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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한철 ㅣ 한국 3대 문학상 수상소설집 5
박영한 외 지음 / 가람기획 / 1998년 6월
평점 :
불온함과 냉소, 비아냥이 광적인 조롱으로 치닫는다. 그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이아고'의 현현처럼 느껴질 정도다. 프랑스의 문학 계보에서 랭보의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한 자가 '장 쥬네'란 인물은 아닐까? 워낙 성난 자부심과 뻔뻔스러움으로 글을 쓰는 인물이라 '랭발리디언'이라고 자청한 바는 없으나, 랭보의 무전 여행, 베를렌느에 대한 열정, 결혼과 가족제도에 대한 조소, 사기와 도둑질·매춘에 대한 헌사들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서구 문명과 아리안계 혈통적 우월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에 있어서도 랭보는 매우 비판적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냉소는 '바깥'이 없다.
랭보가 아프리카로 가서 상인이 된 것은 '시'에 대한 혐오와 '유럽 민족, 제국주의'에 대한 역겨움이 겹치면서다. 일찌감치 인생의 극단으로 치달은 인간.
나는 마침내 나의 정신 속에서 인간적 희망을 온통
사라지게 만들었다. 인간적 희망의 목을 조르는 완전한
기쁨에 겨워,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그는 하찮은 권력자, 종교 지도자들이 약속하는 '희망'이란 것이 얼마나 얄팍한 구속인가를 간파한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남은 유일한 것은 '희망'이라고, 신화까지 원용하며 희망 없는 우리를 기만한다. 그들이 '희망'을 팔아, '권력'과 '부'를 쌓을 동안 그 희망을 산 사람들은 그 희망이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불량품이란 사실을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히 알 수밖에 없다.
'너의 모든 욕구들, 너의 이기심, 그리고 너
의 큰 죄업들로 죽음을 얻으라'
아! 나는 그것들을 실컷 맞이했다. 하지만, 친애하
는 사탄이여, 간청하노니, 눈동자에서 화를 거두시라!
하여 나는 뒤늦게 몇몇 하찮은 비열한 짓을 기다리면
서, 글쟁이에게서 묘사하거나 훈계하는 역량의 부재를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내 악마에 들린 자의 수첩에서
이 흉측스러운 몇 장을 뜯어내 덧붙인다.
기독교가 사탄을 만든 것은 지극히 인위적인 장난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주역의 음양의 개념과 기독교의 선악의 개념의 지극히 대조적이다. 주역에서는 음과 양이 어디까지나 상보적인 움직임으로 우주의 변화를 이끌지만, 선악은 우주의 '끝장'을 내려 안간힘 쓴다. 변화가 아니라 직선적 낭떠러지다. 천사가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상정된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악마'처럼 유능한 자 뿐이지 않겠는가?
랭발리디언이란 말은 '랭보 추종자'란 뜻이다. 전세계적으로 랭보는 비단 인용되인 시인이 아닌, 그 삶까지도 모방하게끔 하는 시인 중에 하나란 얘기다. 조각가 로댕의 연인이자 그 보다 더 수준 높은 재능을 가졌다고 재평가되는 프랑스의 여류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 그녀의 동생인 폴 클로델도 역시 유명한 랭발리디언이다. 클로델은 『교환』이란 글에서 '겸허하고 무지하고 정교한 삶에 비겨 그 어느 것도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을 쓴 작가이다.
타계한 'Doors'의 짐 모리슨은 뼈 속 깊은 '랭발리디언'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나는 혁명, 무질서, 혼란, 그리고 이 시대에 무의미해 보이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게는 그것들이야말로 자유로 향하는 진정한 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