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지만 후회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먹을게 뭐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뒤져 보아지만, 김이 든 통과 박스 사탕, 그리고 간장이 있을 뿐이었다. 종이 봉지에는 오이와 그레이프 푸르츠가 있었다.

「배가 고프데요, 오이를 먹어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면실에서 오이 세 개를 씻어 왔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붓고, 김으로 오이를 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깨물에 먹었다.

「맛있는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간단하고, 신선하고, 생명의 내음이 물씬 납니다. 좋은 오인데요. 키위보다는 훨씬 좋은 음식인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를 먹어치우고 두 개째에 손을 댔다. 아작아작하는 상쾌한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오이를 송두리째  두 개를 먹고 나서야 나는 겨우 한숨 돌렸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가스 풍로에 물을 끓이고 차를 넣어서 마셨다.

 

- 무라카미 하루키 / 상실의 시대

내가 하루키 소설 중에 이거다 싶은 글은 항상 [상실의 시대]였다. 고 3때인지 아니면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무튼 하루키를 처음 읽은건 [상실의 시대]였다. 나중에서야 하루키의 주류(?) 소설은 [상실의 시대] 류가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항상 내 결론은 다시 [상실의 시대]였다. 그리고보면 20대에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상하지만, 30대가 되서도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이상하지? 라고 나에게 누군가 말했었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꽤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다. 머리맡에 두고 내키면 아무 페이지나 펼쳐들고 내킬 때까지 읽었다. 그러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게 되는 일도 허다했지만 이게 가장 하루키의 책을 읽는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항상 머리맡 책장에 있는 하루키의 소설. 이게 가장 하루키가 내게 차지하는 비중이고 의미이다.

 

[상실의 시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머리를 수술하는 미도리의 아버지 병원에 우연히 병문안을 간 와타나베. 미도리는 병원을 산책나가고 와타나베가 미도리 아버지를 돌보는 장면. 모든 장면이 한 눈에 보이는거 같고 그 병실 한 구석에 내가 있는 것 같은 이 장면 말이다. 아삭아삭하게 오이를 먹고 한 숨 돌리고 차를 마시고, 그리고보면 어느 수필인가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잠들지 못하는 어느 새벽 커피와 비스킷 조각을 놓고 책을 읽는다는 장면이 있었다. 영리한 달이 고아처럼 - 이 부분은 정확하지 않다- 떠있는 풍경.

 

난 [노르웨이의 숲]이 와타나베에게 아니 나에게 잃어버린 것, 놓쳐 버린 것을 말하는 소설이라고 난 생각했다. 손에서 흘러가듯이 사라져 버린 걸 말하는 이 소설에서 유독 난 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아삭아삭한 오이를 하나씩 해치워가고 한 숨을 돌리고, 모든 것이 사라져가지만 그리고 놓쳐 버리지만 그래도 난 이 오이를 먹으며 한 숨 돌리고 살아간다. 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 난 슴살에도 오이를 김에 말아 간장을 찍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난 오이를 김에 말아 간장에 찍어 먹는다. 난 마흔이 되도 오이를 먹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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