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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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백 년 전, 내가 즐겨보던 만화는 캔디와 마징가제트였다. 대충 나는 안소니보다는 테리우스 편이었는데 장미 정원의 왕자인 안소니가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것에 비해 테리우스에게는 포근함과 매정함이, 우울과 경쾌가, 평온과 광기가 뒤죽박죽되어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탓이다. 캔디를 볼 때마다 얼마나 전율했던가. 육체를 관통하며 팽창하던 슬픔과 차오르는 먹먹함을 난 또 얼마나 사랑했던가.

인도의 신 중 하나인 ‘아수라’는 아내를 희롱하던 인드라를 복수에 대한 일념 하나로 광적으로 좇게 되는데, 이 때문에 아수라는 원래의 선함과 인드라로 인해 갖게 된 악함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인도의 신 아수라를 차용하여 만든 캐릭터가 마징가제트의 아수라백작이 아닐까. 한쪽은 여성 다른 한쪽은 남성, 두 개의 성을 한몸에 지닌 아수라백작에게서 물론 善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철저한 관객의 입장으로 하나의 인물 속에서 이중적인 면모를 발견하던 것이 백 년 전이라면,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내 안에 살고 있는 둘, 또는 셋, 아니 그보다 많은 숫자의 전혀 다른 나‘들’을 발견한다. 물기 담은 애잔한 목소리로 정말 정말 행복해야 해, 읊조리다가 어느 순간 돌변하여 차라리 죽어버려, 지옥에나 가 버려!를 외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지만 말이다.

아합이 사뱅에게 전도되어 탐욕과 살인과 저주가 사라진 후 고여 있는 물 같던 베스코스에 작은 파동이 감지된다. 젊은이는 모두 떠나고 느린 걸음과 일과 후의 그렇고 그런 수다들로만 채워진 작은 마을의 샹탈 프랭은, 가끔 이곳을 스치는 이방인들과 몸을 섞으며 ‘그녀가 익숙해져 있는 그 모든 결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누군가를 기다린다. 꿈이 많았던 만큼 악마의 제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녀는 선과 악 사이에 놓여진 번민을 마을 주민들에게 양도하고 작은 마을이 서서히 검은 날개 밑에 잠식되는 것을 방관한다. 하지만 샹탈은 번사의 제물로 선택된, ‘사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 날마다 주변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뿐이라는 베르타를 외면할 수 없다.

코엘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찾은 예수와 유다의 모델이 결국 동일인이었다는 일화를 삽입하며 선과 악은 한 배에서 나온 쌍생아일 뿐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가득 찬 선과 악을 양손에 나누어 쥐고,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실처럼 가는 다리를 걷게 되는데 어느 것의 무게가 많이 나가느냐에 따라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현대의 거대 메커니즘인 부와 권력이 개입된다. 그것의 역동성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코엘료는 그것으로 인한 선과 악의 대립에서 선이 승리를 거두게 함으로써 ‘현대의 우화’를 탄생시킨다. 그래서 난 조금 속상하다. 피의 만찬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악으로 대변되는 이방인은 결말 부분에서 너무 무기력하고 갈등의 변주였던 프랭은 자신이 희망했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니 말이다. 그럭저럭 재미는 있지만 빼어나지는 않고, 하드커버의 압박은 여전히 심하다. 페이퍼백이면 왜 안 되는가 말이야, 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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