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맞아도 되는 사람’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줄여서 인권위라고 부른다. 국제인권법을 각 국가 안에서 실현하자는 UN의 취지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선 2001년에 출범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권을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기관인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게 중평이다. 이렇게 굳이 설명해야만 할 만큼, 인권위는 그 이름값 하는 의미 있는 활약을 펼친 바가 거의 없다. 오히려 의미 있는 부실만 돋보였던 것 같다. 촛불시위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5개월 늑장대응, 용산 참사에 대해 인권위가 의견을 제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일방적으로 폐회하면서 불거진 기존 상임위원들의 사퇴 등등.
작년과 올해도 인권위의 부실한 활약은 이어졌다. 작년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광화문 대로를 걸었던 날, 인권위 소속 조사관 몇 명도 전경의 시민에 대한 인권침해를 감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 눈으로 확인한 바, 인권위 조끼를 입은 그들은 너무 적었고 또한 무기력했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전경의 무리한 진압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으나, 조사관들의 목소리는 작았고 무력했다. 전경들은 인권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상관의 명령에만 복종했다. 올 1월 31일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국방부의 행정대집행에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집행이 막무가내로 과격하게 진행되어 부상자가 속출한 와중에 인권위 조사관까지 용역에게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정 주민들은 제 일처럼 지적하고 분노하는데도 인권위에서는 아직껏 별 말이 없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인권위 비방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인권위를 무척 좋아한다. 2003년 <십시일반>, 2006년 <사이시옷> 등 인권 만화집을 펴내며 한국 만화와 인권 모두에 기여했던 인권위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심을 접어두더라도 이번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인권위 조사관이 용역에게 맞았던 일에는 나도 강정사람들이 그렇듯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2013년에 출간된 세 번째 인권 만화집 <어깨동무>에 실려 있는 만화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려 한다. 제목도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맞아도 되는 사람". 네이버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 작품이다.
작품은 비교적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노동자들이 당한 참담한 폭력을 보여준다.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기업 이름들을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2006년부터 2012년 동안 실제로 있었던 폭력의 상황들이다.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덮쳐온 자동차에 조합원 13명이 크게 다쳤다.” 2010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용역경비업체 직원 차량에 당한 일이다. “경찰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뒤에서 공격했고, 소화기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참가자 한명이 사망했다.” 2006년, 포항건설 노조원 故 하중근 씨의 죽음이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옥쇄파업에 대한 강경진압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내레이션이다.
노동권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이처럼 용역과 전경 등에 폭력을 당할 때, 노동권 문제는 인권 문제로 확장된다. 하지만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지 못하고 ‘맞은 사람’이 ‘맞아도 되는 사람’이 될 때, 인권은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로 축소되고 만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이렇게 ‘만인이 누릴’ 권리인 인권을 ‘누리지 못해도 되는’ 사람이 여기저기 존재하는 사회, 그것을 겨냥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마 이런 이유들을 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분노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효과도 함께 밝혀두자. 먼저, 언론이 알리지 않아서 몰랐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도 침묵한다.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니까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다. 둘째,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런 일에까지 분노한다면 화낼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때마다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거침없이. 셋째, 당할 짓을 했으니까. 가장 문제적인 경우일 것이다. 최규석 작가가 넘어서고자 하는 인식일 터이고. 그의 설명은 이렇다. “정부와 언론은 끝없이 그들이 맞아도 되는 이유들을 설명하고 우리는 이해당한다.” 그러면서 ‘당할 짓’을 만드는 이유의 목록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넷째, 분노해봐야 나만 손해니까. 솔직하면서도 안타까운 이유다. '작은 폭력'은 가해자도 작아서 윽박지를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폭력'에 움찔했다간 나도 맞는다. 폭력 자체는 교정되지 않고 나만 폭력의 피해자로 편입된다는 두려움. 우리는 이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침묵한다. 우리의 침묵을 발판 삼아 '거대한 폭력'은 계속된다.
훨씬 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만 더 지목하자. 내 삶을 꾸려가기에 바빠서. 사실 그렇다. 자기 가족이 아닌 이상, 어린이와 여성과 반려동물의 피해에도 우리는 댓글과 인터넷 포스팅 정도로밖에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문제에, 모두가 떠들지도 않는 이슈에, 허구헌날 일어나는 일에, 당할 짓을 한 사람들의 당함에, 후환까지 두려운데 무슨 분노를 한단 말인가. 분노는 표출되지도 끓어오르지도 싹을 틔우지도 않는다. '내 삶'을 꾸려가기 위해 우리는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람들, 그것이 이 만화의 제목이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름이다.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이번에는 인권위 조사관까지도 ‘맞아도 되는 사람’의 반열에 올랐다. ‘맞아도 되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도록 활동해야 하는 인권위가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그 스스로 ‘맞아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 이 지독한 패러독스. 인권위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음으로 ‘맞아도 됨’을 인준하고 있지만, 오히려 강정 주민들은 조사관이 맞았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맞았다’는 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발화하는 것이야말로 맞은 사람이 ‘맞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말한다. 사실 강정 주민과 활동가들은 세월호·쌍차·용산·밀양 등이 맞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언해왔다. 그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면 정말 그렇다. 인권위 조사위원이라서 맞았다고 호소한 게 아닌 것이다. 또 하나의 패러독스다. 늘 맞는 사람들이 누구도 ‘맞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외치는 이 상황.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맞았다’고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 이미 여러 대 맞은 사람인 이 상황. 궁금하다. 그들이 우리처럼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할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다시, 우리에게 묻자. 이런 패러독스의 사이에서, 별로 맞아보지 않은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형상 앞에서 “분노”하고 “움직”이는 것을 선택할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이들 앞에서, ‘인권’위가 무력하고 무기력한 오늘날의 ‘인권’과 함께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2015.2.12 송고
2015.3.3 <주간경향> 11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