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혀
이명원 지음 / 새움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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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을 혓바닥 위에 두고, 현명한 자는 자기의 혀를 마음속에 둔다.'(인도 속담) '타는 혀'의 칼날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향한다.'라며, 임규찬은 「문학과 사상」(계간)에서 이명원의 <타는 혀>를 비꼰 바 있다. 아울러, 임규찬은 '인물비평식 논조'와 '전사처럼 거친 포즈'를 취하기 때문에 그를 비판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또 하나의 '인물비평식 논조'일 뿐이며, '공격적'이진 않더라도 적어도 '공격적 방어'자세일 뿐 이다. 마치 궁지에 몰린 약자처럼 '협박'을 하며 비평을 끝맺고 있는 점에서 이는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리네 문단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내부에서는 '겁주기'와 '달래기'로 자기 검열을 무마시켜 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아니 자신이 물든 세계의 수법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겠지.

내가 이명원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됐다. 우연히, 서울 시립대 '국문과 자료실'에서 그의 글을 접하고, 그의 비범함을 알아챘다. 소위 '김윤식' 사태이후 그의 글은 갑자기 게시판에서 사라져 버려서, 이 글을 읽고 그의 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실망할 것이다. 임규찬의 비꼼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젊은 평론가면서도 여러가지 미덕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명확한 논거, 논리 전개, 적당한 감수성, 건실한 이론, 잘 읽히는 문장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명원을 이명원 답게 하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그적 태도며 실천이다.

이명원은 이 시대 이 나라 문학계의 하나의 이데올로그로 등장했다. 그것은 멈출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흐름이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회와 문단은 아직도 냉혹하며 무관심하지만, 그 밖의 세상은 그를 통해 새롭게 눈을 뜨고 있다. 그를 이데올로그라면서 비아냥거리는 그 안쪽의 사람들은 개념치 말도록, 항상 개연성 있는 반응일뿐 오히려, 밖의 변화에 주시하도록.

'이문열의 친정 옹호'반응이 장안의 화제가 되는 요즈음이다. 이문열을 호되게 비판하는 이명원의 목소리는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 사실이 한편으로 원망스럽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전도된 관점을 '흔들어 주기'할 사람들은 아직 많다. 그것도 젊은 부류에서 이데올로기는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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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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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일>를 읽으면, 왜 양키들이 '뼈다귀'있는 유머를 블랙 유머라고 관용하는지를 알 것 같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그렇다. 침묵은 금이라는 속설에 간강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빨갛게 혀를 내보이며 지껄였을 '그'는 어느 고위 권력자였을 것이고, 죽자 마자 '잎' 즉 여기 저기서 쏟아져 나왔을 비방과 독설을 견디지 못해 그 아들을 울었을 것이다.

그는 부조리와 진짜 악에 대해서 '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검은 혀가 악착같이 그의 성대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형도는 특이하게도 이러한 구강구조를 타고난 사람이다. 얼마나 그랬으면, '쓰지 않는 일'이 '신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썼을까?

그의 시에는 '안개'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가 살았던 지역의 특수성 때문이다. 끝임없이 뿜어대는 '공장매연'에 인공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었던, 안개 지역 그 곳에서의 기억을 그의 검은 혀가 놓칠리 없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마지막 구절이 과연 압권이다. 아이들은 결국 모두 그 악귀지옥같은 공장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고 만다. 마치 그러기 위해서 자라는 것 같이. 이 전도된 현실.. 현기증이 날 것 같다.

기형도의 시는 건조하다기 보다는 블랙 휴머로 매끄럽게 닦여 있다. 어렵고 추상적인 시어들도 없다. 심플한 문장과 표현 반어들로 가득하다. 그는 매우 상식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다. 내부에 나름의 '섬세함'과 '에민함'을 갖었을 뿐, 신경질적이거나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멀었을듯 싶다. 그의 내력은 이를 방증하기도 한다. 연세대 정외과, 24살에 중앙일보 입사. 어찌보면 매우 바람직한 엘리크 코스를 밟은 셈이다. 그는 뛰어나게 두뇌가 뛰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몽상가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의 요절이 그의 짧은 시 인생을 신화화하고 있지나 않은 것일까? 그렇다고,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해서 더 믿음직스런 시인이 되있을 거란 확신은 들지 않는다. 아니, 그의 투명한 예민함, 곧은 심성이 그대로 그렇게 멈춰주어서 고마울 정도다. 그의 악착같던 검은 혀가 그대로 악착같이 모두의 입속에 페부속에 달라붙는 듯한 힘은 '살아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망자'기에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의 혀가 자유스럽게 이 세상의 검은 인간들을 조롱하길 바란다. 적어도 그는 성역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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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보낸 아름다운 나날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 기원전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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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윤리학을 철학의 한 분파로서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윤리교육이란 곧 반공교유으로 통했고, 윤리학 속에서 당위명제외에 다양한 명제들을 발견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또한, 종래의 윤리교육은 자연에 접근하는 인간의 태도를 크게 '동양'과 '서양'으로 양분해 왔다. 그러나 좀 생각을 하는 자들은 무엇이 '동양'이고 '서양'인지 그 개념부터 명확히 하라고 촉구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후예라서?

어쨌거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래서 가볍게(피상적으로) 간과하고 마는 많은 정의와 개념과 단어들을 쿨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언어비판철학자'들의 생각은 옳다. 그런면에서 '서양'과 '동양'의 무책임한 이분법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입장을 도식적으로 나누어왔던 생각들도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 그 반성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훌륭한 저서가 바로 ' 핸리 데이빗 소로우'의 ' 월든'이다.

월든은 소로우가 살던 바로 그 세계의 명명이다. 사실 소로우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았지만, 그가 산 나라(대통령도 왕도 없는)의 이름은 '미국'이 아닌 '월든'일 수 밖에 없다. 월든은 정부를 부정하지만, 미국이라는 지리적 조건까지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월든의 추구는 진정한 미국(삶과 생명의 땅으로서의)을 표방한다.

미국은 인디언의 발자취를 씻어내는 데, 그 평생을 바치고 있지만, 소로우의 인생은 오히려 그 발자취를 재연해내는 데 바쳐지고 있다. 미국 국가주의가 유가의 엄연한 현실논리라면 , 소로우는 운둔자적하는 도가의 자연논리에 따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로우 개인보다 소로우를 따르는 무리들의 출현이다. 노자와 장자가 놀라운 것은 그 후대의 엄청난 道黨들이 듯이..그러나 한번도 노장철학이 동북아시아 대륙의 지배사상이 된 적 없었음에도, 소로우의 철학은 서양에서 새롭게 급부상하는 지배사상이다.

이것은 어떻게 방증할 수 있는가? 호주의 엄격한 야생동물과 환경정책, 유럽의 자전거 이용정책, 미국의 치밀한 공원녹지화 정책 그리고 새로운 무역외교경제 장벽으로 떠오른 그린 라운드,.그린 라운드의 사상적인 저맥은 다름아닌 '소로우'다. 그들의 관념적인 스승은 인디언과 일본의 선사들이지만,.그들의 진정한 영웅은 '소로우'다.

번쇄하게 소로우를 再板하는 동서양 지식세계의 이면에는 이러한 통찰이 숨어있다.

과연 자연친화주의는 동양만의 전통인지 다시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더 중요한 일은 우리가 스스로 서양이 던져준 후광속에 갖혀 '동양의 전통은 뿌리깊은 자연보호'신화속에서 마음껏 위안하고 도취되어 있을 때, 서양이 이룩한 눈부신 '환경정책'인 것이다.

조선의 후예들은 관념속에서만 '환경주의자'일 뿐, 실제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환경주의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대부분 반자연주의적이며, 환경위협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소로우는 이제 새로운 반성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수출한 정신을 다시 수입해야하는 시대의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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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상
마크 트웨인 지음 / 박우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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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 마크 트웨인이다. 많은 작가의 경우, 그의 몇 작품은 좋으나 몇 작품에선 실망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은 데 마크 트웨인은 모든 작품에서 절대로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영화화 될 경우에도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는 그의 작품이 매우 공상적이면서도 치밀한 현장 고증을 거친 연후에 쓰여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는 체계적으로 문학수업을 한 경력이 없다. 오히려 제도권 교육에서 잘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눈부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잔 다르크의 생애를 다룬 책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의 <잔다르크>는 오직 그 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다. 실제의 잔 다르크의 유령의 진위여부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빚어낸 역사는 어차피 후인들이 제각각 빚어낸 그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잔 다르크가 이단 재판정에서 재판관들과 나눈 신학적인 믿음에 대한 질문과 답변들이다. 마크 트웨인은 이 부분에서 굉장히 높은 수준의 신학 해석의 경지를 보여준다. 잔 다르크는 그녀를 마녀로 몰아 화형장에 몰고가 불사르고 말겠다는 야욕을 지닌 '악마떼들'같은 신학권력자들 앞에서, 그들의 유도심문을 매우 현명하며 똑똑하게 피해나간다. '신이 왜 하필 너에게 프랑스를 지키라고 명했느냐' 라고 하면 ' 그건은 신의 의지였으므로 나로서는 알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똑똑히 들었기 때문에 가만히 고향에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모든 형이상학의 문제에 있어, 심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토대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다. 잔다르크의 신비체험은 그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권력자들은 그 신비체험으로 말미암은 그들을 위협할 만한 어린 여성의 카리스마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겐 권력에 대한 어떠한 야욕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최근에 프랑스의 감독 '뤽 베쏭'이 그녀의 몇 번 째 아낸지 알 수 없는 젊고 잘나가는 모델 출신 여배우를 기용해 '잔 다르크'란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의거한 대본은 그 자신이 직접 쓴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으며 마크트웨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잔다르크를 영상화하면 얼마나 좋을지를 생각했었다. 물론 잉그리드 버그만이나 그 외에 몇몇 당대의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를 출연시킨 할리우드판 '잔다르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영화보다 재밌다. 장담하건대.. 그 재미는 허클 핀을 만화영화로 보는 것보다 장편소설로 읽는 것이 더 재밌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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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상
페터 회 지음 / 까치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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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땅 그린란드
38세의 독신녀
자신이 밟고 있는 얼음조차 얼릴 듯한 여자
그녀에게서 '모성애' 비스름한 것을 발견하려 말자.

허나 이는 온전히 그녀 탓은 아니다. 사람은 무릇 자신이 처해 왔던 자연 환경의 산물이기 쉬우므로.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린란드라는 지구 환경을 온전히 이해함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그녀를 함부로 재단하려 하면 안된다.

그녀가 내던지는 단상들과 내뱉는 문장속에서 평범한 것을 찾기란 그 반대의 것을 찾는 것보다 어렵다. 그녀는 말한다. 모든 노처녀들이 절망과 고독에 떨고 있으리란 고도로 일반적이며 상식적인 우려를 뒤엎으며 '나에게는 고독이 은혜의 빛이다' '나는 늘 나 자신을 향해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의식하며 내 방문을 닫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수학자 칸토르의 일화를 길게 인용하며 자신의 논거를 펼친다. 그녀가 그 죽음에 대해 그토록 집요하게 파헤치던 이자이아란 남자아이는 그녀처럼 ' 혼자였던 아이'였다. 결코 고독을 두려워 않는 망명자 같은 녀석이었다. 녀석의 어머니는 심한 알콜 중독자고, 아버지는 그린란드 서해안 탐험대에 속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아이가 아버지를 뒤따라 가버렸을 때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에 대해 무심하며 당연한 반응만을 나타냈으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망각의 눈이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쌓여가고 있었다. 사람들을 망각의 세계로 정겹고 나른하게 인도하는 그 순백의 '눈'에 대해 그녀만이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 눈에 대한 비범한 감식안을 통해 죽음의 베일을 거둬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진정한 이해'다. 자연을 향한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본래 갖고 있었으나 잃어버렸던 감각의 회복을 추구한다. 유클리드의 기하의 세계가 아닌 비운의 천재 수학자 칸토르처럼 일련의 적은 점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무한의 우주까지 깊게 천착하는 그녀의 사고 방식은 실용적인 것들에는 매우 회의적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동차들은 쓰레기 분쇄 압축기에 넣은 뒤 성층권을 통해 쏘아 올려 화성의 궤도에 가져다 놓는대도 상관치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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