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우리가 함께 진실을 궁리하려면. <빨간약>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를 가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19대 대선이 부정선거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해도 가리기 어려운 주장과 논점이 난무한다. 같은 주장을 하는 쪽이라 해도 그 안에는 ‘음모론’에 가까운 목소리와 ‘적절한 문제 제기’라 할 목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럽다. 이 어려움과 혼란스러움이 정리된 이상적 상태를 우리는 때로 ‘진실’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진실’은 달성되기 이전, 추구의 대상으로 호명되는 데서 머무른다. “진실을 규명하라”,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은 진실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지시한다. 특히 어떤 진실을 갈망하는 이가 소수일 때에, 진실은 더 멀고 먼 곳에서만 머문다.
이는 누군가는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 세계의 슬픈 사실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혹자는 진실을 은폐해야 할 필요가 있고, 혹자는 진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지금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기에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이다. 아니, 지금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이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처해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을 향해 말을 거는 만화책이 나왔다. 부제부터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에 대하여”다. 제목은 심지어 <빨간약>이다. 제목과 부제가 한데 어우러져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혁명 세력의 수장 모피어스가 파란 알약과 함께 내민 빨간 알약, 그것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된다.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하고, 비로소 자신이 살던 세계가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세계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장면과 그에 이어진 영화의 이야기는 네오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내게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의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였다. 세계에 내가 모르는 어떤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의 틈이 열렸고, 따라서 그때부터 나는 비로소 세계에서 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관찰하게 되었다. 어쩌면 공부하는 사람이 된 결정적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처럼 강력한 이야기에 기대어 책 제목을 지은 <빨간약> 속 여섯 만화는, 네오에게 작용한 빨간 알약만큼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내게 작용한 그 이야기와 같은 싹을 틔운다. 한국 사회의 진실을 궁리하게 하는 싹을 말이다.
진실의 궁리라는 측면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한수자 작가의 <두 할머니>다. 50여년 전에 북한에서 남파되어 남한 땅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두 할머니를 작가가 찾아간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생각과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 에피소드의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인터뷰가 아닌 르포 만화답게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표정을 과감히 드러낸다. 그 가운데 제기한 그의 물음은 ‘진실’을 향한 첫걸음으로 더할 나위 없다. “그분들 말씀이 허황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만큼 / 우리가 북한의 실상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지 않나?” 이렇게 물꼬를 튼 ‘진실’에 대한 궁리는 북한을 경유해 작가가 살고 있는 남한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계속 전하던 작가는 이제 일상의 현실 속에서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선 이들의 계기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계기는 ‘다시 보기’와 ‘다르게 보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다시 다르게 보기는 대개 이해 불가능한 만남에서 비롯한다. ‘나’와는 어떤 사안을 달리 보고 있는 어떤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다름을 깊이 지각할 때, 혹은 어떤 큰 사건 앞에서 더 이상 ‘내’가 보던 방식으로는 세계를 보는 일이 불가능해졌을 때, 다시 다르게 보아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나’ 아닌 타자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진실의 확인 과정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나’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진실을 알기 전의 ‘나’와 진실을 알고 난 후의 ‘나’는 다른 존재다. 또 새로 알게 된 사실을 통해 나의 앎을 비추어볼 때에야 진실을 향한 길이 열린다. 한수자 작가는 ‘의문’과 ‘다시 봄’과 함께 그 길에 들어서며 독자들에게 같이 걷자고 작품을 통해 손짓한 것이다.
김홍모 작가의 <진짜 간첩>은 또다른 방식으로 손짓한다. <두 할머니>의 두 통일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오래전 남파되었던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 씨와 만나서 나눈 대화를 담은 이 작품은, 그 대화를 만화만이 그려낼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한다. 이 독특한 ‘기록의 표정’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표정을 최대한 지우는 것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눈코입이 없는 얼굴이 말풍선을 통해 말할 때, 독자는 그 얼굴과 말풍선을 함께 본다. 그냥 글과는 달리 얼굴이 있고 보통 만화와는 달리 표정이 없는 얼굴에서 들려오는 말풍선 속 이야기는, 따라서 독자에게 최소한 세 가지 이유로 색다르게 들려온다.
먼저 만화가 뽐낼 수 있는 표정 묘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신뢰감을 준다. 만화 속의 인물이 부드러운 표정이나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오히려 말풍선 속의 말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 계몽이나 설득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작가는 그저 이 ‘간첩’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들려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또한 지각되면서 독자는 판단의 주체가 된다. 다음으로 독자인 우리의 모름이 중층적으로 밝혀진다. ‘간첩’이라던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점을 이 만화의 얼굴은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눈치 챌 때, 우리가 간첩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비로소 의심의 대상이 된다. 또 우리가 그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건조한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될 때, 그 얼굴과 표정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표정 없는 화자와 마찬가지로 표정 없는 청자를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표정을 스스로 채워 넣을 수 있다. 어떤 표정도 요구되지 않기에 독자는 비로소 말풍선 속의 낯선 주장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기록의 표정은 따라서 독자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한 사람과 그 사람을 가둔 사회에 대한 진실을 궁리하게 하는 전권을. 이것이 김홍모 작가의 손짓이다. 마지막에 사진을 매개로 하여 그려진 표정은 작가의 궁리 도중에 스친 하나의 진실을 담아낸 따뜻한 사족일 뿐이다.
더 이야기해야할 작품이 많지만 작품들 모두의 공통점을 부각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여섯 작품의 손짓 방식과 힘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진실을 궁리하는 작가 스스로의 모습을 등장시켜 그 자신의 손을 흔든다. 그리는 이가 작품 속에서 자신을 그리며 그 경험과 생각을 밝히고 나선다는 사실은 의외로 중요하다. 그들은 마치 <매트릭스>의 모피어스처럼, <빨간약>을 들고 <빨간약> 속에 등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과 달리, <빨간약>은 확고한 어떤 ‘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우리’의 진실을 함께 궁리하자고 청한다. <빨간약>의 모피어스들은 그들의 진실을 곧바로 말하지 않는다. 다른 진실을 믿고 있거나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 그들 가까이 서서 함께 진실을 궁리할 필요를 제기할 뿐이다.
나는 이 겸손하고 솔직한 말 걸기가 참 좋다. 이들 작가들은 자신도 진실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바로 그것을 망각하고 상대방을 향해 날선 말을 내뱉고 있는 사람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더 흔한 시절에, ‘우리’ 안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무엇을 향해 진실을 함께 궁리해 보자고 말하는 이들의 방식은 참으로 값지다. 고맙고 반갑다. 그리고 참으로 나누고 싶다. ‘우리’를 향한 이 섬세한 손짓을.
2015.9.3 송고
2015.9.15 <주간경향> 1143호
2015년 11월 4일 작가와의 대화 안내 포스팅. 사회를 제가 봅니다.
http://blog.aladin.co.kr/literaturer/7886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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