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브라질
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연상작용에 의해, 나는 크리스토프 바타이유란 작가를 기억해 낸다. 그가 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란 소설 역시 작가의 이름들처럼 유사점이 다분하다.  후에 그가 쓴 '시간의 지배자' 역시 번역자인 김정란에 의해 '가치'를 증명(연두색 책읽기)받기도 했다.

 이 책도 김정란에 의해 번역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할 만큼 번역이 어수룩(?)하다. 물론 나는 원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번역을 운운하는 잰체하는 인텔리겐차는 아니다. 다만, 번역이 '프랑스어 실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정도를 알 뿐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구호가 있을만큼, 번역은 언어의 대칭관계에 의해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그런 기계적 과정이 아니다. 한국어의 뉘앙스와 결을 살려 완전히 한국어란 꺼풀을 뒤집어쓴 이국인의 글이어야만 번역은 성공적이라 할만하다. 특히 대명사를 비롯한 원문에는 있지만 생략하고 비워두어야 할 것들이 한국어에는 많다. 모든 것을 옮기려고 하면 결국 많은 것을 잃게 마련이다.

 번역의 문제는 이제 밀어 놓고, '왜 브라질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미 남의 식민지가 된 역사를 뒤로 하고, 그들의 말(프랑스어)를 완전히 잊은 채, 가난과 마약에 찌든 그 나라를 말이다.  남반구의 그 나라는 한국인 여행자와도 거리가 멀며 단지 '축구'라는 화두로만 우리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이다. 그러한 나라가 한 때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에 나는 일단 생경하다. 아마 프랑스의 일반 독자들도 만찬가지리라. 가만 생각해 보면, 프랑스는 대륙 국가 중 유일하게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끼여 한 몫을 차지한 나라다.  근대적 개념의 국가를 주위의 독일, 벨기에, 스위스 등보다 비교적 먼저 수립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는 스스로 베트남과 알제리등을 식민화한 제국주의 국가였음을 밝힌 바 있다. 작가 스스로도 이러한 나라에 대해서는 카뮈나 뒤라스 등과의 경쟁에서 블루 오션을 점유할 수 없음을 일찍히 깨친 모양이다.

 이 소설은 크게 세개의 전개 국면을 갖고 있는데

1. 공자그가 발기용의 명을 받들고, 통역을 맡을 아이들을 색출하는 과정과 석달여 동안 브라질을 향해 항해하는 과정

2. 브라질에 도착해서 식민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

3. 뒤늦게 도착한 포르투칼 군에 의해 밀려나는 과정

이 그것이다. 1번은 전형적인 해양소설들과 다를 게 없다. 파이이야기, 로빈슨 크루소, 백경, 핌씨의 모험등 해양 소설에 열광한 바 있는 독자라면 찐한 소금내에 가슴이 벌렁거릴만 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해양 소설이 아니므로, 배에서의 모험은 일찌감치 끝이 나 버린다. 다분히 프롤로그라고 할만한 이 부분은 열거한 해양 소설들에 비해 그닥 흡인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본격적인 전개는 2번의 국면에 이르러서다. 여기서부터는 참조할만한 텍스트가 별로 없으리라.  소설은 크게 두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나는 발기용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적인 인간상을 희구하는 식민지 건설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쥐스트와 콜롱브라는 '미래'의 아이들이다. 물론 초반에는 둘이었던 인물이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며 셋으로 확장된다. 

 발기뇽은 유럽열강이 꿈꾸던 '식민제국'의 이상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상징계는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쾌락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이란 적들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더 큰 대타자-포루투칼로 상징되는-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쥐스트와 콜롱브는 애초에는 한 몸을 지닌 양성구유의 존재들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그들은 소설의 전개에 따라 뚜렷이 다른 가치와 세계관을 표방하는 인물로 성장한다. 그들의 갈등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따를 수도 있었겠으나, 좀 더 개화한 문명인의 소설인만큼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 하지 못하는 자기 모순적인 문명 대 전혀 자기 모순이 없음에도 자기 모순적인 야만에 의해 모순적인 운명에 처해질 에코토피안의 모습으로 대립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콜롱브라는 인물이다. 물론 이 인물은 이 식민화의 야욕이라는 실제의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는 배후의 인물이며, 그러하기에 작가가 마음놓고 자신의 주제를 관철시키며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 인물은 '여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작가는 '페미니즘'을 많이 검토한 후 이 인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시절, '말괄량이'로 대변되는 혹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제 1세대 페미니스트같은 모습의 여자 주인공은 세련된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주제를 드러내기 힘든 인물이다. 그렇다고 콜롱브가 포스트 페미니스트의 몇명이 주장하는 바대로, '여성적인 주체'나 '여성적인 말'을 전달하는 인물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여자는 두 주체의 함정을 교묘히 피해가서는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실제성'이 없는 인물이 돼 버렸다. 콜롱브는 원래가 '말괄량이'같은 여자애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파랗고 신비스러운 눈을 '무기'처럼 활용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배에 타기위해서는 '남장'을 해야 했지만, 그것을 엄청난 비극이나 성전환의 계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장이 지속될 수록 남성화 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생리적인 변화에 따라 더 '여성적'인 육체를 가지게 된다.

배 안에서 사귀게 된 '육체파 복음주의자'가 자신의 몸을 더듬어 정체성을 알아 버리지만, 예상되는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러한 행동이 나중에  문화의 갭이나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는 복장 규정 같은 것에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은 채, 인디오 여자들처럼 홀라당 옷을 벗어던지는 데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녀는 점점 더 쥐스트의 세계와 멀어지며 별 의심 없이 인디오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이 여자가 파이 로처럼 인디오와 문명세계의 커다란 연결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소녀의 야심은 점점 더 인디오처럼 되겠다는 것 뿐이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념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브라질을 서구문명에 비해 '여자'로서 설정하는 것처럼, 그녀는 아폴로닉한 그녀의 남자 형제에 비해 덜 문명화 되고, 더 자연친화적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위그노 파의 오드라는 여자는 단순히 콜롱브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잠깐 찬조출연하는 정도다. 그녀는 소위 허위와 교태라는 '여성성'의 화신같은 인물인데다가, 그것의 동전이 양면이기도 한 무식함과 잔인함을 지녔다.

콜롱브가 인디오 세계에 느끼는 위화감은 오직 '식인풍습' 정도일 뿐이다. 그 만큼 그녀는 전혀 꺼리낌 없이 그들의 세계에 동화되는데 그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브라질과 인디오들을 절대 선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하는 아프로디테. 그녀는 문명인의 관점에서 볼 ‹š는 물론 반사회적이며, 지나친 정의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남성 영웅이, 이를테면 이 소설에서는 쥐스트가 소설의 메시지를 대리 전달하거나, 보여주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다. 결국 작가는 여자를 중심에 놓게는 되었으나, 다른 사람 -쥐스트나 발기뇽-의 시행착오를 그녀만 피해감으로 인해 주제가 너무 노골화 된데다 또다른 전형적 '여성'을 이상화 한 게 되버렸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베트남이란 식민지에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다시 말해 정복할 수 없는 나라라고 실토하는 반면, 이 소설은 브라질을 '사실은 다다를 필요가 없는, 그대로 나둬야 가장 좋은' 나라였다고 말한다.

그것이 현재로선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일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의 해프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5-6시간 정도의 지적인 유희? 분명 이 소설은 의외로 굉장히 재밌다.  재미없고, 난해하고, 쓸데없는 진술 덩어리라고 보는 독자는 분명 '안목'에 이상이 있음에 분명하다.

게다가 인도주의의 허구나 서구의 관점을 비난만 하기에도 꺼림칙함이 있다. 만약 이 소설이 브라질 인디오의 관점에서 본 프랑스의 침략이었다면,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을까? 콜롱브와 쥐스트의 러브 스토리가 날줄로서 이 소설을 튼튼히 엮어내지 못했다면, 단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돌덩어리 섬에서의 헛된 수고만을 그렸다면, 이 소설은 개인의 진정성을 주로 문제삼는 서구의 문학계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소설 이후의 '역사적 모험 소설'의 방향성이다.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며, 무난한 연애담에 참신한 인물 묘사와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까지 모두 겸비한 소설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 사람들은 '파리 대왕'의 메시지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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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끝까지 여행을
L.F.셀린 지음, 민희식 옮김 / 명문당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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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엔 다른 판본으로 이 소설이 두 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물론 내가 신청한 것인데, 1년 전 쯤일 것으로 추정된다.

 밤의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그 '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명제로 압축될 만 하다.

그 밤 속에는 당장 저녁거리를 구하라고 병사를 지뢰와 적군이 우굴거리는 밀림으로 내 모는 전쟁 자체의 비열함과 매너리즘 속에서 허우적대는 상사가 있다.

또한, 아프리카를 도륙하고 하나의 상점화 한 유럽의 야만성과

포드 주의의 합리적 기계주의로 무장하여 인간의 지성과 가치를 시간당 페이로 환원한 미국의 얼굴도 얽혀 있다.

한 사람이 동 시대의 이 상이한 대륙의 '밤'을 전부 목격하고, 썼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위대한 이유다.

게다가 문장 곳곳에 베여 있는 독한 술같은 유머, 솔직한 서술, 도저한 밤에서 건져낸 사색의 결과물들이 눈을 휘어 잡는다.

이것이야말로 후대 프랑스 작가들을 붙잡은 마력이며, 끊임없는 모방을 낳게 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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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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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분의 차이는 사랑을 가로막는가?

 

 안방극장을 독식하는 멜로드라마는 그리스어로 노래(melos)와 극(drama)의 합성어라는 어원적인 기질과는 전혀 무관하게 신분상승이나 출생 상의 비밀을 다루는데 혈안이 돼 있다. 예컨대, 재벌가의 아들과 해외에서 우연히 만난 억척스런 여자들이거나 한 남자를 두고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던 두 여자들이 사실은 뒤바뀐 아이들이었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이렇게 안방극장의 주인공들은 여하한 형태로든 신경증(강박증, 히스테리, 공포증)을 앓고 있다.

 라깡에 의하면 대체로 신경증자는 인간에게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다는 것, 혹은 상징계를 받아들인 주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핍을 무의식적으로 다시 메우려고 한다. 안방극장의 주인공들은 신분의 질서나 경제적 심급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아 이상을(the ideal of me) 찾아 고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 아들은 가난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며, 가난한 이들은 자신이 원래는 부유한 집안의 자손이었거나 자신을 버린 부모가 언젠가는 리무진을 타고 혹은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나타날 거라는 ‘환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 유형들은 마치 거울단계의 아이처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으로 가정될 뿐이므로, 환상의 시나리오 역시 드라마의 극본을 쓴 작가의 것이거나 그것을 향유하는 시청자들의 몫일 것이다.

 

 소설, ‘결혼의 변화’도 이러한 ‘멜로드라마’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물론 독자들은 보통의 멜로드라마를 소비하는 시청자들과는 심급이 다르다. 그리하여 분명히 나타나는 멜로의 구조를 보다 고상한 화법의 문제로 생각한다. 예컨대, 3명의 각기 다른 화자가 3명의 또 다른 익명의 사람에게 고백하는 식의 ‘희귀한 소설의 구조’에 감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유지하며 남녀관계에 대한 하나의 깨달음을 안겨 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소설은 드라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층 반성적이고 발산적인 결말을 가졌다.

 이러한 소설의 미덕을 충분히 감식할 수 있을 만한 독자들도 이야기의 세부 내용에 들어가게 되면 납득할 수 없는 부분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페터가 하필이면 유디트를 사랑하고 결국 그녀와 결혼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청자라면 재벌가의 막 돼먹은 아들이 피고용자나 어학연수 중인 여자와 우연의 거듭제곱을 통해 사랑에 빠지는 것에는 별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드라마 작가가 수많은 복선과 PPL장치들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리라.

 페터와 유디트는 주인집 아들과 그의 하녀라는 신분으로 만났고 이러한 만남의 구조는 20세기 초의 시대적 배경을 가진 부루조아 소설로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작가는 남자의 입을 빌어 심드렁하게도 이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반복한다.  이들의 사랑을 그럴싸하게 채색해 주는 우연과 드라마틱한 이벤트는 전무하다. 굳이 찾자면 화롯가에서의 만남, 남자의 고백과 여자의 거절, 그리고 긴 시간을 뛰어 넘어 ‘파란 끈’이 있을 뿐, 고작 이런 소소한 사건으로 그들은 그 높은 신분과 취향의 벽을 뛰어 넘었다.

 

 결국 페터와 유디트의 ‘사랑’에 손을 들어준다면 ‘운명적인 사랑’이니, ‘기다림의 미학’을 운운할 수밖에 없다. 혹은 앞서 일롱카의 진한 고백을 귀담아 들었던 독자라면 유디트를 악녀로 치부하고, 페터를 ‘자신에게 진짜 맞는 여자’를 가려낼지도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으로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그래도 '왜 항상 멜로드라마에서는 상징계가 상이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가?'는 의문은 남는다.

 살레클은 이를 ’환영적 성격의 명제’라고 지적하며, ‘사랑에 대한 가장 큰 환영 가운데 하나는 금지와 사회적 코드가 사랑의 실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역으로 말하면, ‘리비도를 최고조로 부풀리기 위해서는 어떤 장애물이 필요하다’는 프로이트의 분석처럼 사회 규범과 사회관계의 위계가 바로 사랑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과연 시청자의 리비도는 주인공들이 사랑의 장애를 극한으로 뛰어넘을 때 최고조에 이른다. 한편, 대등한 조건의 사랑, 예컨대 일롱카와 페터의 사랑에는 왠지 시큰둥할 것이다. 작가도 그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결혼에 골인했는지에 대해선 함구한다. 단지 추론하건대, 워낙 맞는 계급과 조건의 사람들이어서 집안끼리 어찌 어찌 말이 오가다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수퍼에고적인 만남과 결합 자체가 페터에게는 권태의 핵심이요, 자신의 결혼을 ‘변화’시키고픈 무의식적 동인인 것이며, 일롱카에게는 결혼이란 제도의 화신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자는 유디트와의 만남을 결코 잊지 못한다. 페터의 말처럼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고 꼬리를 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잣집 도련님은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유디트라면 증오와 선망의 모호한 경계 상에서 그런 태도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일롱카는 분노가 가득 차 그녀의 방문을 열었을 때 ‘수녀’와 같이 끊임없이 절제하는, ‘상징적’인 하녀로서 자아를 동일시한 유디트를 본다.


 2. 사랑 앞에선 모두 신경증자다.

 

  그러나 유디트 자신은 ‘남편에게 나는 단순히 한 여자가 아니라 커다란 시험, 모험이었고 맹수이면서 같이 사냥에 나선 동료였으며, 고삐 매이지 않은 존재, 금지된 존재였어.’라고 술회한다. 사이렌 혹은 팜므 파탈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매혹시키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매혹되지 않으며 무관심하게, 혹은 냉혹하게 몰락시키거나 몰락하길 지켜보는 여자가 바로 그녀다. 또한 그녀는 속 깊이 상징적 질서를 체화하지도 않았고, 무작정 무식쟁이 하녀처럼 주인남자의 프로포즈를 기다리고만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상류 시민 계급 속의 하나의 부속물처럼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그들의 매커니즘을 속속들이 알아 버렸으며,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시민계급의 여성인 일롱카로 하여금 스스로 결혼 생활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기교를 부린다. 바꿔 말해, 그녀는 ‘강박증’으로 요약될 만한 부의 과다 혹은 과시로 점철된 부유층의 가정사를 학습했고, 페터 또한 그런 가족력을 무의식적으로 계승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유디트가 스스로 말하듯 만약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든 ‘선수’를 치지 않았다면, 강박증자인 페터는 절대로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지도, 행동에 옮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페터는 두 여자 모두의 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외면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신사적인 남자였다. 내면적으론 지나치게 말 수가 적고,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고수하며 철저한 도덕과 일상적 의례로 무장했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삶에 회의(懷疑)와 계급적 상황에 모순을 느낀다. 여자에 대한 욕망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그는 한편으로 ‘우정’속으로 숨으며 여자를 비하하거나 동정하거나 분석한다.

  그의 유일한 친구, 라자르는 페터의 증인이요, 정신감성자이며, 작가의 투영이기도 하다. 어떤 계급적 위계에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므로, 초자아를 거부하는 대신 역마살과 충동으로 살아간다. 동시에 그는 삼각관계에 빠진 세 사람 모두의 현자 즉, 소크라테스이기도 하다.  견해란 것은 모두 그로부터 기원한듯  그의 말을 인용하며,  무지와 갈망 뒤에는 한가로이 배회하는 그의 유령이 보인다. 유디트는 그를 원하지만, 라자르는 자신 속에 그 무엇도 그녀가 사랑할만한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로써 그녀의 욕망을 자신으로부터 철회하게 하지만, 그 욕망이 다시 페터에게 향하게 도와주는 조력자도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타자와 무관할 때, 다시 말하면 욕망이나 사랑의 감정 없이, 향유를 통해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부유(浮遊)하면서 홀로 기괴하게 살아간다. 

 

 라깡에 의하면, ‘여자’는 근본적으로 그 무엇도 아니고, 단지 신화화 됐거나 남자와 같이 남근의 결여를 경험한 ‘주체’로 보지 않으려는 남자들의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여자는 없다’라는 명제로 압축되는데, 라자르에게서 남편의 비밀을 캐려고 ‘성녀이면서, 탐정이고, 스파이’가 되었던 현모양처형인 일롱카는 끊임없이 자신을 여성과 동일시한다. 유디트가 ‘나’로서 문장을 시작하는 반면, 일롱카는 망설이면서 ‘우리 여자들은, 나는 다만 여자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여성 일반의 특성을 규정지을 때도, 유디트가 가끔 ‘대체로 그런 편이지’라고 유보적으로 말할 것을, 일롱카는 당연한 과학적 사실인양 자신의 나약함의 근거로 삼는다.

 생물학적 여성을 사회적 여성으로 규정하는데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여성 독자들은 이러한 일롱카의 태도를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다. 그렇다면, 남자가 여성으로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남자는 일반적인 여자들 이상으로 여성을 체화하려할 것이다. 여자와 남자를 개념화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절대 차이는 없어지고, 결여 없는 여성적 주체가 되는데, 이는 상징화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반면에 여자가 여자를 동일시한다면, 항상 자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묻는 히스테리자가 되며, 그 정체성 문제의 해답을 타자로부터 구하며, 그 타자야 말로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해 줄 유일한 대상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희망 속에서 끝없이 타자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전전긍긍하는 ‘단지 여자인 여자’로 남아 있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일롱카는 남편과 이혼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복수와 회한의 흔적만을 쓸어 담으며 카페를 들락거리게 된다.    그런 그녀와 때때로 마주치는 유사한 취향의 전남편, 페터는 일롱카의 심리 상태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끝내 그는 재결합의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으며, 그녀의 상처, 외로움이 그녀 스스로 처리해야만 하는 숙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라깡은 모든 인간 주체를 신경증이나 정신증(정신분열증, 편집증 등)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 신경증은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느낄 만큼 판단력이 양호한 상태로 통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이고, 언어라는 수단으로 짜여진 상징계에 어쩔 수 없이 결박된 존재이므로 그 누구도 정신적으로 완벽히 건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 자체로 신경증의 완벽한 모델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히스테리자이면서 또 다른 면에선 강박증자일 수도 있으며, 향유를 경험하면서도 때론 히스테리자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특히 사랑에 빠질 때, 누구나 신경증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주체는 상상계의 낙원에서 쫓겨난 자로서 늘 결핍을 느끼므로, 그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게 된다. 누군가를 찾았다 하더라도 주체가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입을 벌린 타자의 결핍뿐이다. 타자 또한 같은 것을 원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나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 그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는 일롱카의 질문이다.

 ‘왜 당신은 내가 갖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사랑하는가?’는 페터의 질문이 될 것이다.

  질문은 후렴구처럼 반복되며 세 명의 독백을 타고 흐른다. 듣는 이는 친구로 가장한 심리 상담자이며, 긴 고백의 구조 자체가 소파에 앉거나 누워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하게 하는 치료의 과정으로 보인다. 상담 시간이 종료되고 치료가 끝났을 때, 어렴풋이 그들은 스스로 대답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안티테제로서 진단하건대, ‘멜로드라마’는 결코 그 기질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사이렌 혹은 여성적 향유가 ‘노래’라는 기표로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듯 시청자 혹은 독자들은 자신들의 향유를 대신 경험하거나 확인시켜주는 멜로를 끊임없이 원하게 된다. 한편, 드라마는 그 구조상 신경증자들의 욕망과 외상을 다룰 수밖에 없다. 결국 멜로드라마는 구조적으로 신경증자들이 향유를 환기하는 과정, 즉 그 자체가 하나의 심리치료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엔딩을 올리고, 책장이 뒷날개를 접는 순간 끝나지 않을 노래는 당신을 마비시키고 질식시킬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그것을 향해 귀를 막는 일은 있을 수도 없다.


* 레나타 살레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도서출판 b,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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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問은 問學이 되어야 한다. 學問이란 ‘배우고 묻는 것’이요, 問學이란 ‘묻고 배우는 것’이다. 學問의 원어는 問學이었는데 근대 신조어에서 학문으로 고착되었다. 근대의 배움이 문학이 안되고 학문이 된 것은 그 성격상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학문이란 고정된 에피스테메(episteme)를 먼저 배우고 나서야 묻는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사회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대중교육(mass education)의 성격이다. 그러나 학문은 원래 문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學의 전제가 없이 問이 발생한 것이며, 문의 결과로 학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학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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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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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은 추리소설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에드가 상을 영국인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받았다. 그만큼 오락적인 글쓰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인 스토리 텔러이다. 좋게 보자면 '오헨리'나 '사키'같은 작가와 비견된다고 한다.

 성인 장편소설은 두 개에 불과한 데 비해 동화는 꽤 많이 썼다. '찰리와~'가 가장 대표적이다. 처음 출간된 것은 영국이 아닌 미국이었으며, 중국에서는 통산 2백만 부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고. 미국의 유명한 진 와일드라는 배우가 출연하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물론 최근에 엽기적이고 몽환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팀버튼과 그의 페르소나인 조니뎁에 의해 다시 영화화 되었는데,  해리포터 만큼이나 안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정작 책을 읽어보니 나는 옛날에 '만화영화'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로알드 달이란 작가 자체가 서스펜스요 모순 투성이다. 그는 최근에 사망했는데 [뉴욕타임즈]의 기사에 의하면

 '부모와 선생은 적이다. 예절도 도덕 의식도 전혀 없는 상태로 태어난 아이를 문명화하는 끔찍한 과정을 맡고 있기 때문에 어른은 아이들의 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했던 일도 다름 아닌 '그런 일' 즉 아이들을 보다 선량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이었다. 그가 동화를 쓰게 된 동기도 자신의 다섯 아이들 중 먼저 태어난 두 딸, 올리비아와 테사의 잠자리용 동화를 보충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아이들에게 설마 자신의 스릴러에서처럼 '남편을 냉동 양고기 다리로 후려 패 죽이는 건 더러운 일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재밌는 일이다'는 주제를 담은 작품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재밌는 일은 영국에서 한참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이 사람의 손녀인 소피 달이란 여자라는 점이다. 온통 하얀 裸身에 하이 힐과 보석으로만 치장한 모델 소피 달의 모습이 대문짝만한 입셍 로랑의 포스터에 실려 전세계를 휩쓸었다니 다시 人口에 그 조부가 膾炙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리라.

 뉴욕 타임즈는 '로알드 달의 동화가 성공한 것은 어른을 아이의 적으로 설정한 전략 덕분이다. 짐승으로 태어나 엄격한 훈육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통쾌했고, 로알드 달에게 명성으로 보답했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이 책만 하더라도 선인과 악인의 대비가 명확하다. 자기 만족적이고, 주관적이며, 명확한 선과 악의 구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결말로 이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바로 아이들의 관점이란 것이다! 이 작가의 인기의 비결은 바로 아이들이 갖고 있는 엄격한 이원의 사고와 가치 구조를 또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희한한 상상력이란 당밀로 포장한 데 있는 것이다.

  이런 이원화는 등장인물들의 물리적인 특성같이 세부적인 묘사에서도 강화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누구도 플롯의 전개를 통해 정신적인 위기를 경험한다든가 성숙하지 않는다. 반면에 서로에 대한 행동과 대응은 또 다른 사건을 촉발한다.

 사실 선과 악의 대비만큼 아이들에게 아필하는 요소가 있을까? 작금의 해리 포터의 인기 비결도 압축해 보면 이것 이상일 것도 없다. 해리 포터의 주인공의 선함은 찰리의 선함과 유사하다. 손해보듯이 평범하고 가진 것 없는 수동적인 소년이 어는 날 갑자기 초콜릿 공장의 사장이 되는 것과 마법의 권능을 지니게 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성공의 신화는 어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달의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바로 예치기 않은 반전, 우스꽝스런 행동, 말놀음, 넌센스, 그리고 뭐니 뭐니해도 스릴러와 추리 장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했던 바로 그것, 그로테스크한 블랙 유머이다. 찰리를 제외한 소년 소녀들의 운명을 보라! 그보다 더 잔인하고 사악하게 그들을 매장시킬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여기서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설화적 구조로서 전인류와 전시대를 걸쳐 검증된 오락적 구조이기도 하다.

또한 재밌는 것은 그의 동화 속에 나오는 소녀와 소년 주인공의 명확한 대비이다. '마술 손가락'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감에 비해 '초콜릿'에 나오는 찰리는 착함 그 자체일 뿐 누군가 그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도 못하는 수동적인 소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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