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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종말시계 - '포브스' 수석기자가 전격 공개하는 21세기 충격 리포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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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류는 석유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현대 문명을 일구어 왔다. 지식 정보화 시대지만 여전히 현재 인간의 삶은 알게 모르게 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림을 꾸려간다. ‘악마의 눈물’이라고도 말하는 석유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겼고 지난 1세기 반 동안 ‘검은 황금’에 눈이 멀었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지구가 스스로 정화하지 못할 만큼 오염 물질을 배출했다. 이젠 지구의 운명마저 위태로워졌다. 지구 생명체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포브스>지 수석 보도기자로 활동 중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는『석유종말시계』에서 화석에너지 시대가 저무는 21세기 미래생활을 가상으로 그려낸다. 앞으로 최소 10~20년 내에 유가가 1갤런 당 2달러씩 점차 상승하면서 -어림잡아 1갤런을 4리터로, 1달러를 1,200원 정도로 환산해 볼 때, 1리터당 600원씩 상승하는 상황- 인류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에너지 위기상황을 가정하여 미래상황을 묘사한다.

 

저자는 유가가 앞으로 오르면 올랐지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석유 생산량이 정점에 이르렀고 인도, 중국 등의 경제 성장과 맞물려 석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기존 석유 기반시설의 노후와 석유 생산비용마저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뒤 저자가 프롤로그에 밝힌 대로 유가 인상에 따른 실질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사고 실험을 펼친다. 유가 상승은 앞으로는 지금처럼 살 수 없다고 인류에게 변모를 꾀하라고 압박할 것이라 말한다. 의식주는 물론이요 가족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변화는 전방위에 걸쳐 일어난다. 때론 건강한 생활을 누리는 등 좋은 변화도 있지만 항공 산업이 사라지는 등 충격적 변화도 보게 된단다.

 

하지만 저자가 그려본 석유 이후 시대 모습 중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몇 가지 간과한 부분도 있다. 먼저 차세대 전력망 체계로 주목받는 ‘스마트 그리드’ 기술업체로 유태인 출신이 설립한 기업 ‘베터 플레이스’를 부각한 점은 의아스럽다. 저자의 성(姓)으로 짐작컨대 유태인이기에 유독 관심을 둔 것은 아닌지. 다음으로 송도 신도시를 미래 도시의 본보기로 언급한 점은 미국 기업이 참여했기 때문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생태도시의 대명사로 알려진 브라질의 ‘꾸리찌바’와 같은 도시가 세계 곳곳에서 현재 진행 중인데도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시각에서 미래 사회를 조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석유 이후 원자력이 에너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는 전망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호언장담해도 방사능 폐기물 문제는 언젠가 지구와 인류 생존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오히려 21세기 신에너지 자원으로 주목받는 하이드레이트(Hydrate)에 대해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기술적 한계 탓에 아직은 대량생산을 할 수 없지만 매장량은 200~500년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석유와 달리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적다는 점에서 녹색에너지 시대에 도달하기 전까지 대체 에너지로 손색이 없다고 한다.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일본이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는 이유로 독도 밑 바다에 매장된 하이드레이트와 관련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지구촌에서 맏형 격인 미국이 기후변화 협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점은 비판해야 했다. 유가가 상승하면 자연히 소비가 줄고 환경도 좋아진다는 식으로 장밋빛 전망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언론사 기자로서 지켜야할 사회적 책무에 소홀한 것이다.

 

미래 사회는 효율이 높고 공해가 없는 에너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산업 폐열을 재활용하는 등 절약정신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생존을 위한 보편윤리로 자리 잡을 것이다. 전기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기 트럭, 전철 등 청정에너지 생활은 널리 뿌리를 내릴 것이다. 결국 인류는 자연에서 얻어 자연에 아무 탈 없이 다시 돌려주는 녹색에너지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구를 환경으로 여겨 인간이 개발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이제는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생태지혜, 이른바 ‘에코지능’을 길러야 할 때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지구라는 생명체가 인간과 공감하고 공생하도록 일깨우는 생태교육도 필요한 시점이다. 바야흐로 ‘녹색 혁명’이 요구되는 시점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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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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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착하디 착한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흔히들 또 말한다. 악하디 악한 사람과 부딪히면 그래, 법대로 하자고. 도대체 법이 무엇이기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것일까? 우리 일상에서 헌법을 이야깃거리로 삼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지금껏 살면서 헌법 전문(全文)을 온전히 읽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헌법 재판소에서 벌어지는 정치쇼(?)를 자주 보아왔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 대통령 탄핵 재판, 언론법 절차 문제 등 우리 사회의 갈등을 최종으로 판가름 짓는 곳이 헌법 재판소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헌법 제 1조가 노래에 담겨져 불렸다. 바람결에라도 들으면서 민주공화국과 주권의 의미를 스스로 물었다.

자연스레 ‘헌법을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중심에 놓으려는 입장’(39쪽), 즉 헌정주의를 심각히 성찰해 봐야할 시기다. 법학자로서 저자는 헌정주의의 역사를 되짚으며 표상정치를 극복하려는 세련된 기획으로서 헌정주의를 이야기한다. ‘정치를 필요로 하는 사태에 대하여 표상의 형태로 정치를 제공하는’(21쪽) 표상정치는 두 얼굴을 지닌다. 표상정치는 많이 먹으면 죽지만 적당히 먹으면 건강해지는 투구꽃을 닮았다. 동일성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표상정치는 표상에서 배제되어 주변부에 머무는 경우가 발생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기에 완전한 정치 형태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표상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헌정주의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동서양에서 펼쳐졌던 고전적 헌정주의를 검토한 후 그 한계를 지적한다. 그런 뒤 16세기 서양에서 벌어진 종교혁명을 계기로 이루어진 헌정주의의 근대적 혁신을 톺아본다. 자연권, 사회계약, 의회주의, 법의 지배 등 근대 헌정주의에 내재한 혁신의 논리들이, 헌법에 주권을 명시하는 결과를 낳는 과정을 면밀히 살핀다. 그리고서 자유와 민주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 헌정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검토하면서 20세기 후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팽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를 언급한다. 

이처럼 표상정치와 헌정주의의 관계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조명하면서 저자는 ‘우리가 헌법의 본질을 묻게 되는 것은 권력의 정당성을 ‘깊이’ 문제 삼으려는 맥락’(19쪽)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들의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해지면서 불만이 점차 쌓여갔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헌법의 주어 찾기’는 시의적절하다. 결국 헌정 권력은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아우르는 것이기에 삶의 다원성을 바탕으로 한 다차원의 지역화된 민주적 자치 구조, 즉 표상정치의 단위를 여러 단위로 복수로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헌법 정치의 패러다임을 준수에서 정상화로 전환하는 일인 것이다. 결국 자유와 민주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접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동일성의 정치가 아닌 ‘차이의 정치’를 실현하는 일인 셈이다.

책의 분량은 비록 적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녹록지만은 않다. 헌정주의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자유민주주의를 밑거름으로 한 우리 시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동아시아, 특히 조선의 성리학적 헌정주의를 검토한 이후에는 서구 근대 헌정주의에만 치중하여 살펴본다. 동서양의 비교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문고판 총서에 이를 다 담아내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아쉬움은『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김욱, 인물과사상사)나 『중국 법률사상사』(장국화, 아카넷)로 달래야겠다.

헌정주의의 개념사를 훑어보고 나니 공화주의가 궁금해진다. 골치 아프게 익힌 만큼 머리가 야들야들할 때 공화주의에 대한 공부로 옮아가야겠다. 최근 공화주의를 다룬 국내 저자의 저서들이 몇 권 출간되었다. 이 책과 같은 총서에 속한『공화주의』(김경희, 책세상)와 최근 출간된『공화국을 위하여』(조승래, 길)를 읽는다면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담긴 의미를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성숙을 바란다면 골치 아픈(?) 공부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싶다. 우리 후손에게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물려주려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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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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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신비하고 경이롭다.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남자든 여자든 늘 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이를 기르면서 육아 문제로 티격태격 싸우다보면 어느새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체험을 잊고 살아간다. 일상생활에 치이다보니 작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잊어간다. 

자연도 신비하고 경이롭기는 마찬가지다. 겨우내 헐벗은 나무도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운다. 새들도 나뭇가지 하나씩 주둥이로 물어다가 튼튼하고 따듯한 둥지를 틀며 새 생명을 낳고 키운다.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초고층 건물에 견주어 봐도 새 둥지는 정교함이 뒤처지지 않는다. 세상 곳곳이 경이로 가득차 있다.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 어릴 적 꿈꾸던 광선검이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아직은 실현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우리 두 눈으로 볼 날도 머지않았다. 곧 3D TV도 보급되어 널리 쓰이게 될 터이니 또 한 번의 영상혁명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냄새도 느낄 수 있는 TV도 우리 안방을 차지하게 될 터이다. 1980년 흑백영상에서 다채로운 색깔을 담은 영상으로 변모한 컬러 TV를 체험한 유년시절을 떠올려 보더라도 지금 우리 시대는 가히 혁명적인 기술문명을 이루어내고 있다. 요즘 다들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로 TV는 물론 무선 인터넷까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자연과 생명이 펼치는 신비와 경이를 과학이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진화과학이 오만과 독선에 가까운 태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가정하에서 세계를 해석’(7쪽)했기 때문에 이러한 신비와 경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을 바탕으로 하는 다윈을 위시한 진화과학자들은 인류가 직립하여 두뇌의 역량을 키우고 언어를 사용하는 등 ‘인류의 발달에 대한 수수께끼’를 다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신유전학과 신경과학은 유전자와 두뇌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지만 정작 의식, 자유의지, 기억, 이성과 상상력, 자아와 같은 비물질적인 세계를 규명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 혹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진화과학은 물질과 비물질의 이중세계, 육체와 정신의 이중성을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즉, 유물론 측면에서 바라보는 진화과학은 생물의 생명형성력과 인간의 영혼까지 밝힐 수 있다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주로 리처드 도킨스, 대니엘 데넷, 에드워드 윌슨과 같은 학자들이 극단적으로 물질주의나 환원론을 추구하면서 영혼과 정신 같은 비물질의 실체마저 규명하려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유물론이나 물질주의를 벗어날 때만이 비로소 생명과 인간의 신비를 제대로 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과학계에서 리처드 도킨스과 같이 다윈의 논의를 극단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진화과학 강경파를 겨냥한 비판은 동의하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이 다윈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진화과학 온건파가 내놓은 논의마저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다는 판단으로 오해할 듯 하기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진화과학자들이 '인간 생명에 대한 경이감조차 느끼지 못한다'(7쪽)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도 "우리는 너무나 아르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것은 마을 유일의 게임, 지상 최대의 쇼다."(『지상 최대의 쇼』, 김영사 : 565쪽)라고 생명에 대한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음을 외면하고 있다. 어차피 자연과학은 유물론 혹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다윈 혁명이라고 말할 만큼 진화과학은 인류와 생명의 신비를 풀어내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다윈이 발표한 진화론은 한계가 분명히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고 연구들로 최근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도 등장하는 상황이다. 다윈을 완전히 폐기해야 하는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라며 진화 회의론에 빠져 지적 설계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자세는 옳지 않다.

끝으로 번역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번역자는 게놈과 유전체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게놈을 유전체로 번역하고자 한 점은 높이 사지만 그 취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양육(nuture)과 짝을 이루어 말하는 ‘자연(nature)’(261쪽)은 ‘본성’으로, ‘실재(reality)’는 ‘실체’로 번역해야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패러다임 변화’(350쪽)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또 파운드와 같은 화폐단위는 가급적이면 우리가 쓰는 원화로 표기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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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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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 <임제록>
 

지난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역리(逆理)’를 몸소 실천하셨다.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세인(世人)으로서 참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겹게 깨치는 진실은, 마음에 깊이 새기는 말들은 늘 역설(逆說)을 품고 있다는 것. 버려야 얻고 잃어야 알며 앓아야 깨닫는다.

 

밥도 허겁지겁 먹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자면서까지 남보다 앞서려고 기를 쓰며 사는 우리들. 연봉과 지위를 자기의 참모습으로 여기며 나보다 못하면 깔보고 나보다 잘나면 굽실댄다. 속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채 누군가 자신의 흠을 지적하기라도 하면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라고 속으로 악다구니를 부린다. 살수록 마음에 때를 묻히고 또 묻힌다.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닦고 또 닦지 않으면 때가 켜켜이 쌓인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려면 닦고 또 닦을 수밖에 없다.

 

리영희는 가르치기보다는 가리킨 스승이다. 우리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며 딱 꼬집어 말해야 알아듣는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좀체 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정호승, <洗足式을 위하여> 중에서). 한평생 우상과 싸우면서 한쪽 면만 바라보았던 우리들에게 다른 쪽도 있다고 일러주었다. 우상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우상을 숭배하는, 아둔한 우리들. 돈을 우상으로 만들어 물신(物神)으로 숭배하는 우리들. 돈이면 다 된다며 관직도 자격증도 학위도 사고판다. 그런 우리들이 리영희를 만나면 죽비로 사정없이 얻어맞는다. 정작 당신은 내리친 적이 없다 하겠지만 들리지 않는 죽비 소리 덕에 우리도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살육의 시대가 아닐까. 그 후유증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분단의 오늘을 살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냉전체제를 공고히 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고 있진 않은가. 이렇게 사유하도록 일깨웠기에 리영희는 ‘항법사’다. 역사의 세찬 물결에 휩쓸리면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길을 잃게 마련이다. 표류하는 줄도 모른 채 잘 가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주는 사람들 속에서 어디를 어떻게 가야하는지 몸소 보여 주었으니 항법사가 아닌가. “전쟁은 본디 ‘제국’의 프로젝트이며, 제국의 중요한 정책”(60쪽)이기에 제국은 제 시장을 넓히려고 전쟁을 고귀한 명분으로 미화한다. 또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성공한다며 달콤하게 유혹한다. 그렇게 성공해서 살아남아야 행복하다고, 그러니 처세의 달인이 되라고. 혹 누군가 이런 말은 웃기는 소리라고 비판하면 억울하면 출세하란다. 정작 남을 짓밟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제 뱃속만 채우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마음 안에도 제국이 도사리고 있다. 은근하게, 음흉하게, 음산하게.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앞에서도, 출세와 성공을 의뭉스레 권하는 사회에서도, 당당히 맞서며 시대의 오류를 용기있게 비판했던 리영희. “대학 진학률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86% 수준”(198쪽)이라지만 지식인다운 지식인은 사라져만 간다. ‘스펙’ 쌓기에 골몰하여 사유의 의무를 내팽개쳐 버린 지식인을 양산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치열한 성찰마저 도구가 되고 상품이 돼버린 세상에서 리영희의 이름을 잊어가는 시대는 슬프다. 아니 리영희마저 우상으로 만드는 시대가 더 서글프다. 희망마저 저당 잡혀 허덕이는 삶이 아니던가. 비관하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리영희는 “반드시 변혁은 와요. 우리 사회에도 옵니다. … 바로 이것이 역사이고, 역사의 변증법입니다.”(218쪽)라며 다시금 죽비를 내리친다. 딱.딱.딱!

 

팔순의 병약한 노구(老軀)를 이끌고서도 변함없이 치열하게 성찰하는 리영희. 그러면서도 나의 시대는 끝났다며 이젠 가야할 때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러섰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지만.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서, 맨얼굴로도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어서 아름답다. 최후의 한 목숨을 쉬는 그 날까지 자유를 꿈꾸며 늘 깨어있을 당신. 당신을 만난 건 우리에게 큰 행운이다.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당신마저 우상으로 받들지 않기를, 우리가 힘겹다고 잠자는 척도 하지 않기를. 죽비 소리가 들린다, “생활은 간소히, 하지만 생각은 높게”(235쪽), 딱.딱.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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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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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를 가로지르며 넘나들다

강신주는 카멜레온이예요. 동물들은 천적에게서 제 몸을 지키려고 보호색을 띠며 숨죠. 그들에게 변화는 생존 본능입니다. 변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선 저자는 색깔을 바꾸는 동물과 같을지 모르나 틀을 깨고 새로이 길을 내며 걷는다는 점에선 다르지요. 

장자와 노자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동양철학에만 머물지 않고 서양철학과 손잡고 걷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금기로 여기는 ‘전공 불가침’의 묵계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파문을 무릅쓰며 이단의 길로 나아간 거죠. 

글쓰기 방식마저 딱딱한 문어체로 쓴 논문 형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구어체를 바탕으로 대화하듯 써 내려갑니다. 점점 삶과 멀어지는 철학을 일반인에게 쉽고 편하게 느끼도록 글쓰기 양식마저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장자가 추구했던 자유를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학문과 생활에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됐으리라 봅니다.

 

2. 불륜이 아닌 외도?

저자가 이번에도 외도를 했네요. 시에게 철학이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내가 하면 사랑이지만 네가 하면 불륜이라고 천연덕스레 말하며, 은근히 불륜을 즐기며 부치기는 우리네 일상으로는 도저히 가늠하지 못할 외도인 셈입니다. 저자의 외도는 무딜 대로 무뎌진 사유 감각을 일깨우니 박수를 쳐 주어야겠지요. 

시인 21인과 철학자 21인이 서로 짝을 이루어 펼치는 이채로운 소개팅! 문창호지에 침을 묻혀가며 구멍 내어 살짝 들여다보는 재미로 설레기만 하네요. 시인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호흡했거나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철학자들은 박동환을 빼면 스무 명은 서구 현대 철학자들입니다. 시와 철학이 가슴앓이 하듯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3. 세르파와 함께 산을 타다

험하디 험한 인문학의 양대 산맥. 발길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시와 철학의 봉우리. 세르파(Sherpa)를 자청한 저자를 뒤따르니 산행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준봉(峻峯) 위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외봉오리에 올라서서 구름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바람 내음새에 흠뻑 취하기도 합니다. 

서구 현대 철학자들은 동일성의 사유라는 감옥에 갇힌 차이를 구출하려고 특공대를 파견합니다. 개념의 그늘 속에 가려진 살결과 숨결을 온전히 드러내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만든 틀 안에서 춤추고 있었을 뿐이랍니다. 이른바 ‘구성된 주체’였다는 것이죠. 영화 <트루먼 쇼>의 트르먼처럼 말입니다. 견고하게, 은밀하게, 물신(物神)으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욕망을 길러낸 겁니다. 온전히 우리 자신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했다고 착각했던 거지요. 이 치명적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기는 참 힘겹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역시 헐벗은 생명을 배제하고 냉대했던 것도 ‘이성의 간계’가 빚어낸 폭력이랍니다.  

 

4. 하산 그리고 땅멀미

어느덧 하늘 끝 모를 봉우리만 오르다보니 땅이 그립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비릿한 도시 땅자락에 두 발을 내딛으니 낯설기만 합니다. 뱃사람들이 오랜 항해를 마치고 뭍에 오르면 땅멀미를 하듯이 말입니다. 

이젠 낯익고 친숙한 일상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네요. 불쾌감마저 들 정도로 혼란스럽군요. 삶을 제대로 살아보려면 이를 견뎌내야만 한다죠. 홀로서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네요. 앓은 만큼 성숙하겠죠.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맘껏 누리겠노라고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5. 묻고 또 묻다!

저자가 프롤로그에 밝힌 대로 우리 철학계는 서구를 수입하는 데 급급하다보니 우리네 삶은 서구인들에 사유그물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문명은 교류를 통해 성장해 왔음을 알지만 서구인의 일상과 다른 우리네 삶결을 살피는 데는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바나나 콤플렉스’라나요. 우리네 피부색은 살구색이지만 생각은 하얗잖아요. 서구가 몇 세기에 걸쳐 겪었던 근대를 압축해서 따르다 보니 사유의 식민지에서 허덕인 것이죠. 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잖아요. 언제쯤 우리도 당당하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우리 철학계를 뒤돌아본 저자는 박동환의 철학을 조명하며 한국적 사유의 가능성을 검토했으나 서구 생태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도시의 삶이 점차 확산되어 농촌의 삶을 찾기 힘든 현실에서 도시 밖을 이야기한다는 건 좀 아쉽네요. 오히려 우리말로 온전히 사유하려고 애쓴, ‘씨 사상’으로 집약되는 함석헌 선생과 다석 류영모 선생을 만나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중매를 잘 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 하면 뺨이 석 대라잖아요. 

그리고 우충좌돌하며 폭력과 근본주의에 한바탕 싸움을 걸고 있는 김진석이 내놓은 ‘포월과 소내’의 철학도 의미가 있지 않나 싶군요. 앎과 삶의 소통을 꿈꾸며 ‘일리(一理)의 해석학’을 내세운 김영민이라는 사유가도 눈여겨보았으면 합니다.

선별한 서구 철학자들은 대개 남성이더군요. 페미니즘계에서 동일성의 사유에 사로잡힌 ‘젠더’에 균열을 내었던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여성 철학자들과 시인 김승희, 김혜순, 김선우 등과 같은 여성 시인을 만나도록 주선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오히려 길 밖이 넓다 /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더 넓고 넓다’고 나직이 말한 어느 시인의 시구가 귓전을 휘감습니다. 뚜벅뚜벅 길섶으로 발걸음을 옮겨봐야겠네요. 늘 가던 길만 가다보니 무기력한 나날을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사유하지 않고 일상에 휩쓸려 살았던 생활도 반성해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읽은 당신께 묻고 싶네요. 어떤 기쁨, 어떤 자유를 좇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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