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일주일 남았다. 영화 한 편 못 보고(에바 그린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다!) 방학이 끝났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개강 직전의 우울에 절어 있다. 어제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 원래 2학기에 <도-키> 강의만 했는데 이번 학기, 즉 1학기에 <톨스토이>를 개설, 봄학기도 다니게 됐다. 중앙선을 타고 가며 읽었던 책은 <백치> 하권. 연필로 "비오는 날 중앙선"이라고 써놓은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소설을 쓰고 싶었으리라!) 2015년 2학기, 역시나 중앙선을 타고 이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2016년 2학기, 아마 비슷한 시간에 또 그 부분이었을 거다. 어제, 그러니까 2월 18일 논문 쓰면서 다시 그 페이지. 재작년 <백치> 때 아이는 폐렴으로 입원했고(퇴원한 뒤 수족구 걸렸고) 작년 <백치> 때 장염 걸려 집에서 쉬었고 <백치> 갖고 논문 쓰려는데 A형 독감 걸렸다. 우리 아이는 <백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도 <백치>가 마뜩치 않았다. 책이 왜 이리 안 팔리냐고. 물론 표현은 이보다는 점잖아서 '대중 독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좀 시원찮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전작보다 인기를 못 누리니 작가로선 당연히 불만. 그 전작이 <죄와 벌>인데, 헐 누가 보나, 어떻게 <죄와 벌>을 이기냐. 주제 파악을 하시라.

 

나도 이제 싫어지려 한다, <백치>. 3부에서 고골 소설 얘기 늘어놓는 장면, 4부에서 가브릴라 오누이 얘기 장황하게 늘어놓는 부분, 4부에서 므-킨이 가톨릭 어쩌고 하고 떠드는(그러다 화병 깨는데 차라리 그냥 여기서 바로 발작을 하시지-_-;;) 부분, 편집자는 이런 거 좀 안 덜어내고 뭐했냐..ㅠ.ㅠ 다른 소설은 조연이 빛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감초(?!) 역할을 해야 하는 이볼긴 장군이나 레베제프도, 죄송하지만, 너무 재미없다. 학적으로야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단 그냥 소설로 읽기에, 인물로 쭉 좇아가기에 너무 매력이 없단 말이다. 이볼긴 장군은 실컷 떠들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 한 번 웃겼다 -_-;;  

 

 

 

 

 

 

 

 

 

 

 

 

 

 

 

 <열린책들>의 <백치> 번역도 좋지만 나도 번역하고 싶다. 일에 순서가 있으니 일단 하던 일부터 끝내고. 암튼, <백치>를 다시 읽다가 이 부분에 꽂혔다. <백치> 하면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이 워낙 세기(!) 때문에, 또 그 밖에 강렬한 이미지들(주로 참수)이 많아서 곧잘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어제 나는 당신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느 그림을 생각해냈어요. 화가들이란 하나같이 복음서의 얘기에 의거해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어요. 하지만 나라면 달리 그리겠어요. 나는 그리스도 한 사람만 그리겠어요. 그의 제자들도 이따금 그를 혼자 남겨 둘 때가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오로지 어린아이 하나와 함께 있는 예수를 그리겠어요. 아이는 그의 곁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아마 아이는 그리스도에게 무언가 애들끼리 하는 말을 들려주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리스도는 아이의 말을 듣고 있으나 지금 생각에 잠겨 있지요. 그의 손은 무심결에 잊혀진 듯이 아이의 귀여운 머리 위에 놓여 있는 상태지요. 그는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의 시선 속에는 이 세상만큼 거대한 사상이 깃들여 있는데, 얼굴은 수심에 차 있어요. 아이는 입을 다물고 그의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고개를 들어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를 유심히 바라바고 있는 거예요. 태양은 뉘엿뉘엿 지고 있고요... 이게 내가 구상하는 그림이에요!”(2, 699.) / 8: 380)

 

이것은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가 므이쉬킨의 약혼녀나 다름없는 아글라야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화가 난 아글라야는 세 통의 편지를 모두 므-킨에게 건네주고(다시는 이런 편지를 보내지 말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렇게 그녀의 편지를 손에 넣은 므-킨은 무작위적으로 편지를 읽어본다. 고로, 위의 부분은 편지를 쓴 주체인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는 물론 그녀의 연적인 아글라야, 또 이 두 여성과 연결된 두 남자(로고진은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가 모든 편지를 자기에게 보여줬다고 말한다) 등 다시금 4자가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킨에 의해 독자인 우리에게 공유되는 이 이미지는 홀바인의 그림과 쌍벽을 이룰 법하다.

 

 

이 그림에 대한 도-키(작품 속에선 입폴리트)의 말이 대거 참조되는 그리스테바의 이 책도 오랜만에 상기해본다.

 

 

 

 

 

 

 

 

 

 

 

 

 

 무덤 속 그리스도 주검이 말 그대로 죽음-어둠의 극한이라면(최소한의 희망마저 죽여 버리고 믿음의 씨를 말려 버리는!), 석양빛을 받으며 아이와 단 둘이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삶의 극한이다. 그럼과 동시에, ‘말씀과 행적으로 가득 한 그리스도의 삶 속에 (황야에서의 수행 외에) 유일한 휴식과 명상(사색)의 순간, 그러기에 너무도 소중한 순간일 수 있겠다. 이 그림 속 그리스도가 어쩌면 나..이 므-킨에게 원했던 모습, 그리스도의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인 도-키가 원했던 모습일 지도. 아무튼 <백치>의 세 청춘(아글라야까지 포함하면 넷이지만)의 운명이 모두 파국을 맞이한 다음 다시 조망하는 이런 이미지, 사색에 잠긴, 고독하되 온화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백치>의 깊이를 더 한다. 그리스도 옆에서 귀엽게 조잘대는 것도 같은 어린아이는 다시금 길 잃은 어린 양이던가. 어찌해도 비극의 정조는 감해지지 않는다.

 

예브게니 미로노프가 므-킨 역을 맡은 러시아 판 <백치>. 로고진 역을 맡은 배우(블라지미르 마쉬코프)는 오래 전 <마이 러브 카티샤>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레스코프 원작의 <므첸스크 현의 맥베스 부인>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이기도 하다. 워낙 어릴 때(아마 2학년이었나) 봤던 영화라, 구강 성교 장면 때문에, 또 아마도 납득이 안 되는 격한 열정(?) 때문에 무척 충격을 받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마이 러브 카티샤>는 번안을 한 것이지만 원작의 스토리는 거의 보존되었다. 열정과 질투와 살인의 드라마이다. 배우들의 연기(대사도 별로 없고 거의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되는데)가 무척 훌륭했던 걸로 기억된다.

 

 

 

 

 

 

 

 

 

 

 

 

 

 

 

이 영화의 여우 주연은 보다시피 저렇게 알몸을 하고 있어도 엄청나게 기품 있고 지적인 배우였는데, 그런 이미지에 일조하는 것이 볼륨감이 별로 없는 깡마른 몸매와 어딘가 서늘하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리투아니아인가 어디쪽 배우로, 미할코프 감독의 <위선의 태양>(태앙(스탈린을 말한다)에 지친 자들) 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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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제일 행복한 순간은 셔틀에서 내리는 아이를 받을 때이다. 문학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길까봐 결혼이 두려웠다는(그래서 펠리체와 끊임없이 파혼한) 카프카는, 그의 불안은, 가당찮지만, 근거가 영 없지는 않다. 아무래도 그의 문학은 '가장의 근심'과는 너무 거리가 멀지 않나. 게으름의 호사를 누리기 힘드니(문학은 게으름의 소산인데!) 문학이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 같은 불안이 수시로 든다. 하지만 잠깐만 정신을 차려봐도 이건 헛소리다. 문학은 게으름의 소산이지만, 그럼에도 부지런함의 소산이다. 봄 신상품도 좀 사고(헐헐^_^) 몸과 마음을 다잡자. 마흔 넘으니 다 몸 싸움이다.

 

- "**아, 오늘 생새우 야채죽 맛있게 먹었어?"(식단표에 적힌 어제 아침 간식 메뉴)

- "아니, **이 당근죽 먹었어."
- "뭐?? 새우는 없었어?"

- "없었어."

- "그럼 당근만 있었어?"

- "아니, 부추도 있었어." (이후, 새우 볶음밥에서 새우만 찍어 먹기 시작..ㅋ)

어조와 억양이 좀 어눌해도 이렇게 '핑퐁 대화'도 잘 하건만 왜 아직 밥도 잘 못 떠먹는 것이냐,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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