 보아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아닌 타자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진실의 확인 과정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진실을 알기 전의 와 진실을 알고 난 후의 는 다른 존재다. 또 새로 알게 된 사실을 통해 나의 앎을 비추어볼 때에야 진실을 향한 길이 열린다. 한수자 작가는 의문다시 봄과 함께 그 길에 들어서며 독자들에게 같이 걷자고 작품을 통해 손짓한 것이다.



김홍모 작가의 <진짜 간첩>은 또다른 방식으로 손짓한다. <두 할머니>의 두 통일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오래전 남파되었던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 씨와 만나서 나눈 대화를 담은 이 작품은, 그 대화를 만화만이 그려낼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한다. 이 독특한 기록의 표정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표정을 최대한 지우는 것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눈코입이 없는 얼굴이 말풍선을 통해 말할 때, 독자는 그 얼굴과 말풍선을 함께 본다. 그냥 글과는 달리 얼굴이 있고 보통 만화와는 달리 표정이 없는 얼굴에서 들려오는 말풍선 속 이야기는, 따라서 독자에게 최소한 세 가지 이유로 색다르게 들려온다.


먼저 만화가 뽐낼 수 있는 표정 묘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신뢰감을 준다. 만화 속의 인물이 부드러운 표정이나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오히려 말풍선 속의 말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 계몽이나 설득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작가는 그저 이 간첩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들려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또한 지각되면서 독자는 판단의 주체가 된다. 다음으로 독자인 우리의 모름이 중층적으로 밝혀진다. ‘간첩이라던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점을 이 만화의 얼굴은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눈치 챌 때, 우리가 간첩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비로소 의심의 대상이 된다. 또 우리가 그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건조한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될 때, 그 얼굴과 표정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표정 없는 화자와 마찬가지로 표정 없는 청자를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표정을 스스로 채워 넣을 수 있다. 어떤 표정도 요구되지 않기에 독자는 비로소 말풍선 속의 낯선 주장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기록의 표정은 따라서 독자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한 사람과 그 사람을 가둔 사회에 대한 진실을 궁리하게 하는 전권을. 이것이 김홍모 작가의 손짓이다. 마지막에 사진을 매개로 하여 그려진 표정은 작가의 궁리 도중에 스친 하나의 진실을 담아낸 따뜻한 사족일 뿐이다.


더 이야기해야할 작품이 많지만 작품들 모두의 공통점을 부각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여섯 작품의 손짓 방식과 힘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진실을 궁리하는 작가 스스로의 모습을 등장시켜 그 자신의 손을 흔든다. 그리는 이가 작품 속에서 자신을 그리며 그 경험과 생각을 밝히고 나선다는 사실은 의외로 중요하다. 그들은 마치 <매트릭스>의 모피어스처럼, <빨간약>을 들고 <빨간약> 속에 등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과 달리, <빨간약>은 확고한 어떤 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우리의 진실을 함께 궁리하자고 청한다. <빨간약>의 모피어스들은 그들의 진실을 곧바로 말하지 않는다. 다른 진실을 믿고 있거나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 그들 가까이 서서 함께 진실을 궁리할 필요를 제기할 뿐이다.


나는 이 겸손하고 솔직한 말 걸기가 참 좋다. 이들 작가들은 자신도 진실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바로 그것을 망각하고 상대방을 향해 날선 말을 내뱉고 있는 사람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더 흔한 시절에, ‘우리안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무엇을 향해 진실을 함께 궁리해 보자고 말하는 이들의 방식은 참으로 값지다. 고맙고 반갑다. 그리고 참으로 나누고 싶다. ‘우리를 향한 이 섬세한 손짓을.


2015.9.3 송고

2015.9.15 <주간경향> 1143호



2015년 11월 4일 작가와의 대화 안내 포스팅. 사회를 제가 봅니다.

http://blog.aladin.co.kr/literaturer/7886581


빨간약, 김홍모, 한수자, 김수박, 김성희, 권용득, 마영신, 보리,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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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 만화 세미나에서

빨간약 작가와의 만남을 기획했습니다.





[작가와의 만남] 

권용득,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마영신, 한수자와 함께 하는 《빨간약》 복약 설명회


《빨간약》 출간 뒤 석 달이 지났습니다. 

그간 약발은 좀 받으셨는지, 약장수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작가 6명이 총출동한 가운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25명의 독자를 모십니다.

《빨간약》 안팎의 못다한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들 함께 나누실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곳: 협동조합 가장자리 옥상 세미나실 (합정역 7번출구에서 걸어서 7분)

 서울시 마포구 성지로 36 (합정동 375-11)

-참가 신청: 구글드라이브 신청 http://goo.gl/forms/MCYkByzBnv


-참석 인원: 25명

-문의: karen@boribook.com (보리출판사) / bords2015@daum.net (가장자리)/ 트위터 @lit_er (만화난장 세미나 이끔이)

-주최: 협동조합 가장자리 (만화난장 세미나 팀), 보리출판사


빨간약, 김수박, 김성희, 마영신, 한수자, 권용득, 김홍모,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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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는 이들이 있다.

 

얼마 전 벌어진 드레스 소동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와는 다르게 보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드레스에서 누군가는 파랑과 검정 무늬를 보고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 무늬를 본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로 밝혀졌을 때, 다른 자명함은 빛을 잃는다. 바로 내가 본 것()'진실'이라는 믿음의 자명함이 그것이다.

 

전 지구인을 거의 반반으로 가른 드레스 소동은 곧 과학의 언어에 의해 수습된 듯하지만, 사실 이 세계는 좀처럼 수습되지 않을 소동 혹은 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밀양에 송전탑을 건설해야 한다/건설하면 안된다. '종북'이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다/대한민국을 좀먹는 것은 '종북'을 팔아먹는 이들이다 등등. 물론 이런 여러 인식은 어느 한쪽이 대세가 되고 다른 한쪽이 수세에 몰리면서 누군가에게는 이미 끝난 논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어느 논란이고 수세측은 꽤 오랫동안 자신들의 견해를 유지하며 열세의 싸움을 지속하기도 하며, 그 와중에 어느 순간 형세는 뒤바뀔 수도 있다.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야만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세였던가. 제국의 식민지 경영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가. 여성의 정치권과 사회적 권리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제한되어 왔던가. 흑인을 노예로, 다른 민족을 한 민족의 착취 대상으로,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혹은 보조자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판치던 세월이 인류의 역사에서 훨씬 더 길었다.

 

앞서 말한 예들은 너무 가깝거나 너무 오래된 이야기일 수 있겠다. 그러니 조금 멀리 있는 지금의 이야기를 해 보자. 화두는 '체르노빌'이다. 무엇이 떠오르는가? 방사능, 공포, 죽음, 폐허... 1986년 원전 폭발 참사 이후로 체르노빌은 우리에게 끔찍한 여러 이미지를 동반하는 공간임이 분명하다. 직접 가보지 못했건만 우리는 그곳에서 죽음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 2008년에 체르노빌에 직접 찾아간 프랑스 만화가 엠마뉘엘 르파주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의 참상을 그림과 예술로 증언하기로 동료들과 결의하고 체르노빌 방문을 준비하던 그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체르노빌에 대한 책들은 모두 죽음을 말하고, 가족은 방문을 만류하며, 작가 자신도 손이 마비되는 증상을 겪는다. 그곳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의 위험을 직접 보고 그것을 그려서 알리기 위해 결국 체르노빌에 발을 들인다.

 

방문 초기에 그가 본 것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금지구역에 들어서자 인간의 흔적이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황량한 도심 풍경이 그의 앞에 펼쳐진다. 당연하게도 그는 그 장면들을 모두 무채색으로 스케치북에 옮긴다. 하지만 잿빛으로 이어지던 그의 스케치북에 색깔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체르노빌 사람들의 의외로 밝은 표정이 유채색을 입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금지구역의 숲에서, 르파주는 색깔을 발견하고선 너무나 아름다운 총천연색의 그림을 그리고 만다. 그 스스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과 그것이 담긴 스케치북을 보며 그는 생각에 잠긴다.

 

나는 괴상하고 흉측한 나무와 검은 숲을 상상했다. / 그래서 검은색 파스텔과 어두운 잉크 목탄을 준비했다. / 그런데 찬란한 색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체르노빌이 아닌가!”

 

 

르파주는 그렇게 고뇌하면서도 솔직하게 그렸으며, 그리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그가 본 것에 대해, 그가 보여주게 될 것에 대해. 그렇게 현지에서 그린 그림은 그가 프랑스에 돌아와 그 경험을 전적으로 재구성해 내놓은 작품 󰡔체르노빌의 봄󰡕에 담겼다. 제목부터가 이율배반인 이 작품에서 우리는 체르노빌이 그저 죽음의 공간만은 아니라는 그림의 증언을 본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 두터운 고뇌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겹겹이 발견된다. 그 일말을 내 식으로 셋 정도만 정리해 본다.

 

하나, 보는 것과 해석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스스로 해석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꽤나 자주 누군가에 의해 이미 해석된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르파주는 열아홉 살의 자신이 처음 TV를 통해 목격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의 인상을 전한다. 그 이야기는 국가가 해석한 이미지를 우리가 본다는 것을 정확히 증언한다. 사고에 대한 소련의 초기 발표는 사망자” “겨우 두 명이었지만, 소련과 냉전 중이던 서방 세계의 관측은 희생자” “수천 명이었다. 또한 원전이 즐비한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프랑스는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다. 이미 발생한 비극은 남의 나라 이야기로 만들고, 자국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비극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프랑스는 체르노빌 원전을 노후한 것으로, 자국의 원전은 첨단의 것으로 그려냈다.’ 이처럼 해석한 것보게만드는 정치가 우리가 보는 것에 도사리고 있다.

 

. 자신이 본 것을 해석해서 보이게 만드는 누군가는, ‘보여주기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자국중심주의로 점철되어 있던 국가들과 달리 르파주가 체르노빌을 보여줄 때 지킨 윤리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이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자연은 인간의 손을 벗어날 때 가장 아름답다는 깨달음이다. 위 그림은 한 공간을 시간을 반영해 그만의 시각으로 보여주면서 이 깨달음을 전달한다. 참사 이전 숲의 과거는 잿빛 도로로, 참사 이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숲이 우거진 지금은 역설적으로 총천연색 자연으로 그려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려 자연이 제 빛을 회복했지만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위험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방사능 측정기 소리를 비롯한 다양한 장치를 통해 가시화했다. 솔직하게 보여주면서도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라고 요청하는 이 태도는, 국가의 보여주기와는 전혀 다른 윤리에 기대고 있다.

 

마지막. 그가 폐허에서 발견해 윤리적으로 전하는 의 희망은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꾸준히 쌓여온 것이다. 또한 쌓여갈 어떤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란 낙관론이 아니다. 시간은 그저 흘렀을 뿐이고, 인간의 대세에 억눌렸고 결국 원전 폭발로 오염되고 만 수세의 자연은 그 비참에서도 회복해 나가기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 상식이 된 많은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 동안 수세의 인식이 대세의 인식을 설득해 내고 이겨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을 논쟁적 사안으로 만들고 다시금 전혀 반대로 당연한 인식을 만든 것은, 자신이 본 것을 끝까지 믿고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대세와 '다르게 보던' 이들이다. 르파주도 그들 중 하나다.

 

이제 다시금 가까이 있는 지금을 본다. 후쿠시마를, 더 가까이는 최근 연장운행이 결정된 월성1호기가 있는 전북 김제를 본다. 지금 보여지는 대세는 분명 국가의 해석이다. 일본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는 이들이 있다. 또 달리 보게 만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나도 인간이다"라고 외친 흑인/여성/피식민자와 "너도 인간이구나"라고 새롭게 본 백인/남성/식민자의 합작이 그나마 차별이 덜한 세계를 만든 것처럼, 원자력 발전 문제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이들과 다르게 보는 이들이 원자력 참사가 없는 세계를 향해 걷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르게 보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고, 다른 목소리에 귀를 열어둔 사람들이다. ‘월성의 봄이 언젠가 이율배반의 표현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사람들에게 기대를 건다.

 

2015.3.5 송고

2015.3.17 <주간경향> 1117호

 

 

* 이 글 후에 <체르노빌의 봄>으로 쓴 다른 글의 링크도 달아둡니다. 기나긴 글입니다.ㅎㅎ

-> <체르노빌의 봄>이라는 재난만화의 안과 밖, 크리틱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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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맞아도 되는 사람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줄여서 인권위라고 부른다. 국제인권법을 각 국가 안에서 실현하자는 UN의 취지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선 2001년에 출범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권을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기관인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게 중평이다. 이렇게 굳이 설명해야만 할 만큼, 인권위는 그 이름값 하는 의미 있는 활약을 펼친 바가 거의 없다. 오히려 의미 있는 부실만 돋보였던 것 같다. 촛불시위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5개월 늑장대응, 용산 참사에 대해 인권위가 의견을 제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일방적으로 폐회하면서 불거진 기존 상임위원들의 사퇴 등등.

 

작년과 올해도 인권위의 부실한 활약은 이어졌다. 작년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광화문 대로를 걸었던 날, 인권위 소속 조사관 몇 명도 전경의 시민에 대한 인권침해를 감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 눈으로 확인한 바, 인권위 조끼를 입은 그들은 너무 적었고 또한 무기력했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전경의 무리한 진압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으나, 조사관들의 목소리는 작았고 무력했다. 전경들은 인권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상관의 명령에만 복종했다. 131일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국방부의 행정대집행에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집행이 막무가내로 과격하게 진행되어 부상자가 속출한 와중에 인권위 조사관까지 용역에게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정 주민들은 제 일처럼 지적하고 분노하는데도 인권위에서는 아직껏 별 말이 없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인권위 비방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인권위를 무척 좋아한다. 2003<십시일반>, 2006<사이시옷> 등 인권 만화집을 펴내며 한국 만화와 인권 모두에 기여했던 인권위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심을 접어두더라도 이번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인권위 조사관이 용역에게 맞았던 일에는 나도 강정사람들이 그렇듯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2013년에 출간된 세 번째 인권 만화집 <어깨동무>에 실려 있는 만화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려 한다. 제목도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맞아도 되는 사람". 네이버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 작품이다.

 

작품은 비교적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노동자들이 당한 참담한 폭력을 보여준다.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기업 이름들을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2006년부터 2012년 동안 실제로 있었던 폭력의 상황들이다.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덮쳐온 자동차에 조합원 13명이 크게 다쳤다.” 2010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용역경비업체 직원 차량에 당한 일이다. “경찰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뒤에서 공격했고, 소화기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참가자 한명이 사망했다.” 2006, 포항건설 노조원 하중근 씨의 죽음이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옥쇄파업에 대한 강경진압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내레이션이다.

 

노동권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이처럼 용역과 전경 등에 폭력을 당할 때, 노동권 문제는 인권 문제로 확장된다. 하지만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지 못하고 맞은 사람맞아도 되는 사람이 될 때, 인권은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로 축소되고 만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이렇게 만인이 누릴권리인 인권을 누리지 못해도 되는사람이 여기저기 존재하는 사회, 그것을 겨냥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마 이런 이유들을 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분노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효과도 함께 밝혀두자. 먼저, 언론이 알리지 않아서 몰랐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도 침묵한다.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니까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다. 둘째,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런 일에까지 분노한다면 화낼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때마다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거침없이. 셋째, 당할 짓을 했으니까. 가장 문제적인 경우일 것이다. 최규석 작가가 넘어서고자 하는 인식일 터이고. 그의 설명은 이렇다. “정부와 언론은 끝없이 그들이 맞아도 되는 이유들을 설명하고 우리는 이해당한다.” 그러면서 당할 짓을 만드는 이유의 목록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넷째, 분노해봐야 나만 손해니까. 솔직하면서도 안타까운 이유다. '작은 폭력'은 가해자도 작아서 윽박지를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폭력'에 움찔했다간 나도 맞는다. 폭력 자체는 교정되지 않고 나만 폭력의 피해자로 편입된다는 두려움. 우리는 이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침묵한다. 우리의 침묵을 발판 삼아 '거대한 폭력'은 계속된다.

 

훨씬 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만 더 지목하자. 내 삶을 꾸려가기에 바빠서. 사실 그렇다. 자기 가족이 아닌 이상, 어린이와 여성과 반려동물의 피해에도 우리는 댓글과 인터넷 포스팅 정도로밖에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문제에, 모두가 떠들지도 않는 이슈에, 허구헌날 일어나는 일에, 당할 짓을 한 사람들의 당함에, 후환까지 두려운데 무슨 분노를 한단 말인가. 분노는 표출되지도 끓어오르지도 싹을 틔우지도 않는다. '내 삶'을 꾸려가기 위해 우리는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람들, 그것이 이 만화의 제목이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름이다.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이번에는 인권위 조사관까지도 맞아도 되는 사람의 반열에 올랐다. ‘맞아도 되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도록 활동해야 하는 인권위가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그 스스로 맞아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 이 지독한 패러독스. 인권위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음으로 맞아도 됨을 인준하고 있지만, 오히려 강정 주민들은 조사관이 맞았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맞았다는 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발화하는 것이야말로 맞은 사람이 맞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말한다. 사실 강정 주민과 활동가들은 세월호·쌍차·용산·밀양 등이 맞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언해왔다. 그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면 정말 그렇다. 인권위 조사위원이라서 맞았다고 호소한 게 아닌 것이다. 또 하나의 패러독스다. 늘 맞는 사람들이 누구도 맞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외치는 이 상황.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맞았다고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 이미 여러 대 맞은 사람인 이 상황. 궁금하다. 그들이 우리처럼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할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다시, 우리에게 묻자. 이런 패러독스의 사이에서, 별로 맞아보지 않은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형상 앞에서 분노하고 움직이는 것을 선택할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이들 앞에서, ‘인권위가 무력하고 무기력한 오늘날의 인권과 함께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2015.2.12 송고

2015.3.3 <주간경향> 1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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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완생의 길을 걷다


드라마 <미생>의 처음과 마지막은 만화 <미생>과 사뭇 다르다. 요르단 에피소드가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점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내 눈길을 끈 것은 한결 증폭되어 표현된 미생들의 고생이다. 초반부에서는 인턴 동료 사이에서 고생하는 장그래의 모습이 드라마만의 오리지널 씬들을 통해 다소 과장되지만 그만큼 더 와 닿게 표현되었다. 후반부는 오 차장이 사표를 내기까지의 과정이 눈에 띈다. 만화에서는 갈 회사가 정해지고 퇴사하지만, 드라마 판에선 달라진 사내 분위기에 마음 고생하다 결국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19국] 만화에서는 타부서 서류 열람을 방해받으며[141수] 불안감을 살짝 느끼는 정도였다면, 드라마의 묘사 속에서 오 차장이 받는 압박은 훨씬 무겁다. 그 압박 속 오 차장은 회사를 그만두는 단 하나의 선택에 내몰린,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미생의 모습이었다.


오 차장이라는 미생은, 구체적으로는 내부 고발자의 상황에 처해 있다. 온전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대 중국 무역에서 행해지던 과도한 콴시 관행을 적출한 오 차장과 영업3팀은, 그 이전 박 과장의 리베이트 건을 적발한 일의 연속선상에서 내부 고발자로 완전히 찍히고 만다. 적폐라 할 만한 관행이건만 그로 인해 유지될 수 있었던 대 중국 무역에서의 ‘편안함’이 사라지면서, 다른 팀들은 ‘불편함’을 초래한 오 차장들을 불편해 한다. 따라서 오 차장이 ‘우리’ 회사의 일원인 한은 중국 무역은 어렵다는 것은 회사의 입장일 뿐만 아니라 타 팀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 차장은 회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회사라는 사회 안에서 죽어나가야만 하는 희생양이 된다. 중국이라는 실리의 신 앞에서 희생양을 바치고서야 원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와 그 안의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지적했던 희생양 제의로 유지되는 사회의 매커니즘이 <미생>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런 매커니즘이 내부 고발자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계약직 사원 장그래도 마찬가지로 희생양이다. 내부 고발자가 우발적인 희생양의 형상이라면, 계약직은 제도적으로 구현된 희생양이다. 2년마다 한 번씩 죽어나감으로써 그 회사의 안정을 도모하고 정규직 사원의 상대적 안정감을 확인하게 하는 희생양, 그것이 계약직이다. 그런 점에서 <미생>은 영업 3팀을 중심으로 한 희생양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희생양들의 삶을 향한 희망을 그린 것으로 이해되는 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그런 희생양들을 만들어내는 회사-사회는 무엇인가를 또한 그 희생양 곁에서 살아가며 나의 완생을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날카롭게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먼저 회사-사회를 묻자. 지금까지 나는 회사(會社)와 사회(社會)를 의도적으로 섞어서 사용했다. 같은 한자로 구성된 이 둘은 개념적으로 분명 다르지만 묘하게 닮았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사회생활의 공간으로 말하며 은연중에 사회를 회사로 대체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며 입단에 실패하고 사회로 나서게 된”[단행본 인물 소개] 장그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비로소 사회에 속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바둑에선 하수가 고수와 마주할 때, 급을 맞춰줍니다. / 그런데... 사회에선, 고수를 상대로 신입사원이 접바둑을 둡니다.”[47수] 이렇듯 사회의 경계는 회사를 중심으로 그어진다. 바둑을 두던 시절에는 사회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혼동이다.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런 혼동은 언어생활로만 제한될 것도 아니다. “회사 안은 전쟁터,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명대사는 “해고는 살인이다”의 완곡어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죽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곳이 지옥이다. 회사 밖으로 내쫒긴 이는 사회적으로 죽은 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운데 26명은 정말로 죽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 회사-사회의 포개짐은 그저 언어적인 착각만은 아니며,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삶의 잔혹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를 향한 고민은 회사에 대한 고민과 뗄 수 없는 문제다. ‘작은 사회’로서의 회사가 ‘큰 사회’를 가리는 이 착시는 오히려 현실적일뿐만 아니라 큰 사회를 제대로 보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 무너진 사회를 ‘작은 사회’와 ‘큰 사회’ 모두의 측면에서 또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희생양을 만드는 것으로 유지되는 회사-사회가 드러내는 진실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이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민해 볼 차례다. ‘사회’라는 말로 가려지는 개별 행위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가장 최근의 이슈를 떠올리는 것이 답을 찾는 과정으로 적절하겠다. ‘땅콩 회항’ 사건 후 박창진 사무장이 일부 동료들에게서 외면당하는 상황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은 오 차장과 겹쳐진다. 대한항공이라는 작은 사회의 구성원 일부는 박 사무장을 희생하여 자기를 보존하려 한다. 그것이 수직적인 위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를 희생하여 나의 완생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욕망은 지금껏 사회를 유지해 왔던 뒤틀린 사회의 욕망을 잔뜩 끌어안고 있다.


때로 멀리서 보면 보인다. 오 차장을 지켜본 독자/시청자들이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듯이, 실제 인물 박 사무장이 실명과 얼굴과 자리를 내놓고 싸우는 이 싸움에 대해서도 사람들 대부분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작은 사회는 외면하지만 큰 사회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박 사무장은 싸울 힘을 얻는다. 가깝든 멀든, 사회적 지지 없이 그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우리의 작은 사회 안으로 옮겨 놓는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를 지지할 수 있는가? 그를 희생하지 않기 위해 내가 희생당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는가? 회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희생양을 요구하는지는 않을런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서 초점을 달리해 생각해 보자. 드라마 <미생> 마지막 화에서 오 차장은 루쉰의 말을 인용한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새 회사를 세우는 희망으로 읽히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희망적인 사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완생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의 돌로는 완생을 이룰 수 없다. 작은 바둑판에서조차 완생의 요건인 두 집을 이루려면 적어도 여섯 개의 돌이 필요하다. 완생은, 외롭지 않게 서로를 위로하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회적 공유물이다. 개인의 완생이란 없다. 희생양을 만들어 나를 살리려는 생각으로는 완생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우리의 완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 길이 완생의 길이다.


그것은 고생길이기도 하다. 희생양의 고생을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생이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사회에서는 사회를 고민해야 하며, 그 고민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몫이다. 내 옆의 미생과 함께 고생길을 스스로 여는 것, 그것이 완생의 길이다. 그러니 완생의 길을 열고 있는 미생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굴뚝 위의 미생과, 박 사무장이라는 미생에게, 내 옆의 누군가에게 고마워하며 걷는다. 완생의 고생길, 지금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 길을.


2015.1.22 송고

2015.2.3 <주간경향> 1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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