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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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든 생각, 

"이 책을 중고등학교 때 읽었더라면?"


아마도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달라졌으리라. 마치 학창시절 배운 한국 근현대사가 대학교 때 맞닥뜨린 진짜 근현대사로 뒤집어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후 난 <사피엔스>가 교과서 교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특히나, '농업혁명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는 대목에서는 슬픔마저 느껴졌는데, 현대사회에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을 갈아넣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 보이는 듯해서였다. 인간의 역사는 약탈의 역사이고, 누가 어떻게 약탈하고, 누가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는 테크노크라트가 가공할 힘을 더해가는 지금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고 있다. 더구나 팬데믹이 지구를 뒤덮고, 우리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을 통과하는 지금은 더욱더.


재난이 우리를 뒤덮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

재난은 어떻게 작동하고 재난의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팬데믹이라는 현실을 통과하며 머릿속을 채웠던 질문이다. 이 때 만난 두 책. 나오미 클라인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와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둘 다 발행된 지 꽤 된 책들이다. 다행히 레베카 솔닛 것은 절판이 되지 않았고,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은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은 미친 듯이 이기적이고, 자기 먹을 것을 위해서라면 제 자식의 살점도 뜯어먹을 수 있는 존재라고 배웠다. 하지만 레베카 솔닛의 책을 통해 진짜 현실에서 목도하는 인간성은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자발적으로 서로를 돌보고, 자기 것을 내어주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특질이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다는 걸 탐사 취재로 밝혔다.


나오미 클라인은 한 발 더 나갔다. 그녀는 ‘재난의 세계사’를 통해 재난의 동학을 치밀하게 밝혀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잘못된 역사인지 촘촘히 드러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는 파편적으로 알고 있던 세계 경제사를 신자유주의의 약탈경제로 갈무리한 탐사보고의 역작이다.


존 버거가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했을 때, 

재론의 여지 없이 엄지 척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유.


1998년 IMF와 2008년 금융위기를 모두 겪은 사람으로서, 신자유주의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전세계적으로 답 없는 자본주의의가 역사의 종말을 고했다는 걸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각자도생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코로나 시대, 끊임없는 불안으로 기약없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또 팬데믹이라니!


코로나로 인해 자산이 있던 사람들은 벼락부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벼락거지가 되었다고들 한다. 현실경제와 달리 주식과 부동산은 고공행진을 하고, 재산을 불리기 위해(혹은 낙오하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불안해 한다. 왜? 우리는 한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까닥 잘못하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는 것, 그리고 조금만 똘똘하게 돈을 굴리면 누군가에겐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주식과 부동산 관련 콘텐츠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과연 그런 책이나 유튜브를 열심히 탐독하면 좋은 수익률을 낼 수 있을까? 도대체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무엇일까. 모두가 자기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만 골몰하고 있을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과거의 나를 알아야 미래의 나를 기약할 수 있듯이, 과거 인간의 역사를 알아야 우리의 미래를,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유발 하라리가 인류의 길고 긴 역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요약했다면, 나오미 클라인은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가 주류가 만들어낸, 혹은 주류가 세뇌시키고 싶어하는 역사인 걸 알아채는 순간이 중요하듯,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틀렸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이 바로 변혁의 중요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부끄럽게도 나는 천안문 사태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지식인들과 그들을 탄압하고자 하는 중국 정부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알고 있었다. 서구 언론들이 줄기차게 보도한 것들을 여과없이 수용한 탓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달랐다. 민주화 시위자들은 중국 정부가 국영농장과 공영농장을 보호하지 않고 규제없는 자본주의로 가려는 것에 반대한 것이었다. 등소평은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를 보호하고자 진압에 나섰다’고 밝혔다. 그 결과 중국은 국제적인 노동착취 공장이 되었고, 중국 억만장자들의 90퍼센트는 공산당원의 자녀들이 되었다.


만델라가 석방되고 아프리카 인종문제가 해결된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백인 경제관리들이 만들어 놓은 촘촘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발목이 잡혔고, 결국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폴란드 자유노조 바웬사의 승리가 물거품이 된 것도 마찬가지. 우리가 알고 있는 ‘칠레의 기적’은 기실 폭압적인 살인정치를 바탕으로 국영기업과 민주주의를 말살해 얻은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미얀마 사태가 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하듯 폭압적 살인정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만 응시해서는 알 수 없는 세계사의 흐름을 간과하면 안 되는 이유.


“시카고학파 경제학이 보기에 국가는 식민지적 개척지이다. 쇼크요법의 핵심은 거대한 이윤이 신속하게 창출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이 1950년대에 개시한 운동은 고수익이 생기는 무법의 개척지를 포획하려는 다국적 자본의 시도라고 보면 가장 좋을 것이다.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공공부문에서 수익성 좋은 새로운 개척지를 무자비하게 찾아낸다. 마치 아마존을 통과하는 새로운 수로를 확인하고 잉카 사원 내부에 숨겨진 금의 위치를 표시하는 식민지 시대의 지도 제작자를 보는 듯하다. 식민지 시대의 골드러시 때 그랬듯 개척지에서 부정부패는 늘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살아온 세월은 바로 개척지 자본주의 시대였다. 개척지가 위치한 장소는 위기에서 위기로 계속해서 바뀐다. 그리고 법이 자리를 잡자마자 즉각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팬데믹을 맞아 거대 테크기업들은 물 만난 고기 같다. 마치 9/11 이후 국가 부문의 대부분을 민영화한 미국 정부를 다시 보는 느낌이다. 이 거대한 약탈의 시대, 그들은 새로운 식민지 개척지를 만난 것처럼 투지가 넘친다. 그들은 팬데믹을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관찰하고, 교육과 의료를 원격화하고, 삶의 대부분을 디지털화하는 명분을 주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은 그런 테크기업들의 의도를 하나하나 깨부수며 외롭게 싸우고 있는 투사다. 그레타 툰베리가 가장 존경하고, <뉴요커>가 ‘미국 좌파 중에서 가장 뚜렷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워도. 전세계 지성들이 그녀의 업적과 활동에 감사하고 정력적인 활동에 박수를 보내도. 이상하리만치 우리나라에서 그녀의 책이 신통치 않게 팔리는 걸 보면 의아하다. 다만 예전 <쇼크 독트린>이 중고 시장에서 정가보다 훌쩍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는 걸 보면 알아보는 사람들은 알아본다는 건지.


얼마 전 쇼샤나 주보프의 <감시 자본주의>가 출간되었다. 나오미 클라인이 이야기하는 ‘팬데믹 쇼크 독트린’을 깊이 파기에 더 없이 좋은 책이라 여기지만 워낙 장황하게 설명하기 좋아하는 저자라 엄두를 못내고 있다. 반면 나오미 클라인은 어려운 내용도 쉽게 쓰는 재주를 갖고 있다. 벽돌책을 단숨에 읽어내리게 하는 재주. 분명 정치경제 관련 도서인데 소설책처럼 심장을 떨리게 하는 재주. 남다른 글쓰기 능력이 어려운 주제를 대중과 쉽게 만나게 하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자본주의다.’라고 기후문제의 본질을 외친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와 함께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부디, 이 여인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서 계속 계속 책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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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6-0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나뭇잎처럼 2021-06-0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감사하지요. 나오미 클라인은 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던데, 나오미의 열정과 담력 그리고 용기와 실천을 전달할 방법이 미약하네요. 지금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아수라장에서 앞뒤를 분간하려면 말이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림의 역사
데이비드 호크니.마틴 게이퍼드 지음, 민윤정 옮김 / 미진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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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I draw what I think, not what I see”라고 말했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가장 명확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작가 중 하나가 바로 호크니 아닌가 싶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그렇게 명료하게 밝힐 줄 아는 작가도 참 흔치 않다. 더구나 현대미술을 하는 사람 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책을 보는 게 일이라는 작가의 삶이 그의 생각과 깊이를 표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예술사를 다룬 책 중에 단연 으뜸을 꼽으라면 곰브리치도 아니고 하우저도 아닌 조중걸의 <서양예술사>. 고대, 중세, 근대, 현대미술까지 예술사를 형이상학적 관점, 즉 세계관의 변화로 그려낸 그의 역작은 세계 어느 미술사학자도 시도하지 못한 성취다.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재미지게 읽을 수 있는 책. 그 책이 재미진 이유는 하나, 예술을 파편적 분석이 아닌 인간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작품 속에 드러난 세계관을 적확하게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그림의 역사>가 재미진 이유도 마찬가지. 우리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는가. 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에 대한 정확한 문제인식과 그것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일관된 방향이 있다. 그는 ‘픽처’를 지식인 동시에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정의하고, 지속적으로 ‘사진’가 비교하면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현실과 진실 사이에서 무엇에 가까운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만약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다.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여러 요소들이 거기에 영향을 끼친다. 당신이 전에 그 장소에 가 봤다거나,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장소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P 78)


회화사 사진이나 다른 어떤 장르보다 힘을 갖는 건 그 한 장의 이미지에 겹겹이 축적된 시간 때문이다. 그는 루시안 프로이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그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124시간을 앉아 있어야 했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찰나를 포착한 사진과 달리 그 그림에서 우리는 축적된 시간과 작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존 버거가 <The way of seeing>이나 <A way of seeing> 아니라 <Ways of seeing>을 썼을 때, 나는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우리가 봐야 하는 단 하나의 시선은 없다. 하지만 원근법은 그 단 하나의 입장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호크니는 반대한다. 


“19세기 중반의 아카데미 회화들은 원근법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한 나머지 재미없는 그림이 되고 말았다. 그 회화들은 깊은 공간을 담고 있지만, 그 공간이 그림의 안쪽으로만 파고들 뿐 그림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렇게 깊이만 갖고 이야기를 전달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런 픽처에서는 모든 사건이 단 한 순간에 벌어진다. 그런 픽처에는 시간이 담기지 않는다.” (P 273)


원근법은 하나의 시점으로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고, 주변부를 소외시킨다. 원근법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전제로 하는 관점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 자신을 그 일부로 넣지 않고 관객으로 분리시키는 행위. 나는 그것이 서구의 지성사나 경제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중국인들이, 인디언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와 무척 달랐다.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르게 전개된다. 미술이 재현에 그치지 않고 인간정신을 표현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차원이 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우리는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장 시메옹 샤르댕은 “죽은 토끼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린 토끼 그림을 포함해서, 내가 여태까지 봤던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말처럼 격하게 공감하고 싶은 말도 없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선 이미 배운 것들을 “Unlearn” 해야 한다. 내가 배운 것들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으면 새로 배우는 것들이 그것을 강화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다. 내가 지지하고 있는 반석을 끊임없이 부수고,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 들라쿠르아는 사진에 대해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오류가 생기는 복제 장치’라고 했다. 호크니는 렌즈의 이미지가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적 측정의 결과이며, 우리는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입체파는 500년 넘게 사용된 원근법을 향한 일격. 우리가 공간 속에 있고, 그걸 만지고 이동시킨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들이다.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광경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것이다. 


What is a sculpture? What is a painting? We are stuck in a cliché and definition that is no longer valid, forgetting the fact that role of an artist is to think and redefine differently.” — Pablo Picasso


흥미로운 건 피카소는 무엇이 예술인지 같은 지적 탐구보다 재료를 만지는 기쁨에 천착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그게 바로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면서 가장 놓치기 쉬운 대목. 즉 책으로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태도,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일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에 힘껏 몸을 밀어붙여서 감각하는 태도. 자꾸만 학교에서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그것. 미술은 내 몸을 밀어붙이게 할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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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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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밀렸던 전시를 몰아보는 일. 운좋게도 그때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들이 한국에 왔고, 외국 도시를 방문하면 꼭 하는 일(개장 시간에 미술관에 들러 하루 종일 그림 속에 있는 것)을 하면서 퇴사의 기쁨을 누렸다. 좋은 전시가 있으면 휴가를 내고서라도 하루를 온전히 바치는 것이 낙이었는데 퇴사 직전에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던 것 같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눈에 포착된 강렬한 색채와 천진난만한 선들은 고흐 그림을 직접 대면했을 때 만큼 몸에 진동을 일으킬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가진 그림에 대한 질문을 따라 삶의 궤적을 오롯이 쫓을 수 있어서 부지런히 적어가며 그의 여정을 함께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특히나 중국인들이 원근법을 거부하며 그린 두루마리 그림을 필립 하스와 함께 설명하는 45분짜리 영상은 그가 ‘보는 것’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탁월한 영상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하는 것을 잘 말할 줄 아는 사람. 잘 쓰기보다 잘 쓰는 것에 대해 잘 말하거나, 잘 그리기보다 잘 그리는 것에 대해 잘 말하는 사람. 호크니가 잘 그린다 못그린다는 판단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지만 적어도 잘 말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가 예술학교를 다니면서 품었던 질문은 두 가지.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 그 질문은 평생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물을 그릴 때, 나무를 그릴 때마다 집요하게 파고들게 만들었다. 나의 첫 그림 <비오는 바다>에서 나는 포말에 집착했다. 어떻게 하면 부글부글 일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표현할 수 있을지 밤새 고민했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동양화를 배울 적에는 한 학기 내내 나뭇잎만 그렸다. 어떻게 하면 그 섬세한 잎맥과 부드러운 곡선을 표현할 수 있을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자세히 보는 일이었고, 그렇게 그릴수록 나뭇잎이 의식 속에서 선명해졌다. 

호크니의 전시를 본 지 두 해가 지나 그의 책 <다시, 그림이다>를 다락방에서 만화책 훔쳐보듯이 맛나게 읽었다. 호크니 전시에서 사온 그 책을 펴든 건 얼마 전 무작정 미술학원을 등록하고 첫 그림을 그리고 나오면서다. 역시나 첫 그림도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나뭇잎을 캔버스 한가득 그려넣은 것이었다. 집에 오는 길 내내 연초록의 물감을 푼 것 같은 콘트리트 건물 옆 나무들이 계속 시선을 붙잡았다. 회색벽을 배경으로 서너 그루가 울창하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 마치 난민촌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미소를 보는 것처럼 강렬했다. 묵은 색을 털어내고 연하게 새 잎을 피워내는 소나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다시 풍경들이, 사물들이, 내 눈에 닥쳐오기 시작했다. 


"나는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돈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돈은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흥미진진한 삶에 대해서는 욕심을 냅니다. 나는 삶이 항상 신나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에서도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지요. 나는 쓰러지는 날까지 신나는 삶을 살 작정입니다.”


아이처럼 오랫동안 바라보기,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의 삶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행위이자 가장 큰 기쁨이었다. 고흐의 이웃들은 고흐가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불평했는데, 고흐가 그렇게 사물을 바라봤기 때문에 그런 그림이 나올 수 있었고, 그렇게 열심히 바라본 다음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일뿐이었다. 

호크니는 고흐와 달리 유쾌함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폰이 나왔을 때, 그리고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 아침마다 방금 벗은 슬리퍼, 재털이의 담배, 책상 위의 스탠드, 탁자 위의 꽃 같은 일상의 풍경들을 그려 지인들에게 전송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엄마, 어때? 잘 그렸지?” 하는 마음이었을까? 내가 밤새 창작의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꼴딱 밤을 새운 다음 다음날 아침 <비오는 바다>를 아침밥상에서 가족들에게 보여줬을 때 반응하고는 분명 달랐으리라. 추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은 ‘그게 뭔데?’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보았다. 나의 창작욕은 그때 첫 좌절을 맛보았다.


나이가 들어 제일 좋은 것은 남들의 시선이나 품평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말고는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일이 별로 없을 뿐더러, 그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라지, 흥’ 그러면 그만인 일이다. ‘장차 그림을 열심히 그려서 화가가 될래요’(그러면 가난한 예술가가 된단다, 좀 더 유망한 직업을 선택하는 건 어떻겠니), ‘유명한 작가가 되어서 돈을 벌어야지’(과연 얼만큼 벌어야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와 같은 순환논리에 빠져 한 줄도 못쓰고, 하나의 그림도 완성하지 못하는 애처로운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감격할 만한 축복이다.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아이처럼 그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였을까, 호크니가 ‘회화는 나이든 사람의 예술’이라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하라고? 글쎄, 그림 그리는 게 소일거리 정도는 아니어서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겠다.


호모 픽토르(Homo Pictor)


알타미라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횃불을 밝히고 들소와 사슴을 그린 사람들이 취미로 벽 천장에다가 그렇게 그림을 그리진 않았을 거다. 누군가 그리는 사람을 위해 먹을 것도 해와야 했을 거고, 그리는 사람은 뚫어져라 들소를 관찰하고 온 마음과 정신을 바쳤을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동감 있고 예술혼이 살아있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테니. 누군가는 좀 더 잘 그리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좀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욕구, 쓰고자 하는 욕구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이 있는 나무가 가지를 뻗고 잎을 피우듯이 생명이 있는 인간이 자신의 눈에 닥치는 것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너무나 지당하고 명백한 욕구이다. 다만 그 욕구를 직업이나 금전과 환산하려고 할 때 우리의 욕구는 금세 움츠러들고 제지당하기 쉽다. 어렸을 적 이면지 한 묶음에다가 만화를 그리는 동생에게 ‘넌 왜 만날 만화를 그려?’라고 물었을 때 동생이 엄숙한 얼굴로 자신은 ‘인격수양을 위해 그린다’고 했을 때, 실로 나는 동생에게 감동했다. 동생은 그런 녀석이다. 그래서 아직도 동생을 존경한다. 


재밌는 건 그림을 그리면 우리는 그리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같은 풍경을 보지만 누구나 같은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다. 자신의 기억과 함께 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건 더 잘 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보는 행위는 그리는 행위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이 된다. 마치 책을 읽는 것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쓰는’ 행위에 의해 완성되듯이, 보는 행위는 ‘그리는’ 행위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까. 그리는 동안 우리는 질문하게 되고, ‘질문’이 있어야 사물을 훨씬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회화를 위해 필요한 세 가지로 ‘손’ ‘눈’ ‘마음’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좋은 그림을 보면서 창작자의 ‘마음’을 느끼고 감동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화가는 단순히 캔버스나 종이에 점점 더 많은 물감을 덧칠하는 것이 아니다. 참신한 생각과 관찰을 계속하면서 각각의 생각과 관찰을 통해 이전의 것들을 조정해 가는 것이다. 주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전에 쓴 것들을 수정하고 추가해나간다는 점에서 글쓰기의 과정과도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는 호크니 말을 들으니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라고 말한 한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한 마디 덧붙이련다. ‘너의 해석을 들려줘. 보여줘. 표현하지 않은 해석은 알 수 없어. 알 수 없는 해석은 사라질 뿐이야. 마치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세계가 너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지 않게 해. 세계가 너를 통과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어.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이 세상이 우리 모두의 목소리로 가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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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 초롬, 밤비, 태양, 샤샤, 놀, 단풍, 초달, 밍키, 그리고 은선과 희철
김은선 지음 / 모비딕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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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덩치 큰 무명이(래브라도 리트리버 3년 8개월)를 안고 자고, 안고 일어나는 순간이다. 따뜻한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쑤셔넣어 온기를 느끼고, 허벅지를 사타구니에 넣어 일체가 되는 순간 '좋아 좋아'하는 세포가 감돌며 온몸이 기쁨으로 넘실거린다. 백허그도 좋고 마주보고 껴안는 자세도 좋다.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 순간이 포유류가 느낄 수 있는 극상의 행복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탄생>을 쓴 김은선 작가는 남편 채희철과 함께 한때는 여덟 남매, 지금은 여섯 남매의 냥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알콩달콩 고양이와 살아가는 행복한 일상을 자랑질(?)하는 책인 줄 알고 무심하게 펼쳤다가 그만 훅 눈물이 끼쳐 놀라는 바람에 한달음에 읽어내려가고 말았다. 흡사 무협지를 읽는 듯 여덟 마리 고양이가 중원을 쟁탈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쌓아 마침내 어떻게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지 눈앞에 아스라히 펼쳐진다. 울리다가 웃기다가, 단짠단짠하는 게, 처음엔 낄낄거리다가 결국 폭소를 터트리고, 지르르 감동마저 훑고 가게 만드는 요상한 책. 


당뇨 판정 받은 태양이를 살리기 위해 국내외 반려동물 의학 커뮤니티를 뒤져 직접 생식 레시피를 만들고, 건강한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 유기농 닭 농장을 뒤져 직접 뼈를 가르고 살을 발라 병든 아이들을 보살피는 정성. 우리는 그걸 '극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나 고양이를 유별나게 살뜰하게 보살피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그럴 정성 있으면 지 식구들한테 더 잘하지.' 주위 사람들보다 자기 고양이, 개한테만 유난떠는 이들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인가. 우리나라 캣맘 캣대디는 외롭다. 한때 북한 동포들에게 식량을 보내는 걸 가지고도 많이들 그런 소리를 했다. '우리나라에 어려운 애가 얼마나 많은데!' 


간디가 그런 말을 했던가. 동물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 사회가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동물에 대한 태도에 고스란히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프고 병들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래야 마땅한' 존재로 치부하고 배제하는지, 아니면 도움과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기꺼이 '사회 안'으로 받아들이고 양생할지는 늘 중요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아프고 병들어 내 몸이 고달파지는 사랑이라니. 이 두 부부가 고양이와 맺는 관계는 그래서 어느 순간 숙연해지게 만든다. 나는 과연 우리 무명이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의 눈에 가족은 혼인이나 혈연으로 만들어진 관계다. 그래서 고양이 가족도 어미와 자식 간의 관계만으로 한정해 보게 된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길고양이에게 가족은 보다 폭넓고 확대된 개념이다. 새끼들을 보살피고 젖을 먹이는 생물학적 친모는 있지만 양육은 고양이 공동체의 몫이다. 모든 고양이는 다음 세대를 보호하고 공동으로 양육을 책임진다. (P 61)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을 우린 종종 잊고 산다.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심함, 할아버지의 경제력'만 운운할 줄 알았지 누군가를 사회의 일원으로 키워낸다는 일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못한다. 생존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대학을 가고, 더 좋은 직업을 구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골인지점에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괴물이 되든 뭐가 되든. 포유류가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해왔고, 어떻게 사회화 교육을 시켰으며, 어떻게 양육을 책임지는지. 우리가 잊고 살고 있는 '생명을 대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이 부부는 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만물의 영장 행세를 하며 점거하고 있는 이 지구는 누구의 것인가.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는 과연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부부는 매일 고양이들을 통해 연대를 배운다고 말한다. 이 소수민족의 연대는 과연 얼마나 단단히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손을 번쩍 들고 이 연대에 동참하기로 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수한 폭력과 가족이란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이기주의에 자신있게 '노'라고 이야기하기 위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꿈꾸는 무수한 소수민족을 향해 아낌없는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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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 초롬, 밤비, 태양, 샤샤, 놀, 단풍, 초달, 밍키, 그리고 은선과 희철
김은선 지음 / 모비딕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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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고양이들에게 연대를 배운다.˝ 이 한 문장이 얼마나 깊이를 가진 이야기인지 온몸으로 웅변하는 책. 빵빵 터지다가 왜 훅들어오는가. 예고 없이 쏟아지는 눈물바람에 당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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