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음-분신과 아이
소설에서 닮음-분신 테마는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우선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에게서 닮음을 보거나(창조하거나) 그런 식으로 닮은 두 존재가 공존하는 것. 고딕 소설이나 낭만주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몇몇 인물 쌍은 ‘주인공-분신’의 가장 심화된 버전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환상 문법의 진화와 맞물려 그 입지를 넓혀간 것인데, 정신분열증 같은 질환의 결과 있지도 않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호프만이나 포의 환상소설, 그리고 역시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한 챕터(이반 카라마조프와 ‘악마’)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런 병리적인 경우까지 포함하여 닮음-분신만큼 인간 욕망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주제도 없지 싶다. ‘변신’의 경우 애초의 나의 존재를 깡그리 지워야 하는(즉, 한 번은 죽어야 하는) 희생이 요구되는 반면 분신은 그런 희생 없이 갱생과 부활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이 ‘아이’이다. ‘나’이되 ‘나’ 아닌, ‘나’보다 크고 ‘나’를 넘어서는 어떤 존재. 소설의 원형이 모험소설과 더불어 성장소설과 가족소설임을 고려한다면 아이는 소설 장르의 생존과 연결된 문제이다.
이십대 때 쓴 나의 중단편에는 분신이 곧잘 날것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워낙에는 ‘넘어 섦’을 표방하지만 실은 ‘모방 욕망’을 더 노정한 꼴이 된 젊은 작가 특유의 치기어린 만용의 산물이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쓴 박사논문은 숫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 「분신」과 분신 테마를 다각도에서 다루었고 비슷한 시기에 쓴 경장편(<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2003)은 큰 틀에 있어 ‘그’와 ‘나/너’의 유체이탈과 같은 자아분열증적 대화의 기록이다. 첫 장편(<고양이의 이중생활>, 2009)에서는 주인공들의 내적 분열과 ‘이중생활’ 외에 아이(‘딸기’)의 형상에도 적잖이 공을 들였다. 한데 실제 삶 속에서 아이의 출현은 어떠했던가. “정녕 ‘변증법’ 대신에 ‘삶-생명’이 도래했다.”(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역자해설.) 이 당혹스러운 만남을 내 나름으로 파악한 삶의 큰 흐름 속에 위치시킨 단편이 「우연론과 인과론」(<문장웹진>, 2013)이다.
‘닮음’과 ‘다름’의 역동성을 구현하기 위해 대놓고 여자아이를 바랐던 나의 기대를 무심히 배반하며 아이는 남자아이로 태어났으며, 이목구비와 함께 한 번씩 경기(驚氣)를 하는 불운한 체질(혹은 질환)은 나를 닮았다. 딱히 항간전제의 부작용은 아닌 것 같지만, 평균적인 성장 속도를 무던히 관망만 하더니 21개월을 넘긴 지금에야 간신히 한두 발짝을 떼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손을 잡아주어야만 걸음마 비슷한 모양이 된다. 역시나 그나마도 이내 피로감을 느끼고 주저앉기 일쑤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되는 과정이 이토록 험난할 줄이야!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가만히 있어도 좋은데 굳이 왜 움직여야 하나, 기면 되는데 굳이 왜 걸어야 하나, 라는 식의 달관과 초월의 태도이다. 길쭉한 아이가 몸도 잘 못 가누고 비틀대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딱한 표정을 감추기도 하고 더러는 어디가 아프냐, 병원은 가봤냐고 조심스레 묻기도 한다. 말하는 속도도 만만치 않다. 간혹 간단한 낱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대체로 표현하고 싶은 의사가 별로 없는 것 같고 굳이 그러고 싶은 의사는 손짓이나 표정이나 소리로 얼추 만족되는 모양이다. 이 도저한 ‘느림’과 ‘과묵’, 심지어 ‘침묵’에 덧붙여 ‘띵함’을 두고서 외할머니는 “제 어미를 일원어치도 안 닮았다”라고 말한다.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까. 아이와 나의 관계는 또 어떻게 자라날까.
환경결정론과 에밀 졸라 식 자연주의는 많은 진실을 담고 있지만 유물론과 인과론을 벗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이나 사회생물학을 비롯한 온갖 학설을 동원해도 ‘유전자’, 즉 닮음을 향한 인간의 끌림이 오롯이 설명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모성의 신화의 허위에 대한 논의가 많지만, 나는 목표치가 낮아서인지 오히려 내 안의 모성에 놀란다. 아무도 아이에게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지를 묻지 않은 만큼 출생 자체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식의 칸트의 말도 수긍된다. 아이는 정녕 운명처럼 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흐름의 상징 같기도 하다. 그것에 맞서는 것 같지만, 그런 줄 믿지만 실은 그것에 휩쓸려가는 상황. 분신-아이를 만드는 순간 ‘죄’가 시작되고 ‘죄’가 곧 ‘벌’이다. 아이(동시에 아비-어미), 이 ‘죄받을’ 일을 두고 문학도 철학도 다 할 말이 많다. 어느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이성복, 「꽃 피는 아버지」)라는 참 시적인 말을 던지기도 했다. 소설의 말이 가닿을 수 있는 극점은 어디일까.
(대산문화. <글밭단상> 2013년 여름호.)
-- 리뷰 성격이 아닌 그냥 글(?)을 쓸 지면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던 차에, 저 청탁이 들어와서, '단상'만으로 그치지 않고 엄청나게(!) 많이 썼는데(특히, 분신 관련 얘기들, 레비나스를 비롯한 학자들의 '아이'에 관한 견해들) 결국 다 잘라내고 위의 모양새가 됐다. 겸사겸사, 아이 사진을 한 번 올려본다.
이랬던 아이가 이렇게 커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양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있었는데(이거야말로 나를 닮았다) 점점 힘이 빠지더니 이런 얼굴..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