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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상 ㅣ Mr. Know 세계문학 48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생일 때 아마 2학년 쯤이라고 생각하는데 문학 교과서에서 <설국>을 읽은 적이 있다. 첫장에 매료되어서 - 난 지금도 소설 첫장으로만 따지면 <설국>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 <설국>을 통으로 읽기 위해 영풍문고에서 책을 골랐다. 그런데 그 옆 어느 자리에 제법 두툼한 두깨의 <빙점>이라는 책이 있었다. 처음 몇장을 읽다보니 이거 참 이야기가 재미나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서있던 자리에서 제법 읽고 나서도 도저히 안되겠는지 결국에는 그 책을 사서 집으로 왔다.(그 책의 뒷 이야기가 한권 더 있다는건 정말 그 당시에는 몰랐다) 그렇게 읽었던 일본소설의 '이야기의 힘'이 오랜만에 <세설>로 다시 되살아난, 그래서 오래도록 두고두고 다시 읽고 싶은 그런 기분이다.
<세설>은 1930,40년대 교토 지역에서 살던 몰락한 가문의 네 자매이야기이다. 장녀인 쓰루코와 둘째 사치코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고, 셋째 유키코와 넷째 다에코는 아직 결혼전인 처녀이다. 특히 소설에서는 유키코와 다에코와 쓰루코와 사치코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의 일과 그 와중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특히 기승전결로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사건으로 정점에 달하는 일반 소설기법과는 다르게 소설 전반적으로 큰 사건을 배제하고 결혼때가 이미 지난 유키코의 혼담을 전개하면서 당시의 풍속과 사람사이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소소한 재미를 준다 . <세설>의 가장 큰 장점은 위에서 이야기한 기법에서 나오는 바가 큰데 그것은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소설에서 물론 가장 큰 사건은 유키코의 혼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고 기본적으로 사건을 연결하는 고리이지만 결코 혼담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혼담을 이야기하면서 그 당시 30,40년대 일본의 풍속과 일반적인 가정의 삶,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곤조곤하게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소설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소설을 읽으면서 고민하곤 한다. 사회적 메시지인지 아니면 소설 자체에 충실한 것인지. 마치 중고교 시절 국어교과서에 등장하던 문학 흐름을 한번씩 되새김질하는 기분이다. 학창시절에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그리고 하지 않았던 고민을 세삼스럽지만 곱씹게 된다. 나는 소설이란 아무리 큰 사회적 메시지가 있고 가치가 있어도 읽는 재미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읽히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요컨데 읽고 싶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소설의 가장 기본이지만 정말 읽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를 쓰는 일은 작가들에게는 머리를 쥐어 뜯게 하는 고민거리일 것이다. 당장 서평같은 간단한 글을 쓰면서도, 레포트를 쓰면서도, 회사에서 문서 한장을 쓰면서도 사람들은 볼펜을 물어뜯을 정도까지 고민하지 않는가. <세설>은 그런 면에서 읽고 싶은 이야기라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는 소설이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별 5개를 더 줄수도 있다.
<세설(細雪)>은 가늘 세(細)자에 눈 설(雪)자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작은 눈이라는 꽤나 고풍스러운 제목인데, 생각해보면 이 제목만큼 적당한 말도 없다. 유키코와 혼담과 다에코의 생활, 쓰루코의 도쿄에서의 생활, 사치코의 유키코를 위한 고민과 분투로 조각조각 이어진 이야기는 내리는 눈이 어느 순간 쌓여있듯, 소설을 읽고 나면 언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쌓였나 싶을 정도로 깜짝 놀라게 된다. 하지만 그 눈을 보면서 포근해지는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아쉬움에 한숨을 쉬는건 아마 나뿐만이 아닐거다. 일본에 대해서 알고 싶고,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다면 별 5개를 줄 수 밖에 없는 책 <세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