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사나이 - 새번역판 그리폰 북스 6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김선형 옮김 / 시공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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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어떤 이로부터 당신은 문체주의자 같아,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문체라는 것이 작가가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어떤 특정한 것을 취하는 방식, 즉 문체는 곧 의미의 用이다, 라는 이론에 기댄다 하더라도 그 말에 무덤덤하게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나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내가 절실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란이 여성의 심리를 섬세히 묘사하고 안정된 문장과 빼어난 문체를 지닌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한편 ‘일상 너머의 좀 더 커다란 세계에 대한 관심의 배제, 신경질적일 정도의 내면 지향, 서사의 부재와 탐미적 문체주의에의 몰입 등’의 한계를 지적받는 것과 같다. 세계와 서사의 부재는 분명 내가 넘어야 할 부분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사랑’이라는 비가시적이고 다분히 주관적인 체험과 한시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때라야만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자각 탓에 더욱 절망적이기도 하다.

앨프리드 베스터는 Pyrotechnic이라는 새롭고 감각적인 문체로 독자를 어리둥절 매혹한다.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함으로써, 비로소 언어는 생기를 되찾고 그것 자체로 활기를 지닌 채 독자와 소통한다. 역자인 김선형은 베스터의 이런 표현 방식을 ‘무의미한 언어 놀음’이라 부르며 ‘언어가 세련된 수사와 비유를 통한 고급한 사유의 매개일 때만 가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언어는 가지고 놀고, 즐기고, 뒤틀고, 또 리듬처럼 탈 수도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놀이’로써의 언어 사이에 매력적인 두 남성이 등장한다. 50년대 미국 문화에 단골로 등장하던 마초이즘이 베스터맨이라고 불리는 두 남성에게서도 발견된다. 마너크의 총수인 벤 라이히는 타락한 군주다. 그럼에도 그럴싸한 외모와 대담함과 지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불안함을 표출하는 것으로 독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라이히는 독심술사(에스퍼)들로 인해 폭력과 살인이 사라진 24세기에 살인을 도모하고 그것을 감행한다. 라이히를 추적하고 그와 팽팽한 심리전을 벌이는 에스퍼 경찰 링컨 파웰 또한 유머러스하고 지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행동으로 여성을 사로잡는 남성성(물론 이것은 글이 쓰여진 당시의 관점이다. 21세기에 마초이즘을 내포하는 남성이 환영 받을 리 없잖은가)을 지닌 인물이다.

추리 소설임에도 추리 소설적인 기법을 뒤엎고, 라이히가 살인을 음모하고 경쟁사의 총수를 살해하는 장면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런데도 전혀 흥미를 반감시키지 않고 독서를 몰고 가는 것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에서 파웰이 라이히를 추적하고 옭아매는 과정과 그 올가미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는 라이히의 행적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파웰이 살인의 의도라고 생각했던 것은 라이히의 기소를 좌절케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정작 살인은 ‘얼굴없는 사내’로 상징되는 라이히의 분열된 자아로 인해 파생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베스터는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을 차용한다. 하지만 다시 역자의 말을 빌어 ‘프로이트 심리학이 아무래도 너무 곧이곧대로, 직설적으로, 기계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따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더불어 거듭되는 재미와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결말 부분에서 심드렁해진 것은 ‘파괴’라 불리는 라이히의 종말이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 ‘갱생’이라는 점이다. 자아가 재구축되는 것이, 라이히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하고 새로운 범죄를 의도하게 하는 ‘두려움’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것 아닌가. 재미있게 읽었다만 책값이 너무 비싸다. 만천 원이나 하다니!

헌데, 끌어당기는 남자 보다 외면하는 남자에게 관심이 더 가는 것은 아직도 마초성에 대한 고전적 그리움이 잠재해 있다는 것일까. 아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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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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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독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 중의 하나가 연휴증후군이라고 한다. 연휴가 시작됨과 동시에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해서 급기야 병원 신세까지 질 정도였다가도, 그 지긋지긋한 연휴가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면 또다시 기운 찬 천하장사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소식통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연휴 때만 되면 아프다고 투덜대는 내게 자칭 만물박사이신 친구분께서 주절거리신 내용이니 말이다. 나처럼 틈만 나면 땡땡이 칠 요량보가 하나 더 붙으신 분께 workaholic이란 병명을 갖다 붙이다니 천만부당하다. 그렇긴 하더라도 지난 연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던 내게 정월 초하루부터 입술 양쪽에 물집이 잡히고 기면증에 시달리게 한 것은 가혹하다. 신이 죽은 건 확실하다.

백악관의 만찬 초대를 은사님 뵈러 간다는 이유로 불응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했던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소설’은 문학을 존재케 하는 구성원인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4인의 다각적 시각으로 진행된다. 그렌즐러 연작 시리즈 중 4부까지의 참패를 딛고 급기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작가 요더, 쓰레기 산의 일부가 되었을 지도 모를 요더의 원고를 구원하고 그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그를 후원한 편집자 이본 마벨, 냉철한 직관과 뛰어난 이성으로 비평가로서는 명망을 떨치지만 소설가로서는 참패한 비평가 스트라이버트, 진정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이해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독자 제인 갈런드, 4인의 시선은 제각각이지만 때로 중첩되기도 하고 첨예하게 엇갈리기도 하며 소설을 끌어간다.

‘지루하며 감상적이고’, ‘등장인물들은 생기가 없고’, ‘액션은 축 늘어지며 플롯은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스트라이버트의 혹독한 비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고전적 글쓰기에 전력을 다하는 요더는 자신이 탄생시킨 인물들과 별다를 것 없이 너무나 진부하고 평면적이다. 잠깐의 휴식으로는 최적이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지루하고 또 지루해서 돌멩이라도 하나 던져넣고 싶은 충동 일으키는 잔잔한 호수같다고나 할까. 반면에 스트라이버트는 현대소설의 인물상을 여실히 나타내는 매우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처럼 고양된 정신의 소유자가,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선생이자 은밀한 애인이기도 했던 데블런 교수의 죽음으로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고, 요더가 자신보다 먼저 그렌즐러 이야기에 착수한 것과 그보다 자신이 더 나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오만으로 요더에 대해 악감정을 품기도 하고, 자신의 수제자인 티모시가 제니 소이킨이라는 매력적인 여성과 사귀는 것을 알고 묘한 질투심으로 둘을 떼어놓기 위해 고뇌하기도 하는 등, 인간의 심리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성격을 제대로 형상화한다.

이본 마벨은 일에 있어서는 혀를 내두를 만큼 철두철미하고 주도면밀하며 활화산같이 열정적이고 냉철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덜 자란 아이같다. 번득이는 기지로 말은 잘하지만 사상을 언어로 형상화시키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베노와의 동거는 이본에게 있어 하나의 장애다. 사랑에 빠진 여성들은 왜 모두 백치가 되는 것일까. 대체 그들의 활기 넘치는 이념과 날카로운 직관과 경이로운 유머들은 어디 가고 비실거리는 굴종만 남게 되는 것일까. 베노가 삶을 포기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스트라이버트와 그의 선생인 데블런과의 대화는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수긍하고 싶지 않은 반감을 일으킨다. 소설은 유형적 인물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에 대해서 써야 한다는 것, 비평가와 작가의 의무란 사회와 반대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백 번 동의하지만 ‘진정한 예술이란 고양된 수준에서 동등한 사람들끼리 의사 소통하는 것’이라든가 일반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엘리트들을 위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식의 파시즘적인 사고 방식을 대하는 순간에는 번번이 심장이 딱딱하게 굳는다.

소설에 사회적 리얼리티가 살아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꼭! 문학작품이 사회참여적인 주제로 쓰여야 한다거나, 현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거나, 심오한 철학을 다루어야 한다거나, 개인의 감상이나 고전적인 취향에 대해 노래한 것들은 쓰레기일 뿐이라거나 하는 사고방식은 갓 쓴 양반처럼 고지식하고 편협하여 지양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미처 가치관이 정립되지도 않은 이들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파시즘을 재생산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누군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글을 보내온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평을 요구해 온다면 나는 말해줄 테다.
- 예, 나는 그것을 읽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감상입니다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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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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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기억을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기억이 장소에 있게 하는 것일까.

발렌타인데이도 그냥 넘겼으니 밥이나 사라는 전화를 받았다. 밥 사라는 것은 내 전용 대사이며 내가 녀석에게 발렌타인데이 운운해도 좋을 역할을 맡긴 것도 아닌데, 미심쩍고 개운찮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가 고팠고 길어지는 통화가 지루했으므로 그러마 했다. 나는 대부분 상점 이름을 기억하기 보다는 그곳의 위치만 기억하고 찾아가는 편이다. 하여 구구절절 위치를 설명한 뒤 덧붙여 “아무튼 한 글자로 된 음식점이야. 빼어날 수 아니면 향기 향 정도 되겠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결국 둘 다 아니었음에도 둘 다 잘 찾아간 걸 보면 이름 따위는 우리 생에서 그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게 아닌가 보았다.

그곳이 그를 불렀다. 불현듯 난 그가 그리워졌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했다. 여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해본 적이 없다. 그가 머물게 될 낯선 도시와 돛단배와 감빛 하늘과 나직하게 흩뿌리는 고동 소리와 진귀한 식물들과 자유를 위한 머나먼 여정,들까지도 단숨에 그리워졌다. 내 눈빛은 잠시 스산해졌을 터였고, 허나 녀석은 뜬금없이 여권 갱신해 둬라 한다. 어제 은행 직원은 주민등록증 재발급 받으라 했지 참. 나는 이러한 증서들로 구명되는 존재다. 증서 없이는, 나는 나이지만 결국 내가 아니다. 쓸쓸하고 슬픈 저녁이다.

신춘문예나 문학상에 대해 신뢰하지 않은 지 오래이므로 무슨 무슨 문학상 작품집에 무게를 실어 읽지 않는다. 중학교 때 이상을 애지중지했기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그래도 애정이 가지만 애정을 두는 만큼 씁쓸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올해 대상 수상작은 김훈의 <화장>이다. 김훈의 <풍경과 상처>, <칼의 노래>를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으므로 달갑다. 하지만 읽어갈 수록 고개가 외로 꼬아진다. 나는 이제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인가 회의하며, 읽다 말고 슬쩍 뒤로 돌려 총평을 본다.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그려낸 대작이라고? 보기 드물게 유려한 문장이라?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기법으로 그려낸다? 잘 모르겠다. 역시 잘 모르겠다. 대상작인 <화장>외에 다른 작품들도 무릎 탁 치게 만들지는 못 한다.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는 ‘세련된 문체와 상징으로 독자를 매료케 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림자 아이>를 읽으며 나를 매료한 건 ‘잠’이다. 자다 졸다 하며 읽어서 따분했는지 따분해서 자다 졸다 했는지 모르겠다. 금년 작품들의 총평을 대충 훑자니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형태, 참신한 신개념, 색다른 서사기법 등 ‘새롭다’ 라는 것에 후한 점수를 매긴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이제 나는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새로운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는 나도 좀 신선하네,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대체로 쓰잘데기 없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잘 되는 편이라 책 한 권을 읽으며 마음의 욱신거림을 수 십 번씩 경험하곤 하는데 수상작품들을 읽으면서는 글쎄,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에서 한두어 번 정도? 나는 이제 정말로!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일까? 심사평을 잘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꼼꼼히 살펴 읽어 보아야겠다. 불끈!

갑자기 으스스 춥다. 따뜻한 나라로 이사 가고 시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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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4-12-0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찾아 들어왔더니, 하하, 역시 마녀물고기님 글이 탑에 올라와 있네요. 나 참... "무엇이 그토록 새로운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는 말에 절대 공감할 거 같아서 안 읽을라구요 ㅋㅋ

 
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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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오늘 황사다. 바람이 거세어 단도리한 마음의 숨은 구석에게까지 자, 날아보자 보채고 누렇게 들뜬 대기는 자꾸만 어룽거려 자주 눈 비비며 소매춤에 눈물 만든다. 황사라는 낱말이 나는 애틋하다. 황사는 그리워 죽게 만든다. 흙바람 속에서 나는 무기력하며 어미의 자궁 속 태아처럼 나약하다. 죽음을 외면하며 간신히 간신히 허청이며 버틴 하루였는데 젠장 L양까지 속을 뒤집는다. 그로 인한 웅성거림의 와중에 ‘소통불가’라고 되뇌었고, 그러자 벽이 생각났다. 그리고 벽을 떠올리자 오늘 읽기를 마친 ‘우연의 음악’이 따라왔다. 벽 쌓기로 시작된 나쉬의 갇힘은 결국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지도 모를 일.

우연의 음악, 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이용한 음악의 아방가르드 현상이기도 하다. 곡을 만들거나 연주를 함에 있어서 작곡가의 의도를 배제하고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지는 식의 우연적 요소를 도입한다는 것인데,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이러한 방법(얼핏 우스꽝스러운 장난 같아 보이는)이 유럽의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예술은, 예술가는 참으로 재미있는 존재들이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한다. 글을 쓸 때도 주사위를 던져서 글자와 어휘, 문장의 배열을 선택하고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해체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다 이 바보들아, 한다면 무척 재미있겠다고.

각설하고, 난 폴 오스터가 좋다. 잘 생겨서 좋다. 그의 짙은 눈썹과 날 선 코와 맹렬한 눈빛이 더없이 좋다. 게다가 재기 넘치는 지성과 심오한 직관의 소유자란다. 심오한, 까지는 모르겠지만 지성적인 것은 인정한다.

나쉬는 아버지가 죽자 졸지에 돈벼락을 맞게 된다. 그러나 살아 생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이는 죽어서도 마찬가지인지, 아내는 떠나고 딸은 누이집에 맡긴 후에 떨어진 돈벼락이 나쉬에게 달가울 리가 없다. 소방관 일을 때려치우고 돈다발을 흘려보내기 위해 무작정 도로로 나선 나쉬에게 미래는 불확실하다.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것 속에서 나쉬가 선택한 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다. 주사위 하나로 음악은 불협화음이 될 수도, 아름다운 선율이 될 수도 있다. 나쉬는 길에서 만난 노름꾼 포지에게 자신의 남은 전 재산을 건다. 그것이 둘에게 유대감을 형성하게 하지만 결국 감금, 의심, 강박관념, 파멸의 계기가 된다. 인생은 여전히 도박과 같은 것일까. 어떤 패를 쥐었느냐에 따라, 상대의 표정을 얼마나 잘 읽느냐에 따라, 얼마나 감쪽같이 나를 감추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 인생인 것일까.

교묘한 술책과 선동과 협박과 회유,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스스로 벽을 쌓는 일이다. 스스로를 세상과 차단하는 행위는 비겁하고 졸렬하지만 그로 인해 내 안의 안식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나쉬는 벽 쌓기라는 강제 노역을 통해 비로소 안정을 얻고 성취감을 맛 본다.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의심스러운 술수와 매순간 타협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나쉬의 완전한 해방은 죽음과 타협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폴 오스터의 소설은 헐리우드적이다. 다분히 서사적이고 가끔은 황당하며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총출동한다. 하지만 오스터의 소설은 진지하다. 이야기 중간 중간 놓여진 장치들은 허투로 된 것 하나 없이 뒷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계되며 얄미울 정도로 치밀하다. 그리고 그의 얼굴만큼이나 날카롭고 지적이다. 매끄럽고 화사한 이야기의 전개 방식 뒤에 쓸쓸하게 웃고 있는 인간의 무력함 또한 매력적이고.

음, 무지막지 미진한 감상문이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이 온통 지뢰밭이므로 오늘은 여기까지, 황사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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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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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백 년 전, 내가 즐겨보던 만화는 캔디와 마징가제트였다. 대충 나는 안소니보다는 테리우스 편이었는데 장미 정원의 왕자인 안소니가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것에 비해 테리우스에게는 포근함과 매정함이, 우울과 경쾌가, 평온과 광기가 뒤죽박죽되어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탓이다. 캔디를 볼 때마다 얼마나 전율했던가. 육체를 관통하며 팽창하던 슬픔과 차오르는 먹먹함을 난 또 얼마나 사랑했던가.

인도의 신 중 하나인 ‘아수라’는 아내를 희롱하던 인드라를 복수에 대한 일념 하나로 광적으로 좇게 되는데, 이 때문에 아수라는 원래의 선함과 인드라로 인해 갖게 된 악함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인도의 신 아수라를 차용하여 만든 캐릭터가 마징가제트의 아수라백작이 아닐까. 한쪽은 여성 다른 한쪽은 남성, 두 개의 성을 한몸에 지닌 아수라백작에게서 물론 善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철저한 관객의 입장으로 하나의 인물 속에서 이중적인 면모를 발견하던 것이 백 년 전이라면,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내 안에 살고 있는 둘, 또는 셋, 아니 그보다 많은 숫자의 전혀 다른 나‘들’을 발견한다. 물기 담은 애잔한 목소리로 정말 정말 행복해야 해, 읊조리다가 어느 순간 돌변하여 차라리 죽어버려, 지옥에나 가 버려!를 외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지만 말이다.

아합이 사뱅에게 전도되어 탐욕과 살인과 저주가 사라진 후 고여 있는 물 같던 베스코스에 작은 파동이 감지된다. 젊은이는 모두 떠나고 느린 걸음과 일과 후의 그렇고 그런 수다들로만 채워진 작은 마을의 샹탈 프랭은, 가끔 이곳을 스치는 이방인들과 몸을 섞으며 ‘그녀가 익숙해져 있는 그 모든 결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누군가를 기다린다. 꿈이 많았던 만큼 악마의 제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녀는 선과 악 사이에 놓여진 번민을 마을 주민들에게 양도하고 작은 마을이 서서히 검은 날개 밑에 잠식되는 것을 방관한다. 하지만 샹탈은 번사의 제물로 선택된, ‘사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 날마다 주변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뿐이라는 베르타를 외면할 수 없다.

코엘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찾은 예수와 유다의 모델이 결국 동일인이었다는 일화를 삽입하며 선과 악은 한 배에서 나온 쌍생아일 뿐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가득 찬 선과 악을 양손에 나누어 쥐고,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실처럼 가는 다리를 걷게 되는데 어느 것의 무게가 많이 나가느냐에 따라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현대의 거대 메커니즘인 부와 권력이 개입된다. 그것의 역동성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코엘료는 그것으로 인한 선과 악의 대립에서 선이 승리를 거두게 함으로써 ‘현대의 우화’를 탄생시킨다. 그래서 난 조금 속상하다. 피의 만찬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악으로 대변되는 이방인은 결말 부분에서 너무 무기력하고 갈등의 변주였던 프랭은 자신이 희망했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니 말이다. 그럭저럭 재미는 있지만 빼어나지는 않고, 하드커버의 압박은 여전히 심하다. 페이퍼백이면 왜 안 되는가 말이야, 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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