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 맞습니까?
2005.12.21-12.24
작년 12월, 개인적인 휴가는 3일이 남아있었고 회사일은 언제나 그렇듯 잔뜩 밀려있었던 겨울초입의 이야기다. 지금은 타교회로 옮긴 새문안대학부시절의 선배와 함께 여행 한번 같이 가자는 대화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여름으로부터 전해져왔다. 우리는 의기투합하였고 여행을 전격적으로 결정하였다. 목표지는 일본으로 정했다. 그것도 패키지 이런 것도 아닌 배낭여행으로 합의를 보았다. 무엇보다 값이 쌌다.
선배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가 소설가라는 직함을 얻어 무협소설 두번째 창작연재소설 원고청탁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다. (네이버에서 <창천일성>이나 <영웅탄생>을 입력하세요. 사익광고협의회!) 그는 새로운 상상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자신을 재촉하는 출판사 여직원의 독촉을 외면하고 훌쩍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나름대로 2004년 3월부터 그해 늦가을까지 박현미 자매(현 청년2부 GBS리더)와 동문수학하며 연마하였던 일본어 1대 2 과외 실력테스트 명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 떠났던 여행이다. 결혼한 후에 아내와 함께 가는 줄로만 여겼던 회사동료들이나 친구들에게 교회선배와 가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힌 이후의 파문이 그랬다. 아내는 휴가가 남아있지 않았다. 설득은 나의 당면과제였고 아내는 흔쾌히 수락했다. 정신적 충격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전제로.
3박 4일 가기에는 고베/나라/교또/오사까가 무난하였고 성탄절이브날 돌아오는 여정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우려한 대로 언어의 벽은 높았다. 나의 일어회화실력은 아시아나 비행기 안에 남겨두고 내렸나 보다. 우리 둘은 철저히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이었다. 여행의 추억은 헤맨 부분에서 풍성하게 남긴 했지만 씁쓸했다. 종로 <가을동화>에서 음료수와 점심식사와 곁들였던 공부를 너무 게으르게 했던 것이다. 성실했던 현미씨가 언제 일본 가서 능수능란한 외국어로 복수해주면 좋겠다. 선교도 좋고.
처남생각
여행 후에 남은 건 사진과 야구공 하나가 전부였다. 오사까 시내 전철역에 한신백화점이 있었고 7층인가에 야구용품 매장이 있는 걸 보고 관심있어 들렀다. 작년 일본 센트럴리그우승팀 도시여서 그런지 야구관련 상품도 많았다. 대학교에서 야구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는 처남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엠블렘이나 로고 같은 거 전혀 안 들어가있는 ‘민짜’ 야구공 하나를 나의 여행기념을 위해 구입하였다. 겨울 내내 양복 위에 잠바 하나 더 입고 회사 출퇴근하는 날이면 내 잠바 주머니에는 그 야구공이 미니라디오와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야구공을 손에 쥐고 있으면 옛날 풍경 두 컷이 자주 떠오른다. 하나는 초등학교시절 방과후건 주말이건 집 건너편 학교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던 축구나 야구에 대한 추억인데, 늘 재밌게 땀흘려 놀다보면 최루탄 마시고 눈물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고려대에서 학생시위를 자주 한 만큼 제기동 주민들은 최루탄 냄새를 흡입하며 살던 날이 많았다. 80년대 중후반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또 하나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 근처 어린이보호구역에 집이 있던 동네친구가 친형과 글러브 하나씩 끼고 나와서 공 던지고 받고 하던 풍경이다. 포수 글러브 끼고 동생의 공을 받아주는 친형의 듬직한 모습, 그 당시 우리 나이를 따져봐도 불 같은 강속구를 던지던 친구녀석의 와인드 업. 시간이 난다면 포수글러브 하나 구해서 볼 캐치하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으련만. 청년1부 민수와 격주로 토요일아침 조기축구하는 재미로 만족해야 하지 싶다.
3월의 첫 2주간은 야구가 전국민을 들었다 놓았다 한 기간이었다. 은행영업시간 내에 벌어진 경기가 많아서 제대로 9이닝을 본 경기는 한국팀이 일본에 진 경기 밖에 없지만 문득 야구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당신도 모두 투수다
바로 나 스스로가 매일매일 야구장의 중심 갈색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루에 공 하나를 던지는 삶일 수도 있고 하루에 공 몇 십개를 뿌려야 하는 선택의 연속일 수도 있다. 한 게임에 해당하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기진맥진하기 일쑤고 스스로를 돌아볼 틈도 못 찾고 내일의 게임으로 내몰린다. 이것은 신앙적인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여겨진다.
내가 가진 구질이라곤 너무도 초라하게 직구와 변화구, 단 두개의 구종(球種)밖에 없다. 세상의 날고 기는 타자들을 상대하는 내 투구가 기본기도 안 되어 있고 형편없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변함없는 믿음’의 직구와 내 삶을 주관하시고 열방을 다스리시는 온전하고 크신 ‘사랑’의 변화구를 집중해서 던지는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세상과 겨뤄보라고 마운드로 올려보내는 감독이거나 내 공을 묵묵히 받아주시며 함께 기뻐하고 또는 애통해하는 포수이기도 하다.
내가 평생 던진 수많은 공 중의 하나, 그 투구를 보고 관중들 중의 누군가 한명이 믿음의 본질을 깨우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변화로 나타나 회심하게 된다면 결국 그것이 내가 가정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역사가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의 변화구는 쓰면 쓸수록 그 어떤 누구에게보다도 나에게 더 강렬한 변화를 일으킬 것을 말이다. 그것은 리더를 맡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사람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내 공은 너무도 깨끗하고 여전히 실투가 많다. 그게 가장 큰일이다.
(2006.4, 김 인 부회장 청탁을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