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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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기억을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기억이 장소에 있게 하는 것일까.

발렌타인데이도 그냥 넘겼으니 밥이나 사라는 전화를 받았다. 밥 사라는 것은 내 전용 대사이며 내가 녀석에게 발렌타인데이 운운해도 좋을 역할을 맡긴 것도 아닌데, 미심쩍고 개운찮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가 고팠고 길어지는 통화가 지루했으므로 그러마 했다. 나는 대부분 상점 이름을 기억하기 보다는 그곳의 위치만 기억하고 찾아가는 편이다. 하여 구구절절 위치를 설명한 뒤 덧붙여 “아무튼 한 글자로 된 음식점이야. 빼어날 수 아니면 향기 향 정도 되겠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결국 둘 다 아니었음에도 둘 다 잘 찾아간 걸 보면 이름 따위는 우리 생에서 그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게 아닌가 보았다.

그곳이 그를 불렀다. 불현듯 난 그가 그리워졌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했다. 여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해본 적이 없다. 그가 머물게 될 낯선 도시와 돛단배와 감빛 하늘과 나직하게 흩뿌리는 고동 소리와 진귀한 식물들과 자유를 위한 머나먼 여정,들까지도 단숨에 그리워졌다. 내 눈빛은 잠시 스산해졌을 터였고, 허나 녀석은 뜬금없이 여권 갱신해 둬라 한다. 어제 은행 직원은 주민등록증 재발급 받으라 했지 참. 나는 이러한 증서들로 구명되는 존재다. 증서 없이는, 나는 나이지만 결국 내가 아니다. 쓸쓸하고 슬픈 저녁이다.

신춘문예나 문학상에 대해 신뢰하지 않은 지 오래이므로 무슨 무슨 문학상 작품집에 무게를 실어 읽지 않는다. 중학교 때 이상을 애지중지했기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그래도 애정이 가지만 애정을 두는 만큼 씁쓸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올해 대상 수상작은 김훈의 <화장>이다. 김훈의 <풍경과 상처>, <칼의 노래>를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으므로 달갑다. 하지만 읽어갈 수록 고개가 외로 꼬아진다. 나는 이제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인가 회의하며, 읽다 말고 슬쩍 뒤로 돌려 총평을 본다.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그려낸 대작이라고? 보기 드물게 유려한 문장이라?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기법으로 그려낸다? 잘 모르겠다. 역시 잘 모르겠다. 대상작인 <화장>외에 다른 작품들도 무릎 탁 치게 만들지는 못 한다.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는 ‘세련된 문체와 상징으로 독자를 매료케 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림자 아이>를 읽으며 나를 매료한 건 ‘잠’이다. 자다 졸다 하며 읽어서 따분했는지 따분해서 자다 졸다 했는지 모르겠다. 금년 작품들의 총평을 대충 훑자니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형태, 참신한 신개념, 색다른 서사기법 등 ‘새롭다’ 라는 것에 후한 점수를 매긴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이제 나는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새로운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는 나도 좀 신선하네,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대체로 쓰잘데기 없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잘 되는 편이라 책 한 권을 읽으며 마음의 욱신거림을 수 십 번씩 경험하곤 하는데 수상작품들을 읽으면서는 글쎄,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에서 한두어 번 정도? 나는 이제 정말로!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일까? 심사평을 잘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꼼꼼히 살펴 읽어 보아야겠다. 불끈!

갑자기 으스스 춥다. 따뜻한 나라로 이사 가고 시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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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4-12-0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찾아 들어왔더니, 하하, 역시 마녀물고기님 글이 탑에 올라와 있네요. 나 참... "무엇이 그토록 새로운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는 말에 절대 공감할 거 같아서 안 읽을라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