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죽음 / 다비드 (1793)
목욕과 샤워
아침마다 베헤모트와 가네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물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몸집이 거대한 신화적인 두 후피동물의
성스러운 모습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욥기>에서 보게 되는 베헤모트에 대한 감격적인 묘사는
하마를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짐승은 버드나무 그늘로 덮인 늪지대에 숨어서 산다.
이 짐승은 연꽃과 갈대 사이에 잠겨 있다.
이 짐승은 요단강의 물이 코끝까지 올라와도
강의 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코끼리 형상의 신인 가네사는 코로 물을 뿌림으로써
몸을 씻고 열을 식힌다. 이런 행동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
항상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행동이다.
동물 중 가장 근면한 동물이라는 쥐도 근면성에 있어서는
코끼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활동이 꿈과 대조를 이루고,
샤워가 목욕과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가네사는 베헤모트와 대조를 이룬다.
당신은 목욕을 원하는가, 샤워를 원하는가?
이 양자택일의 성격학적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목욕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누운 자세를 택한 것이다.
당신은 향수를 뿌린 미지근하고 거품이 이는 물에서,
다시 말해 탁하든 불투명하든 그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꿈꾸듯 떠 있다. 당신은 눈을 감는다.
그러나 조심하라!
당신은 방어능력이 없고 모든 공격에 노출되어 공격받기 쉽다.
마라도 욕조에서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칼을 찔려 죽었다.
샤워기 아래였다면 그는 분명히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신은 퇴행(退行)의 상태로 있다.
당신은 양수에 떠 있는 태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욕조는 곧 포근하고 따뜻하고 보호해주는 곳.
즉 엄마의 배가 된다.
바닥의 딱딱하고 차가운 타일 위에 벌거벗은,
힘없는 상태로 던져지게 되는
가혹한 출생과도 같은 불안함 때문에
욕조에서 나오는 시련을 늦추려 한다.
이와 반대로 서서 샤워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하루의 일에
뛰어들기 위하여 맑은 물을 맞는다.
그는 근육통이 일어나기 직전의 운동선수처럼
부지런히 비누질을 하고, 손수 마사지를 한다.
깨끗한 신체는 자신을 기분좋게 한다.
그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샤워는
깨끗한 만년설에 흘러나오는 격류와
바위계곡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격류를 사용하는 것이다.
광천수의 광고는 힘차고 엄격한 이런 신화에서 많이 따온다.
이런 물을 마신다는 것,
그것은 인체의 내장을 샤워시키는 것이고,
인체에 일종의 내적인 세례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샤워할 때 흐르는 맑은 물은 세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모든 성화(聖化)에서 보듯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던 것은
목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샤워에 의해서이다.
죄지은 자는 흘러내리는 물 아래서
자기의 과오를 씻고 신체에 천부적인 순결을 되찾게 해준다.
샤워를 하는 사람은
도덕적 관념이 혼합된 의미에서의 청결이란 것이
뇌리를 떠나지 않지만 목욕하는 사람에게는
청결이란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누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샤워는 좌파에 속하고,
목욕은 우파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것이다.
출처: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미셸 투르니에, 한뜻 刊)
2004.5.17 (10:17) @싸이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