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토머스 불핀치
미국이 산업혁명의 완성기에 이르러
각종 새로운 기계문명이 왕성한 발달을 보이던
1800년대 중반, 라틴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런 저런 사업을 시도하다 실패한 끝에
보스턴 머천트은행에 취직한 한 은행원이 있었다.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증기선과 증기기관차가 사람들과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고,
전신기와 윤전인쇄기 등이 실용화되어 소통이 신속해지고
소수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활자와 언어도 대중화되었다.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였고 '기술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모두 이 놀라운 번성을 찬양했다.
수용하고, 향유하고, 기꺼이 축복했다.
돈의 가치와 물질문명의 위력이 날로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은행원으로 일하던 이 사람은 누구보다
이러한 변화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기 은행의 업무형태와 업무내용이야
지금과 다른 면이 없지 않겠지만
매일 '돈'을 다루고 '돈'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 태풍의 눈에 자리했던 은행원은
자기 시대를 '실리적인 시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물질문명의 이기 속에 생활은 향상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점점 소멸되고 고갈되는 정신세계를 안타까워하며,
높은 정신성과 풍부한 인간성을 찾기 위해
잊혀진 옛이야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지금까지 고전으로 읽히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원작인 '전설의 시대'를 쓴
토머스 불핀치였다. 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원형을 그린
'그리스로마신화'를 를 읽으며
은행원 토머스 불핀치를 생각한다.
평생 은행원으로 살았던 사람,
생활을 위해 하루종일 돈을 세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홀로 신들의 세계에 몰입했던 사람,
죽기 직전까지 영웅과 현자에 관한 글을 쓰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사람.
그가 누렸던 달콤씁쓸한 고독이,
생활과 이상 사이의 갈등이 남의 것인 양 싶지 않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은행원이다.
김별아/소설가
(출처: 매일경제신문, 2002.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