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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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울은 오늘 황사다. 바람이 거세어 단도리한 마음의 숨은 구석에게까지 자, 날아보자 보채고 누렇게 들뜬 대기는 자꾸만 어룽거려 자주 눈 비비며 소매춤에 눈물 만든다. 황사라는 낱말이 나는 애틋하다. 황사는 그리워 죽게 만든다. 흙바람 속에서 나는 무기력하며 어미의 자궁 속 태아처럼 나약하다. 죽음을 외면하며 간신히 간신히 허청이며 버틴 하루였는데 젠장 L양까지 속을 뒤집는다. 그로 인한 웅성거림의 와중에 ‘소통불가’라고 되뇌었고, 그러자 벽이 생각났다. 그리고 벽을 떠올리자 오늘 읽기를 마친 ‘우연의 음악’이 따라왔다. 벽 쌓기로 시작된 나쉬의 갇힘은 결국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지도 모를 일.

우연의 음악, 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이용한 음악의 아방가르드 현상이기도 하다. 곡을 만들거나 연주를 함에 있어서 작곡가의 의도를 배제하고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지는 식의 우연적 요소를 도입한다는 것인데,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이러한 방법(얼핏 우스꽝스러운 장난 같아 보이는)이 유럽의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예술은, 예술가는 참으로 재미있는 존재들이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한다. 글을 쓸 때도 주사위를 던져서 글자와 어휘, 문장의 배열을 선택하고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해체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다 이 바보들아, 한다면 무척 재미있겠다고.

각설하고, 난 폴 오스터가 좋다. 잘 생겨서 좋다. 그의 짙은 눈썹과 날 선 코와 맹렬한 눈빛이 더없이 좋다. 게다가 재기 넘치는 지성과 심오한 직관의 소유자란다. 심오한, 까지는 모르겠지만 지성적인 것은 인정한다.

나쉬는 아버지가 죽자 졸지에 돈벼락을 맞게 된다. 그러나 살아 생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이는 죽어서도 마찬가지인지, 아내는 떠나고 딸은 누이집에 맡긴 후에 떨어진 돈벼락이 나쉬에게 달가울 리가 없다. 소방관 일을 때려치우고 돈다발을 흘려보내기 위해 무작정 도로로 나선 나쉬에게 미래는 불확실하다.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것 속에서 나쉬가 선택한 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다. 주사위 하나로 음악은 불협화음이 될 수도, 아름다운 선율이 될 수도 있다. 나쉬는 길에서 만난 노름꾼 포지에게 자신의 남은 전 재산을 건다. 그것이 둘에게 유대감을 형성하게 하지만 결국 감금, 의심, 강박관념, 파멸의 계기가 된다. 인생은 여전히 도박과 같은 것일까. 어떤 패를 쥐었느냐에 따라, 상대의 표정을 얼마나 잘 읽느냐에 따라, 얼마나 감쪽같이 나를 감추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 인생인 것일까.

교묘한 술책과 선동과 협박과 회유,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스스로 벽을 쌓는 일이다. 스스로를 세상과 차단하는 행위는 비겁하고 졸렬하지만 그로 인해 내 안의 안식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나쉬는 벽 쌓기라는 강제 노역을 통해 비로소 안정을 얻고 성취감을 맛 본다.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의심스러운 술수와 매순간 타협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나쉬의 완전한 해방은 죽음과 타협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폴 오스터의 소설은 헐리우드적이다. 다분히 서사적이고 가끔은 황당하며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총출동한다. 하지만 오스터의 소설은 진지하다. 이야기 중간 중간 놓여진 장치들은 허투로 된 것 하나 없이 뒷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계되며 얄미울 정도로 치밀하다. 그리고 그의 얼굴만큼이나 날카롭고 지적이다. 매끄럽고 화사한 이야기의 전개 방식 뒤에 쓸쓸하게 웃고 있는 인간의 무력함 또한 매력적이고.

음, 무지막지 미진한 감상문이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이 온통 지뢰밭이므로 오늘은 여기까지, 황사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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