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영석이 말에 따르자면,
컴퓨터가 말을 안 들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껐다가 켜는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필요없단다. 이런 식이다. 


-영석아, 갑자기 치명적 오류라는 말이 뜨면서 컴이 먹통이 됐어. 어떻게 해야 되냐?
-윈도 버그일 거야. 껐다 켜.
-에러 메시지가 계속 나는데?
-윈도 내에서 프로그램들이 충돌했을 거야. 껐다 켜.
-갑자기 키보드가 안 먹혀.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 껐다 켜.
-껐다 켰는데도 먹통이야. 이건 어떻게 해?
-다시 껐다 켜.


출처: 박현욱 <동정 없는 세상> (문학동네 刊)

 

 

............................................ 

하루 해가 모니터에서 떠서
모니터에서 지는 일상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껐다 켜면 하루가 가있다.
이미 저만치 혼자 굴러가서
금새 한달이 가고 계절이 바뀐다. 

20040529 @싸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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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2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해가 모니터에서 떠서
모니터에서 지는 일상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껐다 켜면 하루가 가있다.
이미 저만치 혼자 굴러가서
금새 한달이 가고 계절이 바뀐다.

이미...자네가 시인이 되셨네..그려.....
 

바민련) 밥과 여자와 꿈


생산관리 시간에 윤영이와 연습장에
바보클럽 아이들 이름을 적다 보니
12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윤영이의 순간적인 기지로 인하여
클럽아이들을 세가지 파로 나눌 수 있었으니,
 
앞으로 바보클럽은
바보연대로 개칭해도
무난할 정도의 각각의 이념노선을 여기에 밝히기로 한다.

ㅅ대 경영 94학번으로서
이십대중반 전형적인 고민들인
'밥'과 '여자'와 '꿈'에 민감한 아이들의 연대,
이름하야 바보민감연대(바민련)를 소개하는 바이다.

단, 그동안 핑크빛 소문이 무성하였던
권형구-손성민 커플, 홍준기-황상하 커플,
김현-한흥마 커플, 김재현-이주원 커플 등은
풍기문란을 예방코저 다른 파로 갈라놓았음을 고지한다.


좌파(지도교수-황규대) : 김   현, 권형주, 이주원, 홍준기
중도파(지도교수- 최관): 장윤영, 정흥식, 한상균, 황상하
우파(지도교수-임정규) : 한흥렬, 김재현, 손성민, 이진오

 
 1) 좌파의 구성

: 바보임을 부정하거나 회피할 목적으로
: 원적학과를 임의로 옮기거나
: 해외연수 중에 있는 자,
: 또는 어학연수 의도를 품고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함.
: 자신의 의도와는 딴판으로
: 오히려 바보노선의 국제화 물꼬를 튼 급진주의자.
: 삼성재단 학교에서 자신은 LG임원이라면서
: 삼성의 교수처우개선노력을 비방하고,
: ㅅ대생에게 거대담론을 일삼던 황교수를 지도교수로 초빙함.
: 학생과의 면담에서 영어로 자기소개를 강요한
: 유필화 교수와 경합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 황교수의 숨겨둔 아들(황부순 씨)의 로비로 인하여
: 어렵사리 선정됨.
 

 2) 중도파의 구성

: 황상하 군의 진지한 농담
: "혹시 중앙도서관파?"라고 생각하면 오산.
: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 진짜 몰라서 모른다는 건지
: 스스로 바보임에 대하여
: 긍정과 부정을 유보하는 자.
: 바보인 듯 바보가 아니고 또한 바보가 아닌 듯 바보인,
: 비교적 클럽 내에서나 외부사교집단에서
: 전형적인 중간형을 발휘하는 것이 특징.
: 윤영 군이 시켜준 3대 3 미팅에 나간 이후로
: 각종 팅을 외면하고
: 결혼정보회사 "듀오"를 기웃거리고 있는
: 정흥식 군의 합류가 의외라는 평.
: 지도교수로 선임된 최 관 교수는
: 매 학기 첫시간에 씰라버스를 나눠준 후
: "질문 있어도 제게 물어보지 말아요. 저도 몰라요!" 라며
: 느린 목소리로
: 겸손과 자기비하를 일삼은 공적이 중도파 성향에 크게 어필함.


 3) 우파의 구성
: 바보클럽에서 이들의 개성은 가히 독보적임.
: 욕설을 일삼고 직설화법에 능한 스타일이거나,
: 터프한 이미지와 한국NGO("No Girlfriend!" Organization)의장
: 경력을 소유하고 있거나,
: 킨제이보고서 이후 최고의 이슈를 자아낸
: 불알테스트 임상실험보고서를 냈거나,
: 뒤뚱뒤뚱 푸우 이미지를 풍기면서도
: <夜한밤에>프로그램 '싱글파티'코너의
: 박상아(탤런트)같이 남자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 수줍은 아가씨를 반려자로 찾고 있는 자
: -이런 여자를 찾는 것은 바보스런 일이나
: 성취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등을
: 한 카테고리에 집결시켰음.
: 옥주현 없는 핑클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 이 우파친구들 없는 바보클럽은
: 상상만 해도 죄를 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광고는 018 PCS광고 "상상만 하면 돼!".
: 지도교수로는 삼색회계의 권위자로서
: 맞벌이를 못참아하는
: 불세출의 교주인 임정규 교수가 낙점됨.
: 앞으로 ㅅ대출신 교수임용비율을
: 단계적으로 축소하여도 전혀 자리걱정이 없을
: 그의 모교는 고려대로서
: 경영학부 교수 중의 왕따로서
: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음.
: 학생식당이나 스쿨버스에서 난데없이
: 영어로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곤 하는데,
: 임교수가 타의추종을 불허함.


*또 졸업과 관련된 분류를 하다 보니
2001년 2월이면 절반(06/12명)이 학사를 마치는 상황(기졸업자 포함)에 직면한 바,
앞으로 전체모임을 총괄할 바보연대 상임대표를 선출하는 것이 좋겠다고 협의되었음.
그래서 1기 대표는 2000년 12월에서 2001년 5월말까지를 임기로 하여
바보클럽회원의 모임과 신변안전을 도모하였으면 함.
각 대의원들은 후보 2명을 추천, 선관위 대표 이주원(duck94@netian.com)에게
메일 통지를 요청함.
메일 미발송자는 자기 자신을 추천한 것으로 간주하여 2표의 영예를 물리기로 하였음.

*기간: 11.20(월)-24(금)
*메일은 이주원에게 ! : duck94@netian.com
*메일제목은 추천인 2인을 명기하기 바람
  예: [00-01 상반기] 임금자, 이규영

*선거결과로 1인을 선임할 가능성이 지배적 !

*최다득표 2인을 추려서 술자리에서 최종 옹립식을 거행할 가능성도 있음.

(후략)

-1기 대변인
..........................................................................................
 
졸업을 하고 나니 이 친구들 만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정말로,
어느새,
결혼식이나 돌잔치에서나 겨우 보게 될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이 바보들, 잘 살아야 할 텐데...
내일은 어린이날
많은 어린이들이 바보같이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진심으로 바래어본다.
2004.5.4 (22:27) @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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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해를 감수하는 일                /이수태

 군대란 곳은 이상할 정도로 청명한 곳이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은 나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유형도 윤곽이 아주 뚜렷한 몇 가지로 나누어지고 인간성도 금방 그 전모가 드러난다. 그에 비하면 일반사회는 몇 배나 탁하고 여러 수단으로 분식(扮飾)되어 있어 한눈에 전모가 드러나는 일이 드물다. 그러나 군대는 단순하고 솔직하다. 그래서 거기서 볼 수 있었던 인간이나 사건의 유형은 내가 이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좀더 단순화시켜 이해하려 할 때 종종 떠올리는 대입(代入)변수가 되곤 했다.여기에 소개하는 오래 전의 아주 작은 사건도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세상을 보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틀이 되어주었다. 

 사건은 내가 복무하던 논산훈련소의 모 중대에서 화장실 유리창 하나가 분실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처리를 위해 다른 중대의 화장실 유리창을 밤에 몰래 훔쳐다가 박아놓았다. 참고로 논산훈련소의 막사는 현대식 건물로 모두 판에 박은 듯이 지어져 있다. 모든 규격이 똑같으니 이런 조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자,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난을 당한 중대에는 비상이 떨어졌다. 밤에 보초근무를 섰던 기간병이나 훈련병들은 기합을 받았고 즉시 원상복구를 위한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그러면 그 다음날은 건너편에 있는 다른 중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열두 개 중대에 이것은 금방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각 중대의 보초근무는 강화되었고, 특히 화장실 주변에는 방한복을 두툼하게 입은 여러 명의 동초(動哨)가 밤새 배치되었다. 어제는 어느 중대가 당했다더라는 이야기나 어느 중대에서는 대낮에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 성공했는데 선임하사가 직접 작전을 진두지휘했다더라는 이야기가 식기 세척장의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스릴 넘치는 게임에 종지부를 찍는 소문이 들려왔다. 6중대가 마지막으로 창틀을 도난당했고 그 사실은 6중대장에게 보고되었다. 물론 그는 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중대장들과 달리 행동했다. 그는 선임하사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지금 즉시 영외에 가서 창문틀 하나를 제작해 오라고 했던 것이다. 이 소문은 금방 열두 개 중대에 퍼졌다.
 그날 이후 6중대장은 다른 모든 중대장들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하루아침에 그는 우리 사병들 사이에서 특별한 인물이 되었다. 그를 만나면 우리는 좀더 큰 목소리로 "충성!"을 외쳤고 경례를 받는 그의 태도는 훨씬 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마 몇몇 중대장들은 왜 자신도 그처럼 남다른 발상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부대는 다시 평화를 찾았고 우리는 빛나는 기억 하나씩을 갖게 되었다.

 제대 후 내게는 이 단순한 사건이 이 세상의 어지러운 현상을 분석해서 판단하는 데에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듯이 종종 회상되곤 했다. 그렇다. 세상은 훨씬 다양하고 단선보다 복선이 많고 여러 타래가 얽혀 있기는 하지만 유형을 단순화시켜 보면 거기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한 명의 양심불량이 있고, 그 일으켜진 문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공연히 손해볼 수는 없다'는 일념에서 이 문제를 대책 없이 유전(流轉)시키는 열 명의 평범함 사람들이 있고, '내가 조금 양보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문제를 타결하는 한 명의 특별한 결단이 있는 것처럼 내게는 자꾸만 느껴진다.

 사실 작은 손해를 감수하는 것, 한 발짝쯤 양보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한두 시간의 수고나 점심값 정도의 금전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런 양보가 우리를 특별히 궁지로 몰아넣지도 않고 그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묘한 것은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보짓같고 모든 사람들이 공인하는 삶의 질서로부터 홀로 이탈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실로 그렇다. 열 명의 중대장들이 아무도 그 간단한 발상을 쉽게 하지 못한 데에는 세속적 삶을 지배하는 끈질긴 가치관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생각하면 하나의 일탈이다. 그것은 단 한 발자국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평균적 가치관에 저항하며 구축된, 다소 고독한 가치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에 지나지 않는 것을 위해 한 개인은 그의 내면에서 일탈이 주는 위협과 싸우고 때로는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 소외와 싸워야 하기도 한다.

 그 한 발자국을 확보할 수 있는 자를 나는 행복한 자라 생각한다. 그는 비록 한 발자국을 물러섰지만 그의 앞에는 몇 배나 더 넓은 영지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삶에는 이런 신비스런 장치가 있고 그런 것을 발견해 갈 수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깡마르고 얼굴이 검고 키 큰 6중대장의 그후의 삶에 나는 이런 행복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출처:  이수태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생각의 나무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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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 / 다비드 (1793)
 

목욕과 샤워


아침마다 베헤모트와 가네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물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몸집이 거대한 신화적인 두 후피동물의
성스러운 모습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욥기>에서 보게 되는 베헤모트에 대한 감격적인 묘사는
하마를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짐승은 버드나무 그늘로 덮인 늪지대에 숨어서 산다.
이 짐승은 연꽃과 갈대 사이에 잠겨 있다.
이 짐승은 요단강의 물이 코끝까지 올라와도
강의 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코끼리 형상의 신인 가네사는 코로 물을 뿌림으로써
몸을 씻고 열을 식힌다. 이런 행동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
항상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행동이다.
동물 중 가장 근면한 동물이라는 쥐도 근면성에 있어서는
코끼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활동이 꿈과 대조를 이루고,
샤워가 목욕과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가네사는 베헤모트와 대조를 이룬다.

당신은 목욕을 원하는가, 샤워를 원하는가?
이 양자택일의 성격학적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목욕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누운 자세를 택한 것이다.
당신은 향수를 뿌린 미지근하고 거품이 이는 물에서,
다시 말해 탁하든 불투명하든 그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꿈꾸듯 떠 있다. 당신은 눈을 감는다.
그러나 조심하라!
당신은 방어능력이 없고 모든 공격에 노출되어 공격받기 쉽다.
마라도 욕조에서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칼을 찔려 죽었다.
샤워기 아래였다면 그는 분명히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신은 퇴행(退行)의 상태로 있다.
당신은 양수에 떠 있는 태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욕조는 곧 포근하고 따뜻하고 보호해주는 곳.
즉 엄마의 배가 된다.
바닥의 딱딱하고 차가운 타일 위에 벌거벗은,
힘없는 상태로 던져지게 되는
가혹한 출생과도 같은 불안함 때문에
욕조에서 나오는 시련을 늦추려 한다.


이와 반대로 서서 샤워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하루의 일에
뛰어들기 위하여 맑은 물을 맞는다.
그는 근육통이 일어나기 직전의 운동선수처럼
부지런히 비누질을 하고, 손수 마사지를 한다.
깨끗한 신체는 자신을 기분좋게 한다.
그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샤워는
깨끗한 만년설에 흘러나오는 격류와
바위계곡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격류를 사용하는 것이다.
광천수의 광고는 힘차고 엄격한 이런 신화에서 많이 따온다.
이런 물을 마신다는 것,
그것은 인체의 내장을 샤워시키는 것이고,
인체에 일종의 내적인 세례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샤워할 때 흐르는 맑은 물은 세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모든 성화(聖化)에서 보듯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던 것은
목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샤워에 의해서이다.
죄지은 자는 흘러내리는 물 아래서
자기의 과오를 씻고 신체에 천부적인 순결을 되찾게 해준다.
샤워를 하는 사람은
도덕적 관념이 혼합된 의미에서의 청결이란 것이
뇌리를 떠나지 않지만 목욕하는 사람에게는
청결이란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누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샤워는 좌파에 속하고,
목욕은 우파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것이다.




출처: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미셸 투르니에, 한뜻 刊)

2004.5.17 (10:17) @싸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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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토머스 불핀치


미국이 산업혁명의 완성기에 이르러
각종 새로운 기계문명이 왕성한 발달을 보이던
1800년대 중반, 라틴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런 저런 사업을 시도하다 실패한 끝에
보스턴 머천트은행에 취직한 한 은행원이 있었다.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증기선과 증기기관차가 사람들과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고,
전신기와 윤전인쇄기 등이 실용화되어 소통이 신속해지고
소수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활자와 언어도 대중화되었다.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였고 '기술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모두 이 놀라운 번성을 찬양했다.
수용하고, 향유하고, 기꺼이 축복했다.

돈의 가치와 물질문명의 위력이 날로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은행원으로 일하던 이 사람은 누구보다
이러한 변화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기 은행의 업무형태와 업무내용이야
지금과 다른 면이 없지 않겠지만
매일 '돈'을 다루고 '돈'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 태풍의 눈에 자리했던 은행원은
자기 시대를 '실리적인 시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물질문명의 이기 속에 생활은 향상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점점 소멸되고 고갈되는 정신세계를 안타까워하며,
높은 정신성과 풍부한 인간성을 찾기 위해
잊혀진 옛이야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지금까지 고전으로 읽히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원작인 '전설의 시대'를 쓴
토머스 불핀치였다. 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원형을 그린
'그리스로마신화'를 를 읽으며
은행원 토머스 불핀치를 생각한다.
평생 은행원으로 살았던 사람,
생활을 위해 하루종일 돈을 세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홀로 신들의 세계에 몰입했던 사람,
죽기 직전까지 영웅과 현자에 관한 글을 쓰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사람.
그가 누렸던 달콤씁쓸한 고독이,
생활과 이상 사이의 갈등이 남의 것인 양 싶지 않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은행원이다.


김별아/소설가   

(출처: 매일경제신문, 200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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