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58
윤은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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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착할 곳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주소는 손에 쥐어진 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착할 곳 자체의 의미는 사라지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방랑의 이미지만 남는다. 이 시집에서 정착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이고 현재는 길 위에 주소를 쥐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슬픔의 먹지를 깔고 적은 듯 간결한 시행에 비해 남아있는 감정이 진하다. ‘이제는 나는 고양이를 기르’는데 그 장소 역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다. ‘볕 잘 드는 방을 고를 줄 아’는 화자는 언제든 또다른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으므로 현재의 ‘다른 곳’은 정착이 아닌 임시거처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시집 내내 주소는 손에 쥐어진 채인 것이다.
곳곳에 아이들의 등장이 눈에 띈다. 일견 이상의 13인의 아해가 떠오르기도 하는 아이들이다. 희망의 존재로서의 아이가 아닌 보호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미래가 암시되는 아이들은 화자와 다르지 않다. 혼자 조는 아이가, 돌을 던지는 아이가, 처음 보는 방향으로 달리는 아이가, 우는 아이가, 창고 건초 더미 위의 아이가 모두 화자이면서 화자의 파편이다. 더불어 시집 내내 길 위에 있었던(헤맨 것은 아니다. 주소를 손에 쥐었으므로 의도적인 도착하지 않음이다) 독자이며 독자의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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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시선 457
김승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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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에서 얇게 저며져 식탁에 오른다는 것, 본체인 덩어리와 색과 결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실함이 나온다. 하지만 진실의 중요성이 금과 은으로 흔히 비유되어온 것에 비교하면 단무지와 베이컨은 장기보존을 위해 가공되었음에도 변질될 수 있고 연약하다. 이것이 이 시집을 흐르는 진실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연약함은 진실의 생명력, 가변성을 보여준다. 얇게 저며진 씨뇨라/마담/교수님/미시즈/아줌마는 모두 가변성을 가진 진실이다. 통합의 순간을 그리워하든 마음에 들지 않는 조각이 섞여있든 결국 같은 색, 같은 결을 가진 진실들이다. 이것이 진실을 슬프게 한다. 그리하여 진실하지 않은 가해자는 피해자를 조롱하고 진실한 피해자는 진실의 닫힌 문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진실은 (강남역이나 구의역이나 기억보관소나)무거운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다. 잠깐 손을 맞잡은 두개의 물방울처럼 포스트잇은 진실과 진실로 서로를 통하게 하고 접착력을 잃는다. 진실은 바위에 새겨지지 않고 포스트잇에 적힌다. 그러므로 진실은 일면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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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음성같이 옛 애인의 음성같이 - 김승희가 들려주는 우리들의 세계문학
김승희 지음 / 난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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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세계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이 이런 제목의 새 옷을 입고 재출간 되었다. 제목으로 사용된 구절은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편에서 신의 물음을 수식하는 말로 등장한다. 헤세의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글을 타고, 이 구절로 뒤를 밟으며 어떤 것이 어머니의 음성 같고 옛 애인의 음성 같은 것인지 생각해본다. 이미 들어보았고 너무 익숙하지만 아득한 것, 이제는 옆에 있지 않은 것. 애증과 향수와 추억이 뒤범벅인 것. 이는 또한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이 책이 새로 제목을 정해야 한다면 정말이지 이 문장이 꼭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전의 제목도 퍽 마음에 든다. 이 무시무시한 고전들을 들었다놨다 하면서 군살 없는 저런 제목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선생님의 글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목소리는 4년 반 정도 들은 게 전부지만 그 시절 그런 글에 사로잡힌 마음이 읽는 내내 되살아나 어떤 단어들은 선생님의 판서로 보이고 어떤 구절은 선생님 목소리로 들렸다. 진정 어머니의 음성같이 옛 애인의 음성같이 읽은 것이다.

여기 실린 총 52편의 세계문학을 앞에 두고 읽은 것은 반갑고 안 읽은 것은 안타깝고 모르는 것은 괴롭다. 얼마나 더 읽어야 충분할까? 그래도 각 글에 흐름을 따라갈 정도의 요약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예를 들면 아예 도전도 못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것. 특히 반가웠던 건 『왼손잡이 여인』 편인데 마음에 맞는 서평을 여태 읽어보지 못해서, 그리고 나 역시 해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았거나 몰랐는데 알게 된 여러 소설들도 그런 반가운 마음으로 하나하나 찾아봐도 좋겠다. 신기하게도 고전도 시대에 따른 유행이라는 게 있는데 이 책이 원래 92년도에 나왔으니만큼 지금은 유행하지 않아 두루 읽히지 않는 소설도 다수 등장해서 오히려 신선할 듯하다.

*표지의 유화 진심으로 선생님 초상인 줄 알았는데 아님. 책날개 펴보고야 알았음. 근데 진짜 선생님 옆모습 같다.

보바리즘을 지닌 사람은 결국 자신의 환상과 욕망 때문에 숙명적으로 난파하는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추구하다가 결국 숙명의 덫에 치어 파산하는것, 그것은 보바리즘의 공포이면서 또한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체험이기도 하지 않을까?
- P87

이 황무지에선 죽음의 매장이 재생의 희망과 연관되지 못하고, 인간이 매년 되풀이하는 무의미한 죽음은 부활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니 황무지의 인간에게 재생의 봄보다는 죽음의 겨울이 더욱 편안할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4월은 잔인한 계절이 되고, 만물이 부활하고 재생하는 뜨거운 혁명의 봄은 황무지의 사람들에게 위험과 위기와 신경질적인 혼란의 계절이 된다. 황무지의 현대인들은 차라리 죽음의 겨울 같은 생중사의 안일한 평화주의를 더욱 사랑하니까.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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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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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한 시작을 더듬거리다가 유령이라고? 진심이야? 시기를 잠깐 거쳐 이 소설에 완전히 잠기는 건 삶의 한 가운데 나타나는 빌러비드 유령을 가진 독자들이 겪는 일이다. 발화한 적 없지만 존재하는 것, 무감각하게 치워버려 이젠 무심한 줄 알았지만 어느 때고 돌아와 내 삶을 집어삼킬 수 있는 기억의 유령. 아무리 텍스트가 독자의 손에 들어온 순간 어떻게 읽든 좋다고 하지만 노예를 여성으로, 유아살해를 출산거부로, 자유를… 자유로 내 멋대로 폭주하며 읽으면서도 21세기 변방국의 주류 피부색을 한 내가 19세기의 노예제를 두고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을 느꼈는데, 이는 해설에 나온 토니 모리슨의 말 “이 소설은 노예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 노예제만으로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어떤 사람들의 내면적 삶에 대한 것입니다.”로 해방을 맞았다.

이야기를 내내 관통하는 것은 말이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말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몸을 키우고 그 덕분에 비밀들과 존재하지 않은 시간들, 사라진 사람들이 말을 입고 세상에 나온다. 제2부의 독백들은 마치 만신이 망자의 말을 토해내는 씻김굿 같다. 토니 모리슨이 남도의 씻김굿을 알았을 리 없지만 한풀이로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것, 그 한풀이를 지켜보는 구경꾼(독자)의 개인적인 응어리 또한 스토리(굿)를 따라가며 함께 분출되며 적절한 이름을 가진 아픔이 되고, 종국에 그 한을 보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빌러비드와 세서의 시적 대화에서 반복되는 ‘내 거야’라는 말이다. 반복적으로 ‘내 거야’를 읽다보면 이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 아닌 마땅히 살았어야 했으나 살지 못했던 자기 삶에 대한 소유권 선포임을 알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슬릭의 <내꺼야>를 떠올렸는데 이는 행정자치부에서 만든 출산지도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곡으로, 여성의 몸을 식민지화하는 시각에 대한 분노와 내 몸의 경계를 침범하는 침입자에게 내 몸의 주인은 나(이런 90년대 슬로건이 아직도 필요하다는 게 절망 포인트), 내 거라는 강한 선포가 담겨있다. 이 곡의 ‘내가 나의 새끼를 가질 권리는 내게 있어’라는 가사가 직접적으로 빌러비드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죽고 묻혔지만 돌아온 흑인 여성-낙태당하거나 차별받았지만 (그 지옥에서) 돌아온 페미니스트라는 점에서 결을 같이 한다.

보통 죽은 아기가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 나는 속절없이 어미의 마음을 가진 독자가 되어 아기를 안아주고 싶다는 둥의 생각을 하지만 빌러비드는 다르다. 그녀는 다 자라서 돌아와 흡사 임신한 듯한 몸을 하고 떠났다. 다시 갖게 된 생명력, 그 안에는 드디어 밖으로 나온 덴버의 몫도 있다. 세서와 동행하며 삶에 난 구멍에 같이 이름을 붙인 독자의 몫도 있다. 그래서 슬픔이 아닌 바깥으로 나갈 힘을 얻고 책을 마친다. 과연 명작이다.

세서가 문을 걸어잠그자, 그 집 여자들은 마침내 자유로워져서 있고 싶은 대로 있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키는 대로 마음속 말을 했다.
거의 그랬다. 스탬프 페이드가 들을 수는 있었지만 해독하지는 못한그 길을 에워싼 목소리들에는 124번지 여자들의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발화할 수 없고, 발화된 적도 없는 생각들이었다.
- P327

세서는두 손과 무릎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웃느라 가슴이 들썩거리고 눈물까지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두 손과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웃음이 잦아든 후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빌러비드와 덴버는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세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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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그라프 mindgraph Vol.1 - 창간호
마인드그라프 편집부 지음 / FFL(에프에프엘)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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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된 창간호. 사실 어떤 주제로 꾸린 잡지인지도 모르고 노석미 작가님 인터뷰 실린다는 소식에 그 댁 고양이들 사진 보려고 구입했다. 궁금한 고양이는 미뤄두고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던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때때로 상담실, 대부분 명상 공간이구나. 그저 힙한 요즘 잡지이려니 했는데 심리학과 마음챙김이 가득하다. 아 psychology와 mindfulness면.. 완전 힙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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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의 노트를 제외하면 창간호의 첫 글은 유희경 시인의 것이다. 아직 혜화의 위트앤시니컬을 못가봐서 이대 앞 시절을 생각하며 읽었다. 마음의 세밀화 같은 시인의 글로 여는 창간호라니. 이 잡지의 톤은 여기서 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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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문적인 심리학 노트가 이어진다. 일상의 마음챙김과 책, 음악, 인터뷰, 사물들도. 힘을 빼고 앉아서 오늘의 나를 다듬을 정도로 조금씩 읽는 것이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음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인지 이 잡지에는 색깔도 절제되어 있고 광고도 없다. 그 덕분에 가격은 좀 있는 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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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고양이는 너무 좋았다. 인스타그램 이상의 이야기가 인터뷰에 있었다.
*잡지의 아주아주 작은 부분인데 너무 신경이 쓰여서 사실 그 페이지 이후로 전혀 집중을 못해서 기록해둔다. 여기 실린 한 인터뷰에 “돌고래를 보기 위해 보트를 타는 일정”, “돌고래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보트를 상상”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핫핑크돌핀스의 활동을 몇 년간 지지하며 지켜보는 입장에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돌고래 선박 관광은 꼭 금지되어야 할 활동이고 마음챙김의 정반대 지점에 속하는 일이다. 이 인터뷰의 전체를 해치는 게 아니라면 잡지의 통일성을 위해 그 구절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다행히 바람이 세서 배가 뜨지 않았다고 하며 맺었는데 배가 뜨든 안 뜨든 돌고래 선박 관광은 안 됩니다. 돌고래가 선박 관광으로 어떤 고통을 받는지 알고 싶다면 핫핑크돌핀스의 인스타그램 방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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