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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평점 :
생명은 신비하고 경이롭다.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남자든 여자든 늘 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이를 기르면서 육아 문제로 티격태격 싸우다보면 어느새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체험을 잊고 살아간다. 일상생활에 치이다보니 작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잊어간다.
자연도 신비하고 경이롭기는 마찬가지다. 겨우내 헐벗은 나무도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운다. 새들도 나뭇가지 하나씩 주둥이로 물어다가 튼튼하고 따듯한 둥지를 틀며 새 생명을 낳고 키운다.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초고층 건물에 견주어 봐도 새 둥지는 정교함이 뒤처지지 않는다. 세상 곳곳이 경이로 가득차 있다.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 어릴 적 꿈꾸던 광선검이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아직은 실현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우리 두 눈으로 볼 날도 머지않았다. 곧 3D TV도 보급되어 널리 쓰이게 될 터이니 또 한 번의 영상혁명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냄새도 느낄 수 있는 TV도 우리 안방을 차지하게 될 터이다. 1980년 흑백영상에서 다채로운 색깔을 담은 영상으로 변모한 컬러 TV를 체험한 유년시절을 떠올려 보더라도 지금 우리 시대는 가히 혁명적인 기술문명을 이루어내고 있다. 요즘 다들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로 TV는 물론 무선 인터넷까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자연과 생명이 펼치는 신비와 경이를 과학이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진화과학이 오만과 독선에 가까운 태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가정하에서 세계를 해석’(7쪽)했기 때문에 이러한 신비와 경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을 바탕으로 하는 다윈을 위시한 진화과학자들은 인류가 직립하여 두뇌의 역량을 키우고 언어를 사용하는 등 ‘인류의 발달에 대한 수수께끼’를 다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신유전학과 신경과학은 유전자와 두뇌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지만 정작 의식, 자유의지, 기억, 이성과 상상력, 자아와 같은 비물질적인 세계를 규명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 혹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진화과학은 물질과 비물질의 이중세계, 육체와 정신의 이중성을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즉, 유물론 측면에서 바라보는 진화과학은 생물의 생명형성력과 인간의 영혼까지 밝힐 수 있다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주로 리처드 도킨스, 대니엘 데넷, 에드워드 윌슨과 같은 학자들이 극단적으로 물질주의나 환원론을 추구하면서 영혼과 정신 같은 비물질의 실체마저 규명하려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유물론이나 물질주의를 벗어날 때만이 비로소 생명과 인간의 신비를 제대로 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과학계에서 리처드 도킨스과 같이 다윈의 논의를 극단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진화과학 강경파를 겨냥한 비판은 동의하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이 다윈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진화과학 온건파가 내놓은 논의마저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다는 판단으로 오해할 듯 하기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또 진화과학자들이 '인간 생명에 대한 경이감조차 느끼지 못한다'(7쪽)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도 "우리는 너무나 아르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것은 마을 유일의 게임, 지상 최대의 쇼다."(『지상 최대의 쇼』, 김영사 : 565쪽)라고 생명에 대한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음을 외면하고 있다. 어차피 자연과학은 유물론 혹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다윈 혁명이라고 말할 만큼 진화과학은 인류와 생명의 신비를 풀어내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다윈이 발표한 진화론은 한계가 분명히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고 연구들로 최근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도 등장하는 상황이다. 다윈을 완전히 폐기해야 하는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라며 진화 회의론에 빠져 지적 설계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자세는 옳지 않다.
끝으로 번역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번역자는 게놈과 유전체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게놈을 유전체로 번역하고자 한 점은 높이 사지만 그 취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양육(nuture)과 짝을 이루어 말하는 ‘자연(nature)’(261쪽)은 ‘본성’으로, ‘실재(reality)’는 ‘실체’로 번역해야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패러다임 변화’(350쪽)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또 파운드와 같은 화폐단위는 가급적이면 우리가 쓰는 원화로 표기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