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쓰는 글이 맛있다. / 밤에 글을 쓰는 일이 맛있다.

 

 

 

 

 

 

 

 

 

 

 

 

 

 

 

두 문장을 생각하곤 응당 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은 산문집인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을 떠올렸다. 나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올빼미였지만, 어느 순간 보니 거의 나인식스 직장인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내가 쓴 모든 글은 논문, 소설, 산문, 리뷰를 막론하고 모두 해가 멀쩡하게 떠있을 때 커피숍에서 쓴 것이다. 읽는 글/책도 그렇다.

 

아이가 방학을 하여(연휴와 주말을 끼고 있어 한 열흘쯤 되는 듯하다ㅠ.ㅠ) 시간표가 와장창 무너졌다. 그 덕분에 이렇게 야심한(!) 시각, 아이가 잠들자마자 노트북을 켜 보았다. 이 황홀감이 너무 당혹스럽다. 뭘 해야 하나. 아, 옛날 같으면 지금 한창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텐데.

 

아까 읽고 있던 <백치> 연구서를 다시 볼까? 어림없다. 이 소중한 시각에 그 따위 지루한(-밥벌이용) 책을 보다니! 겸사겸사, 오늘 저녁의 풍경 중 하나. 연구비 받은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서를 읽는 나의 모습이, 얼핏, 한 2-30년쯤 내 모습과 겹쳐졌다. 사실상 단칸방, 중학생인 나는 공부방이 없어 항상 시끄러운 가운데 공부를 해야 했는데, 한날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고 애꿎은(그들은 놀 자격이 있다!) 두 동생이 아빠한테 종아리를 맞은 적이 있었다. 대략 그런 식의 학령기를 보냈기 때문에 늘 독방을 꿈꾸며 그 독방에서 늘 책을 보고 책을 쓰며 사는 삶을 꿈꾸었다. 한데, 옆에서 아이가 정신없이 오가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보채고 하는 와중에 식탁 위에  연구서를 펴놓고 있는 내 모습이 그 옛날의 모습과 어찌나 닮았는지. 피식 웃음이 났다.  돌고 돌아 제자리, 그리고 그 무덤은 내 손으로 파놓은 것. 반복은 불가피하고 어쩌면 그래서 변주가 유의미하고 또 소중하다. 그땐 울었는데 지금은 웃음.

 

<백치> 얘기를 해볼까. 이 소설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으나 소위 '심취'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심취하고 있다. 한자어로 점잖게 써서 '백치'이지 실상 이것은 어떤 검사 도구도 먹혀들지 않는 중증 발달장애나 지적장애를 일컬음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이런 소설을 썼고 또 (같은 얘기다만) 자신의 소설의 제목을 대놓고 '백치'라 했을까.

 

 

 

 

 

 

 

 

 

 

 

 

 

 

 

<백치>의 주인공 므이시킨은 간질병 환자인데, 작가 역시 그러했기에 여러 모로 문제적이긴 하다. 한데 아까 읽었던 연구서가 이 부분을 제법 집중 조명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이런 '병리학'의 문제(-간질, 즉 뇌전증)과 '성스러움'의 이율배반적 공존. 더 구체적으론, 소설적 그리스도의 형상화. 그리스도 자체가 이미 신성의 육화, 이긴 하지만, 이러한 존재에 살과 피를 입혀 소설 속 인물로 그리는 것은, 역시나 미션 임파서블, 도..키가 아니면 누구도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다. 여기서 대가는 스스로 고르는(골라지는) 싸움의 상대부터가 다름을 실감한다!

 

그 출발점으로 도..키는 백치, 간단히 병신(올해는 병신년이구나-_-;;)을 택한다. 그의 바보스러움이 곧 성스러움과 연결된다는 어찌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면서도 너무 모순적인 생각 속에, '우스꽝스러움'의 범주가 하나 더 개입된다. 이것도 마찬가지. 병신은 대부분 웃기니까 당연해보이지만 이것이 또 어찌 성스러움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도..키가 모델로 생각한 건 돈키호테이다.

 

 

 

 

 

 

 

 

 

 

 

 

 

 

그 다음 플롯. 이것이 문제는 연애소설이라는 것이다.  삼각관계를(심지어 사각, 오각 관계) 다룬 치정 소설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제. 바로 '아름다움'. 어쩌면 그러니까 아귀가 딱 맞는 것이다. '미'("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의 주제를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은 (가령 <악령>의 정치도 아니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 등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백치>도 번안, 영화화했다. 볼만하다. 토시로 미후네는 여기서 로고진(일본 이름이 생각 안남) 역을 맡았고, 주로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많이 나온 하라 세츠코가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 역을 맡았다. 캐스팅과 연기가, 시쳇말로, 돋는다.

 

기말고사 서술형에서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세 작품 중 아이들이 마지막 작품을 제일 많이 고른 건 충분히 이해된다. 한데 <백치>와 <악령> 중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건 무엇 때문인지 좀 궁금했다. <악령> 수업을 더 부실하게 해서? 아니다. 나는 <악령> 매니아다. 마침 중간고사 끝난 직후 <백치> 수업이어서 읽을 시간이 많아서였나? 잠깐 생각을 해봤지만, 확실히 '정치소설'(<악령>) 보다는 '연애소설'(<백치>)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한데, 도..키가 쓰면 정치소설도 철학소설이 되듯, 그가 쓰면 연애소설도 종교(철학)소설이 된다. 그게 <백치>다.

 

<백치>뿐만 아니라 작가 전기 관련해서도 간질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다. 아이가 사실상 생후 1개월부터 (도중에 한 반 년은 걸렀지만) 항간질약을 복용해오고 있다. 통상 발달장애를 검색하면 연관어로 제일 먼저 뜨는 것이 뇌전증이다. 그만큼 간질은 뇌의 인지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도..키는 예외였다! 그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현대 의학이 판단-추정한 바로 그의 간질파는 측두엽(?), 주로 언어 활동을 관장하는 부분과 연결된다고 한다.) 요는 이것은 정말 질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뇌의 신경전달물질(혹은 과정?)에 어떤 이상이 생겨(혹은 한의학에서 말하듯, 오장육부에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이러저러한 간질발작이 반복되는 것에는, 좋은 것이든(가령 천재다~), 나쁜 것이든(악마가 씌었다~) 어떤 메타포도 있을 수 없다. 엄마는 수시로 내가 어릴 때 경기를 심하게 했다는 말을 했고 그 이유라 "속아지(성질)가 더러워서"라고 했다. (그때는 경기라는 것이 간질 발작인 줄 몰랐다 -_-;;) 그것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가령 체했거나 열이 났거나 등등) 만 5세 이하의 아이가 간질성 발작을 하는 것은 의료적 조치(기다리는 것 포함!)를 요하는 응급 상황이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남들이 보면 우리 아이도 '환아'일 수 있겠다. 올망졸망 네 명의 조카들과 비교해봐도 운동발달 지연(=자조 활동)도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막 네살이 된 조카도 신발을 혼자 신는다..ㅠ.ㅠ) 그런데 주변에 아픈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뭐 성인도 그렇지만 아이의 경우 병이 정말 무서운 것은 (의외로 유전적으로 물려 받는 부분이 적으니) 그것이 지닌 '우연'의 테러이다. 하필 왜 내 아이한테 이런 병이?! 특히 장애와 소아암.

 

뭐든 더 쓰고 싶은데 졸음이 쏟아진다. 졸지에 2016년이 됐다. 언제부터 내 인생의 화두가 건강이 됐나. 아무튼 이렇게 되니 인생도 단순해진 것 같다. "엄마, 똥은 똥구멍에서 나와? (...) 하마는? 하마 똥은 하마 똥구멍에서 나와?" 다들 건!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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