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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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천재? 여배우 로만느 보랭제가 주연한 '라 빠르망' 영화속에서 그녀는 삼각관계에 빠진다. 알리사, 리자 두 여자 친구는 뱅상이란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 것이다. 로만느가 분한 알리사는 벵상에 대한 짝사랑을 '일기장'에 매일 적고, 리자를 사랑하던 벵상은 이 일기를 읽게 된 후, 종국엔 '못생긴' 알리사를 사랑하게 된다. 벵상이나 알리사나 원래 '책 읽기'를 즐기고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둘의 사랑은 이루어 지진 못하지만 어쨌거나 '일기장'즉 '書物'은 그들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봉그랑의 이 신세대적 소설도 마찬가지다.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들의 밑줄 긋는 남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가 누구인가보단 사실 그 존재로 인한 여자의 심정적 변화가 주시된다. 라빠르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뿔테 안경을 보기 싫게 쓰고 나왔던 알리사가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노출이 심한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컨텍트 렌즈 차림으로 나타나서 벵상과 리자 사이에 좌충수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에는 낙서하면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이 소설속의 남자는 버젓이 공공 재산에 흠집을 내고 있다. 그런 뻔뻔스러움을 사랑하는 여자도 있고 말이다. 나 역시 도서관에서 자주 책을 빌려 읽는다. 그리고 뻔뻔스럽게 줄을 긋고 코멘트를 단다. 심지어는 책 말미에 이메일 주소를 적어 넣은 적도 있다. 그런데 아무한테도 아직까지 연락을 못받았다. 나랑 취미가 비슷한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후에 그런 우연적인 사랑에 대해 모험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겐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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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 -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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툼레이더 시리즈의 롤플레잉 게임의 주인공, 전설적인 영국의 탐험가.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음에도 그 유산이 지겹고 유한계층의 삶이 권태로워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여인.한비야는 그녀를 닮았다. 그녀처럼 모든 것에 능통하고 만능이다. 어떻게 길을 열어가야 하는지를 일찌감치 알고 있다. 어떻게 위험에 대처해야 하는지도.

첫 챕터인가부터 중동의 '중년의 혁명가'와의 아슬아슬한 연애담이 감칠맛 났다. 그렇게 괜찮은 사람을 만났음에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 회자후소라.. 그녀의 아버지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사실 난 그녀에 대해서 잘 몰랐다. 다큐나 토크 쇼에 출현한 것을 몇 번 보고 참 야그를 재밌게 풀줄 아는 구나 감탄 한 적은 있지만.. 그녀의 사상이나 정신세계에 대해선 잘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러니 하게, 동방견문록이나 '죽은자 먹어치우기' '슬픈 열대' '열하일기' 같은 기행문들이 '간절'히 읽고 싶어졌다. 나는 솔직히 남이 쓴 재미나고 알콩달콩한 여행기를 읽고 나서 여행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예전에 전국을 자전거로 여행했을 때도 전국민이 '나의 문화 답사기'를 들고 다니는 걸 우습게 보았다. 책과 눈앞에 있는 실물과를 비교하고 '아하'감탄사를 연발하는 그들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들 같았으니까?

그녀가 많은 여행의 팁(자잘하지만 요긴한 정보)의 좋은 제공자인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책을 통한 여행'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눈으로 하는 여행에 있어서는 발로 뛰는 여행에 필요한 팁이 필요 없으니. 나는 더욱 황막하고 아직 배낭 여행객들의 빗자루에 쓸리지 않았던 시절의 지구를 탐방한 사람들의 목소리. 그 희귀한 목소리가 그립다. 그들이 들려주는 아득한 옛 이야기.. 나는 秘義적인 내용에 너무 탐닉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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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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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이다. 싸르트의 벽이나 솔제니친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본 사람은 감옥이 얼마나 소설속에서 매력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지 알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감옥이 탈옥을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는, 모험이 시작되는 공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상황'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인위적이며 복잡한 사연이 얽혀 들어올 수 밖에 없는 공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특히 이 이야기처럼 작가가 그들이 과연 어떤 일을 저질르고 감옥에 들어왔는지를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는 경우엔 독자의 호기심은 증폭될 수 밖에 없다. 어쨌거나, 감옥에 들어온 만인은 모두 평등하다.

인간이 평등해질 수 있는 기회는 많을 것 같지만 사실 많지 않다. 진정 평등할 수 있는 때는 죽은 후 밖에 되지 않겠는가 감옥안에서도 돈줄이나 백줄이 있는 자는 소위 귀족 처럼 지낼 수도 있다. 그러나, 몰리나 같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데다 백도 없고 돈도 없는 자는 항상 먹히고 마는 적자생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리나는 아주 현명하게 처신한다. 그 삭막한 한평의 감방을 마법의 몽상의 환상의 영화관으로 돌변시키는 그 탁월한 능력. 그녀의 캐릭터는 '바그다드 카페'의 뚱뚱한 독일여자와 유사하다. 이 영화가 여자들 사이의 버디 무비라면 이 소설은 남자들 사이의 버디 무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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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약 한방울 - Q MYSTERY 42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8
샬롯 암스트롱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199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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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집과 강단 밖에 몰랐던 중년의 소년 케네스 깁슨, 그는 '시'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시'의 세계를 이탈하지 않고 살려는 만년 문학소년이다. 우연히 장레식장에서 알게된 로즈메리(아이라 레빈의 <로즈메리의 아기>에 등장하는 로즈메리와 똑같은 이름이군)란 역시 젊음은 넘긴 매우 병약한 여자를 '동정'하게 되고, 동정이 일종의 '집착'으로 변질되는 과정의 심리묘사가 흥미롭다. 특히 이런 소설들을 읽을 때면 어쩌면 그렇게 남의 심리에 정통한지 고개를 흔들지 않을 수 없는데, 여자인 작가가 젊은 노신사의 마음과 머리를 어쩌면 그렇게 정통하게 알 수 있는지...

이 소설의 초점은 그렇게 순진 무구하고 착하고 자비로운 케네스 깁슨의 유일한 여동생 - 그녀는 왕성한 직장여성으로 묘사된다 - 을 빼곤 전혀 나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미국의 중소계층의 이웃 주민같은 사람들만 등장한다는 것. 유일하게 대도시에서 케네스의 부름을 받고 온 여동생 에셀은 '도회성'과 '배려'와 '관계'에 취약한 도시성의 특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여기서 우리는 로즈메리와 에셀의 극적인 대비에 주목하게 된다. 에셀은 '자기 주장이 뚜렷한 여성'으로 나름이 방식으로 에셀을 간호하지만 독선적이고 몰인정하게 말을 뱉는 습관이 있다. 반 나절 이상 집안에 있었던 독약병을 찾아 다니는 '헛소동' 아마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에서 모티브를 얻지 않았을까?

실제로 작가는 문학사 학위 소지자 답게 시와 문학작품들, 평론까지 두루두루 능수 능란하게 일상화법 속으로 녹여내는 재주를 부린다. 다만 나 같이 못된 인간이 읽기에 작가가 그리는 '평범한 선함'이 지배하는 세상이 그렇게 밝아보이지만은 않았고, 특히 뒤로 갈수록 화려하게 마치 로즈처럼 꽃망울을 터트리는 마른 여인 로즈메리에 비해 남자같이 우락부락한 얼굴에 씨름선수같은 에셀의 초라한 몰락은 작가의 관점에 심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독약 소동의 제공자가 케네스란 소심한 남자의 자살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그게 갑자기 에셀의 살인 무기로 돌변한다는 설정이 억지스러웠다. 그녀가 그토록 그들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여자는 사랑도 할 수 없고 사랑해 줄 사람도 없다는 도식적 인물 성정이 마뜩치 않다. 그리고 마지막에 에셀을 살인자(순전히 심증만 있지 물증도 없으면서) 몰아세우는 택시 운전사 옆집 부인. 그렇게 보상을 바라지 않고 협조적이던 이웃 주민들이 갑자기 한 여자를 살인자로 매도할 때는 이지메 집단으로 변한다. 과연 선과 악이 절대적인 것인가? 여성들이 주로 보는 드라마 제작용으로 쓰여진 작품인 탓인지. 이 소설은 안방마님들의 구미에 맞도록 짜여졌다는 한계를 여러모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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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한철 한국 3대 문학상 수상소설집 5
박영한 외 지음 / 가람기획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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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함과 냉소, 비아냥이 광적인 조롱으로 치닫는다. 그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이아고'의 현현처럼 느껴질 정도다. 프랑스의 문학 계보에서 랭보의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한 자가 '장 쥬네'란 인물은 아닐까? 워낙 성난 자부심과 뻔뻔스러움으로 글을 쓰는 인물이라 '랭발리디언'이라고 자청한 바는 없으나, 랭보의 무전 여행, 베를렌느에 대한 열정, 결혼과 가족제도에 대한 조소, 사기와 도둑질·매춘에 대한 헌사들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서구 문명과 아리안계 혈통적 우월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에 있어서도 랭보는 매우 비판적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냉소는 '바깥'이 없다.

랭보가 아프리카로 가서 상인이 된 것은 '시'에 대한 혐오와 '유럽 민족, 제국주의'에 대한 역겨움이 겹치면서다. 일찌감치 인생의 극단으로 치달은 인간.

나는 마침내 나의 정신 속에서 인간적 희망을 온통
사라지게 만들었다. 인간적 희망의 목을 조르는 완전한
기쁨에 겨워,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그는 하찮은 권력자, 종교 지도자들이 약속하는 '희망'이란 것이 얼마나 얄팍한 구속인가를 간파한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남은 유일한 것은 '희망'이라고, 신화까지 원용하며 희망 없는 우리를 기만한다. 그들이 '희망'을 팔아, '권력'과 '부'를 쌓을 동안 그 희망을 산 사람들은 그 희망이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불량품이란 사실을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히 알 수밖에 없다.

'너의 모든 욕구들, 너의 이기심, 그리고 너
의 큰 죄업들로 죽음을 얻으라'
아! 나는 그것들을 실컷 맞이했다. 하지만, 친애하
는 사탄이여, 간청하노니, 눈동자에서 화를 거두시라!
하여 나는 뒤늦게 몇몇 하찮은 비열한 짓을 기다리면
서, 글쟁이에게서 묘사하거나 훈계하는 역량의 부재를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내 악마에 들린 자의 수첩에서
이 흉측스러운 몇 장을 뜯어내 덧붙인다.

기독교가 사탄을 만든 것은 지극히 인위적인 장난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주역의 음양의 개념과 기독교의 선악의 개념의 지극히 대조적이다. 주역에서는 음과 양이 어디까지나 상보적인 움직임으로 우주의 변화를 이끌지만, 선악은 우주의 '끝장'을 내려 안간힘 쓴다. 변화가 아니라 직선적 낭떠러지다. 천사가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상정된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악마'처럼 유능한 자 뿐이지 않겠는가?

랭발리디언이란 말은 '랭보 추종자'란 뜻이다. 전세계적으로 랭보는 비단 인용되인 시인이 아닌, 그 삶까지도 모방하게끔 하는 시인 중에 하나란 얘기다. 조각가 로댕의 연인이자 그 보다 더 수준 높은 재능을 가졌다고 재평가되는 프랑스의 여류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 그녀의 동생인 폴 클로델도 역시 유명한 랭발리디언이다. 클로델은 『교환』이란 글에서 '겸허하고 무지하고 정교한 삶에 비겨 그 어느 것도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을 쓴 작가이다.

타계한 'Doors'의 짐 모리슨은 뼈 속 깊은 '랭발리디언'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나는 혁명, 무질서, 혼란, 그리고 이 시대에 무의미해 보이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게는 그것들이야말로 자유로 향하는 진정한 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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