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정확하게는 오후 7시즘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강남에서 신촌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은 적당히 사람으로 붐볐고 시끄러웠다. 출퇴근을 버스로 한 이후로 지하철은 특별한 볼일 이외에는 잘 타지 않아서인지 조금 어색해졌다.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지하철이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다니는지 몰랐다. 정차할 때 내는 바퀴와 선로의 소리도 지나치게 날카롭고, 운행중에 나는 소리도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버스를 타고 다닐 때는 지하철이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지하철을 타보니 그건 잘못된 기억이었나보다.

아무튼 지하철을 타고 가만히 주변 소리를 듣고 있는데 사람들의 대화가 스물스물 들린다. 창문으로 비치는 내 뒷자리에는 두 여학생이 , 아마 대학생 즈음 되지 않았을까,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니와 전화를 하면서 짜증을 내는 - 아마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문제로 어머니와 오해가 생겨 말타툼을 하는 모양이다 - 여학생과 친구의 대화는 빈말로도 들을 맛이 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귀를 막고 싶다는게 정확한 심정이다. 도대체 지하철에서 대화를 나누는 - 대화가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 사람들의 어휘란 왜 저리도 빈약한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젊은 이들의 대화의 절반은 비속서이거나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고, 어른들의 문장은 아이들보다 비속어가 조금 적을 뿐 아주 많이 다르지 않다.

TV에서는 매일 자막이 흘러나오고, 자고 일어나면 이상한 줄임말이 생겨나는 이 사회에서, 언어의 변화란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게 말해 시대의 흐름이지 가만히 들어보면 언어의 빈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어와 사고는 하나의 연장 선상에 있는데, 언어는 곧 그의 사고의 발현이 아닌가, 참 요즘 언어를 혹은 대화를 듣고 있으면 언어가 사고의 발현이 아니었으면 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특히 이런 생각을 무라카미 류의 [엑소더스]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했는데, 소설의 내용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발랄한 청소년 들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뒷 부분의 작가 후기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때 읽었던 그 후기가 꽤나 지금까지도 강하게 날 지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적어놓은 기록을 보니 2003년 7월에 이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과 약간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다르기는 하지만 난 저때 읽었던 후기에서 상당히 큰 고민을 했고, 지금도 그 고민은 진행형 인가보다.

길었지만 오늘 이야기의 결론은, 지하철에서는 조금 조용히 합시다. 입니다. 지하철은 너무 소음이 심합니다. 이래서 자가용을 구입하는구나 싶을만큼이요.

   
  그 자유학교 학생들과 만났을 때, 깜짝 놀랄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애들의 어휘력이라고 할까요. 사용하는 언어가 정말 풍요롭고 정확했습니다. 말 하나도 신중히 생각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이마다의 교육위원회로 파견 나갔을 때, 중고등학생들과 꽤 시간을 들여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 애들은 어쭈구리, 졸라, 꾸려, 그런 상투적인 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애들의 언어 순화가 문제가 아니라 표현 능력이 없는게 문제입니다. 어휘력이 극도로 빈곤한 겁니다. 그건 아마 당연한 일일 겁니다. 학교에 가면 자연히 그렇게 되니까요,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텔레비젼을 틀면 그렇고 그런 젊은이들의 언어만 나오니까 적어도 정체성 위기는 느끼지 않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간단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스컴이 여고생이나 젊은 애들의 언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간단히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술집에 모여드는 셀러리맨을 보세요. 그들만이 아는 빈약한 언어로 저들끼리 웃고, 저들끼리 뭐라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대면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아요. 이야기할 것도 없고, 대화 방법도 모르고, 커뮤니케이션이란 아무 노력도 없이 성립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유학교 아이들은 무엇보다 고독합니다. 등교거부라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스스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언어를 찾게 됩니다. 그들은 책도 잘 읽고,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타인의 이야기도 잘 듣습니다. 필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설명하기도 하고, 타인의 의견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는 사활 문제와도 같습니다. 그 애들은 나와 인터뷰를 한 후에 그것을 정리해서 팩스로 보내왔습니다. 매스컴에 종사하는 세키구치씨에게는 정말 실례가 되는 말이겠습니다만, 그 애들이 정리한 문장은 유력 신문사의 기자가 정리한 것보다 훨씬 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정리해서 편집해놓았습니다. 그 애들은 노력없이 그냥 알 수 있는 것 보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입니다. 언어의 미묘한 차이에도 민감했고, 혹시 자신들의 말고 이 사람의 말이 어딘가 뉘앙스에서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스컴 관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의 범위안에서 인터뷰를 정리하려 합니다. 그 때문에 활자화되면 전혀 다른 뉘앙스의 말이 되어버립니다. 자유학교 학생들에게는 그런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생각한 것이, 이런 학생들이 앞으로 일본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키구치 씨, 개똥철학자같은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강자, 그러니까 생태계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종은 거기서 진화가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무라카미 류 <엑소더스>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