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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동(勞動)

 

힘들이고 애쓰느라고 지치고 고달프고 괴로우며

 수고롭고 치사한, 일을 하는 것, 勞

 

흔들리고 옮기고 동요하고 떨리고 느끼며 일어나고

 시작하고 나타나고 변하며, 움직이는 것, 動

 

 

- 황정은 [송곳을 읽다],  p.297 (창작과 비평 179호, 2018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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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5일_ 나는 하루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전에는 무척 좋아했었는데, 요즈음은 그냥 감흥이 없는 옛 친구 같다. 그래도 아래와 같은 글을 지으니 그를 미워할 순 없다. 그도 분명 어떤 극한까지 갔다온 작가임에 분명하니까.

 

 소설을 쓰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라고 계속 생각한다. 적어도 그 소설을 무사히 끝마칠 때까지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완성하지 않은 채 도중에 죽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분하다. 어쩌면 이것은 문학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나 자신이다. [먼 북소리] 중에서

 

김탁환의 <원고지> 중에서 (황소자리 刊,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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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우리 삶에서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것을 이로정연하게 정리하는 어떤 측면에 주목한다. '유심히' 관찰하는 일은 의식의 몫이다. 의식의 몫, 논리의 몫, 이것이 바로 학문의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또 우리 삶에서 어떤 진실이 '무심코' 발화되고, 이것이 이야기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전승되는 어떤 현상에 주목한다. 어떤 진실을 '무심코' 발설하는 일은 무의식의 몫이다. 무의식의 몫, 감성의 몫, 나는 이것이 신화, 또는 설화라고 생각한다. 삶은 이 두가지가 만날 때 온전해진다는 것이 나의 오랜 믿음이다.

...

 

 

이윤기 <내려올 때 보았네> 중에서 (비채 刊,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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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그러자 뜻밖에도 방금 전까지 쩔쩔맸던 문제의 실마리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아, 내가 젖을 물었구나. 아, 나는 이맘때 목을 가눴구나. 아, 내가 저런 눈으로 엄마를 봤구나, 하고.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창비, 2011) 79-80쪽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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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여름에

추억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스스로 정의해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건 바로 추억이다.

 

 

토요일 아침,

케이블TV에서 지붕뚫고 하이킥 92회, 93회를

재방해주길래 보는 와중에

예전 가슴깊이 치던 채플린의 인생에 대한 명언과 함께

등장인물 누군가의 대사로 나온 말이 참 맞는 말이다 싶었다.

 

사는 기쁨의 절반은 추억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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