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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브라질
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연상작용에 의해, 나는 크리스토프 바타이유란 작가를 기억해 낸다. 그가 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란 소설 역시 작가의 이름들처럼 유사점이 다분하다. 후에 그가 쓴 '시간의 지배자' 역시 번역자인 김정란에 의해 '가치'를 증명(연두색 책읽기)받기도 했다.
이 책도 김정란에 의해 번역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할 만큼 번역이 어수룩(?)하다. 물론 나는 원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번역을 운운하는 잰체하는 인텔리겐차는 아니다. 다만, 번역이 '프랑스어 실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정도를 알 뿐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구호가 있을만큼, 번역은 언어의 대칭관계에 의해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그런 기계적 과정이 아니다. 한국어의 뉘앙스와 결을 살려 완전히 한국어란 꺼풀을 뒤집어쓴 이국인의 글이어야만 번역은 성공적이라 할만하다. 특히 대명사를 비롯한 원문에는 있지만 생략하고 비워두어야 할 것들이 한국어에는 많다. 모든 것을 옮기려고 하면 결국 많은 것을 잃게 마련이다.
번역의 문제는 이제 밀어 놓고, '왜 브라질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미 남의 식민지가 된 역사를 뒤로 하고, 그들의 말(프랑스어)를 완전히 잊은 채, 가난과 마약에 찌든 그 나라를 말이다. 남반구의 그 나라는 한국인 여행자와도 거리가 멀며 단지 '축구'라는 화두로만 우리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이다. 그러한 나라가 한 때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에 나는 일단 생경하다. 아마 프랑스의 일반 독자들도 만찬가지리라. 가만 생각해 보면, 프랑스는 대륙 국가 중 유일하게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끼여 한 몫을 차지한 나라다. 근대적 개념의 국가를 주위의 독일, 벨기에, 스위스 등보다 비교적 먼저 수립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는 스스로 베트남과 알제리등을 식민화한 제국주의 국가였음을 밝힌 바 있다. 작가 스스로도 이러한 나라에 대해서는 카뮈나 뒤라스 등과의 경쟁에서 블루 오션을 점유할 수 없음을 일찍히 깨친 모양이다.
이 소설은 크게 세개의 전개 국면을 갖고 있는데
1. 공자그가 발기용의 명을 받들고, 통역을 맡을 아이들을 색출하는 과정과 석달여 동안 브라질을 향해 항해하는 과정
2. 브라질에 도착해서 식민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
3. 뒤늦게 도착한 포르투칼 군에 의해 밀려나는 과정
이 그것이다. 1번은 전형적인 해양소설들과 다를 게 없다. 파이이야기, 로빈슨 크루소, 백경, 핌씨의 모험등 해양 소설에 열광한 바 있는 독자라면 찐한 소금내에 가슴이 벌렁거릴만 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해양 소설이 아니므로, 배에서의 모험은 일찌감치 끝이 나 버린다. 다분히 프롤로그라고 할만한 이 부분은 열거한 해양 소설들에 비해 그닥 흡인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본격적인 전개는 2번의 국면에 이르러서다. 여기서부터는 참조할만한 텍스트가 별로 없으리라. 소설은 크게 두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나는 발기용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적인 인간상을 희구하는 식민지 건설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쥐스트와 콜롱브라는 '미래'의 아이들이다. 물론 초반에는 둘이었던 인물이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며 셋으로 확장된다.
발기뇽은 유럽열강이 꿈꾸던 '식민제국'의 이상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상징계는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쾌락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이란 적들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더 큰 대타자-포루투칼로 상징되는-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쥐스트와 콜롱브는 애초에는 한 몸을 지닌 양성구유의 존재들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그들은 소설의 전개에 따라 뚜렷이 다른 가치와 세계관을 표방하는 인물로 성장한다. 그들의 갈등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따를 수도 있었겠으나, 좀 더 개화한 문명인의 소설인만큼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 하지 못하는 자기 모순적인 문명 대 전혀 자기 모순이 없음에도 자기 모순적인 야만에 의해 모순적인 운명에 처해질 에코토피안의 모습으로 대립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콜롱브라는 인물이다. 물론 이 인물은 이 식민화의 야욕이라는 실제의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는 배후의 인물이며, 그러하기에 작가가 마음놓고 자신의 주제를 관철시키며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 인물은 '여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작가는 '페미니즘'을 많이 검토한 후 이 인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시절, '말괄량이'로 대변되는 혹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제 1세대 페미니스트같은 모습의 여자 주인공은 세련된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주제를 드러내기 힘든 인물이다. 그렇다고 콜롱브가 포스트 페미니스트의 몇명이 주장하는 바대로, '여성적인 주체'나 '여성적인 말'을 전달하는 인물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여자는 두 주체의 함정을 교묘히 피해가서는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실제성'이 없는 인물이 돼 버렸다. 콜롱브는 원래가 '말괄량이'같은 여자애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파랗고 신비스러운 눈을 '무기'처럼 활용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배에 타기위해서는 '남장'을 해야 했지만, 그것을 엄청난 비극이나 성전환의 계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장이 지속될 수록 남성화 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생리적인 변화에 따라 더 '여성적'인 육체를 가지게 된다.
배 안에서 사귀게 된 '육체파 복음주의자'가 자신의 몸을 더듬어 정체성을 알아 버리지만, 예상되는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러한 행동이 나중에 문화의 갭이나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는 복장 규정 같은 것에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은 채, 인디오 여자들처럼 홀라당 옷을 벗어던지는 데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녀는 점점 더 쥐스트의 세계와 멀어지며 별 의심 없이 인디오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이 여자가 파이 로처럼 인디오와 문명세계의 커다란 연결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소녀의 야심은 점점 더 인디오처럼 되겠다는 것 뿐이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념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브라질을 서구문명에 비해 '여자'로서 설정하는 것처럼, 그녀는 아폴로닉한 그녀의 남자 형제에 비해 덜 문명화 되고, 더 자연친화적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위그노 파의 오드라는 여자는 단순히 콜롱브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잠깐 찬조출연하는 정도다. 그녀는 소위 허위와 교태라는 '여성성'의 화신같은 인물인데다가, 그것의 동전이 양면이기도 한 무식함과 잔인함을 지녔다.
콜롱브가 인디오 세계에 느끼는 위화감은 오직 '식인풍습' 정도일 뿐이다. 그 만큼 그녀는 전혀 꺼리낌 없이 그들의 세계에 동화되는데 그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브라질과 인디오들을 절대 선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하는 아프로디테. 그녀는 문명인의 관점에서 볼 는 물론 반사회적이며, 지나친 정의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남성 영웅이, 이를테면 이 소설에서는 쥐스트가 소설의 메시지를 대리 전달하거나, 보여주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다. 결국 작가는 여자를 중심에 놓게는 되었으나, 다른 사람 -쥐스트나 발기뇽-의 시행착오를 그녀만 피해감으로 인해 주제가 너무 노골화 된데다 또다른 전형적 '여성'을 이상화 한 게 되버렸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베트남이란 식민지에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다시 말해 정복할 수 없는 나라라고 실토하는 반면, 이 소설은 브라질을 '사실은 다다를 필요가 없는, 그대로 나둬야 가장 좋은' 나라였다고 말한다.
그것이 현재로선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일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의 해프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5-6시간 정도의 지적인 유희? 분명 이 소설은 의외로 굉장히 재밌다. 재미없고, 난해하고, 쓸데없는 진술 덩어리라고 보는 독자는 분명 '안목'에 이상이 있음에 분명하다.
게다가 인도주의의 허구나 서구의 관점을 비난만 하기에도 꺼림칙함이 있다. 만약 이 소설이 브라질 인디오의 관점에서 본 프랑스의 침략이었다면,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을까? 콜롱브와 쥐스트의 러브 스토리가 날줄로서 이 소설을 튼튼히 엮어내지 못했다면, 단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돌덩어리 섬에서의 헛된 수고만을 그렸다면, 이 소설은 개인의 진정성을 주로 문제삼는 서구의 문학계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소설 이후의 '역사적 모험 소설'의 방향성이다.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며, 무난한 연애담에 참신한 인물 묘사와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까지 모두 겸비한 소설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 사람들은 '파리 대왕'의 메시지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