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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꿈을 접은 것은 좀 더 이후, 대학 다닐 때였다. 청년 모비딕은 대학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하루 종일 책을 나르고 꽂고 빼고 만지고 정리했다. 한마디로 책과 더불어 살았다. 책과 부대끼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작 책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책의 향기 보다 종이와 먼지와 곰팡이 냄새와 싸우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서적상이 웬만한 작가나 학자보다 더 박식한 다독가인 것은 정녕 딴 나라 얘기였다. 하루 종일 몇 십 권, 때론 백 권 이상의 책을 정리하고 나면 삭신이 쑤셨고 이라는 청각영상만 떠올려도 혐오감과 공포감이 밀려왔다. 급기야 책이 그의 악몽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꿈속의 그는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모로 누워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벽과 한 몸이 된 서가가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빼곡히 들어차 있던 책이 그를 덮쳤다. 두툼한 <자본>의 모서리가 제일 먼저 떨어져 그의 척추 아랫부분을 툭 쳤다. 소프트카버여서 충격과 통증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잠이 확 달아났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는 찰나 <이방인>의 모서리가 그의 접힌 몸의 정중앙, 생식기에 떨어졌다. 짧고도 격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존재와 시간>이 직사각형의 자세 그대로 목젖이 보일 것 같은 그의 목 위로 고스란히 떨어졌다. 참수가 완료됨과 동시에 책들이 그의 머리통과 몸통 위로 와르르 쏟아져, 그는 그대로 책 밑에 매장되었다. 꿈속의 그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꿈의 후반부에서 그는 책의 칼날에 댕강 잘린 목을 천연덕스레 다시 붙인 채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짝(그것은 무한대로 넓고 두툼했다!)에는 니체 전집, 프로이트 전집, 카뮈 전집, 이상 전집을 비롯하여 각종 세계문학전집, 각종 한국문학전집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손(이 역시 무한대로 컸다!)에는 그가 사놓고, 혹은 빌려놓고 읽지 않은 각종 책들이 들려 있었다. 이 벌이 영겁의 세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는 책을 몸에 붙인 채 정작 읽지는 못하는 만성고통에 길들어져 갔다.

한없이 둔중한 와중에 갑자기 뭔가 저릿하고도 찌릿한 느낌. 요의와 변의를 동시에 느끼며 그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기도 전에 요란한 선풍기 소리가 귀를 때렸고 온 몸을 적셔놓은 끈적끈적한 땀의 촉감과 냄새가 감지되었다. 일순간 불쾌지수가 어마무지하게 치솟았다. 눈을 떴다. 사지와 몸통을 괴롭힌 묵직한 압통의 진앙은 한쪽 벽에 세워둔 서랍장 위에 얹어놓은 겨울 이불, 그리고 세간살이 몇 개였다. 괜찮아, 사장이 되면 괜찮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공동욕실 겸 화장실로 달려갔다. 찬물에 땀이 씻겨 내려가면서 정신이 명료해졌다. 과연? 회의가 들었다. 사장이란 항상 하얀 목장갑을 끼고 책 상자를 나르거나 맨 손으로 주판을 튕기며 장부를 정리하는 자가 아닌가. 글쎄. 청년 모비딕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속에 열어두었던 서점 문도 영영 꼭 닫혔다.

(...)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무슨 사건이냐마는 이십대 때는 마구잡이로 하던 이 일이 이제는 정말 무슨 벼슬이 돼 버렸다. 왜 이리 안 써지는 것이냐, 하는 내적인 문제도 있다. 물론, 이게 제일 큰일, 제일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1월, 계획에 없던 소설창작 강의를 두 회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쓰는 글을, 그러니까 글 자체와 쓰이는 행위를 보고서 얻은 깨달음(!)이 크다. 뭐, 거의 에피퍼니(조이스냐 ^^;;) 수준이다.  한때는 나도 가졌었으나 이제는 없는 것, 그 젊음(=치기)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이냐. 결국은 성실이다. 이것은 농부인 아버지가  정한 우리 집 '가훈'이기도 하다.  정작 당신은 오히려 게으름-과에 가깝지만, 생각함에 있어서만은 '성실'하셨던 듯하고 거의 노동 불능 상태인 지금은 더 그러신 듯하다... 육신이 맛이 가니 정신은 더 맑아져...-_-;;

 

두 번째로 시간의 부족을 꼽을 수도 있겠으나, 이거야말로 염치 없는 핑계, 헛소리이다. 아니, 소설가가 소설 쓰느라 바빠야지, 딴 짓, 다른 일 한다고 바쁘면 그게 소설가냐. 특히 장편을 쓰기 위해서는 정녕 두루마리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 함은 그만큼 열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밖에 그럴 듯한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금 오직 내적인 이유여야 한다. 즉, 장편이 나의 '영혼의 형식'이 아니다, 이런 것. 간단한 예.

 

 

 

 

 

 

 

 

 

 

 

 

 

 

 

 

톨스토이와 살풋 동시대인이기도 한 체호프는 쟁쟁한 대가들의 제자-후배답게 장편에 대한 갈망이 컸지만, 본인의 재능은 아무래도 단편(기껏해야 중편)에 한정되었다. 적어도 그의 잘 쓴 소설은 모두 중단편이고, 지루한 소설은 다 (도-키, 톨-이에 비하면 엄청 짧지만!) (경)장편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도 단편이 걸작들이고, 그 다음, 이 경우 응당 얘기되어야 하는 보르헤스는 그 문학의 체질상, 또 원칙상 장편을 쓸 수 없는(쓸 필요도 없는) 작가이다.

 

 

 

 

 

 

 

 

 

 

 

 

 

 

75년 1월 생이고 93학번인 나는 굵직한 장편을 읽으며 문학의 세계로 들어섰다. 물론 중학교 때 필독 단편을 거쳤지만, 문학에 대한 꿈은 아무래도 장편을 통해 다져졌다.  굳이 전공인 도-키를 비롯한 러시아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 소설의 경우에도 박경리 [토지], 박완서 [나목]을 비롯한 많은 장편들 이 곧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항상 쪼가리(?!) 글 밖에 못 쓰는지. 그때  카프카가 나타나 위로를 해주었으나, 이것도 이십대 얘기이다. 서른 되기 전에 <이방인> 정도는 쓰겠지. 그 서른도 벌써 십여년 전에 내 몸을 뚫고 가버렸다. 그 흔적이  배와 허벅지의 군살로, 얼굴과 목, 손등의 주름으로 남았다. 

 

 

 

 

 

 

 

 

 

 

 

 

 

 

 

 

소설과는 무관하지만,  정초부터 집안에 '우환'이  크다. 아이의 염좌, 깁스에 이어, 서방이 죽을 뻔하다 살아나 나에게 이런 존재가 있(었)음을 아주 강하게 각인시켰다.  (초기 바흐친 말대로) 흡사  통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신체의 일부 같다. 다행히 얼굴 몇 군데 꿰매고 코뼈 수술을 하는 정도 마무리 되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새삼, 내가 어린 놈, 늙어가는 놈 등 두 남자와 살고 있음을, 심지어 그 두 놈을 키우고(!) 있음을 환기하곤 화들짝 놀라버렸다. 뭐냐, 난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단 말이다, 이것들아!  사고 좀 그만 쳐라, 아웅~

 

 

 

 

 

 

 

 

 

 

 

 

 

 

 

 

아이 키우는 것이 무슨 유세는 아니지만, 이제는 이것이 소설을 읽는 하나의 잣대처럼 작용하는 듯도 싶다. 하루키가 환갑을 넘기고도 여전히 순정만화 같은, 2D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소설을 쓰고 있는 것도 그의 무한한 자유(그는 여전히 대학생이다!)와 무관하지 않을 터. 한편, 처음부터 우리에겐 '아줌마' 작가였던  그들의 필력과 ,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웅숭 깊은 시선 역시, 명실상부한 아줌마가 된 나를 자극한다. 

 

 

 

 

 

 

 

 

 

 

 

 

 

 

어느 문화권이나 '아줌마' 작가는 있다. 언젠가 <창비>에 서평도 썼던 작가.

 

 

 

 

 

 

 

 

 

 

 

 

 

 

집안의 우환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적잖이 줄었으나 그렇기에 그 틈새에 낀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툴툴대지 말고 쓰자. 쓰고 쓰고 또 쓰자.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사르트르, <말>, 267-268)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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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루종일 봤다. 학구적인 그대, 좋아 ㅎㅎㅎ

 

하지만 역시 육아는 힘들어 아침에 모셔다(!) 주고 하원 시간을 빨리 하는 중. 깁스를 하고도 눈 구경을 하고 싶냐,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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