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역사
데이비드 호크니.마틴 게이퍼드 지음, 민윤정 옮김 / 미진사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피카소가 “I draw what I think, not what I see”라고 말했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가장 명확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작가 중 하나가 바로 호크니 아닌가 싶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그렇게 명료하게 밝힐 줄 아는 작가도 참 흔치 않다. 더구나 현대미술을 하는 사람 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책을 보는 게 일이라는 작가의 삶이 그의 생각과 깊이를 표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예술사를 다룬 책 중에 단연 으뜸을 꼽으라면 곰브리치도 아니고 하우저도 아닌 조중걸의 <서양예술사>. 고대, 중세, 근대, 현대미술까지 예술사를 형이상학적 관점, 즉 세계관의 변화로 그려낸 그의 역작은 세계 어느 미술사학자도 시도하지 못한 성취다.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재미지게 읽을 수 있는 책. 그 책이 재미진 이유는 하나, 예술을 파편적 분석이 아닌 인간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작품 속에 드러난 세계관을 적확하게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그림의 역사>가 재미진 이유도 마찬가지. 우리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는가. 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에 대한 정확한 문제인식과 그것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일관된 방향이 있다. 그는 ‘픽처’를 지식인 동시에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정의하고, 지속적으로 ‘사진’가 비교하면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현실과 진실 사이에서 무엇에 가까운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만약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다.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여러 요소들이 거기에 영향을 끼친다. 당신이 전에 그 장소에 가 봤다거나,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장소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P 78)


회화사 사진이나 다른 어떤 장르보다 힘을 갖는 건 그 한 장의 이미지에 겹겹이 축적된 시간 때문이다. 그는 루시안 프로이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그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124시간을 앉아 있어야 했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찰나를 포착한 사진과 달리 그 그림에서 우리는 축적된 시간과 작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존 버거가 <The way of seeing>이나 <A way of seeing> 아니라 <Ways of seeing>을 썼을 때, 나는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우리가 봐야 하는 단 하나의 시선은 없다. 하지만 원근법은 그 단 하나의 입장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호크니는 반대한다. 


“19세기 중반의 아카데미 회화들은 원근법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한 나머지 재미없는 그림이 되고 말았다. 그 회화들은 깊은 공간을 담고 있지만, 그 공간이 그림의 안쪽으로만 파고들 뿐 그림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렇게 깊이만 갖고 이야기를 전달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런 픽처에서는 모든 사건이 단 한 순간에 벌어진다. 그런 픽처에는 시간이 담기지 않는다.” (P 273)


원근법은 하나의 시점으로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고, 주변부를 소외시킨다. 원근법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전제로 하는 관점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 자신을 그 일부로 넣지 않고 관객으로 분리시키는 행위. 나는 그것이 서구의 지성사나 경제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중국인들이, 인디언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와 무척 달랐다.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르게 전개된다. 미술이 재현에 그치지 않고 인간정신을 표현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차원이 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우리는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장 시메옹 샤르댕은 “죽은 토끼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린 토끼 그림을 포함해서, 내가 여태까지 봤던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말처럼 격하게 공감하고 싶은 말도 없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선 이미 배운 것들을 “Unlearn” 해야 한다. 내가 배운 것들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으면 새로 배우는 것들이 그것을 강화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다. 내가 지지하고 있는 반석을 끊임없이 부수고,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 들라쿠르아는 사진에 대해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오류가 생기는 복제 장치’라고 했다. 호크니는 렌즈의 이미지가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적 측정의 결과이며, 우리는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입체파는 500년 넘게 사용된 원근법을 향한 일격. 우리가 공간 속에 있고, 그걸 만지고 이동시킨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들이다.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광경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것이다. 


What is a sculpture? What is a painting? We are stuck in a cliché and definition that is no longer valid, forgetting the fact that role of an artist is to think and redefine differently.” — Pablo Picasso


흥미로운 건 피카소는 무엇이 예술인지 같은 지적 탐구보다 재료를 만지는 기쁨에 천착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그게 바로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면서 가장 놓치기 쉬운 대목. 즉 책으로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태도,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일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에 힘껏 몸을 밀어붙여서 감각하는 태도. 자꾸만 학교에서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그것. 미술은 내 몸을 밀어붙이게 할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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