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을 넘어: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9)

 

<오만과 편견>의 그 유명한 시작 부분이다. 이어 빙리 씨를 사윗감으로 점찍은 극성스럽고 귀여운 베넷 부인의 활약이 펼쳐진다. 결국 그녀의 소원대로 출중한 미모와 선량한 성격을 자랑하는 큰딸 제인은 빙리 씨의 아내가 된다. 덧붙여, 베넷 부인 입장에서는 까칠한 성격 탓에 가장 골칫거리이지만 베넷 씨 입장에서는 가장 큰 자랑거리인 둘째딸 엘리자베스, 경박한 리디야 등도 모두 결혼에 성공한다.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은 젊은이들이 서로 만나고 호감(혹은 반감)을 갖고 청혼을 거쳐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구혼소설이자 가정소설답게 미시적인 규모로 오밀조밀하게 포착된 세태와 풍속,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가 도드라진다. 과연 이들 삶의 절체절명의 화두인 결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잠깐 위컴 씨에게 호감을 느꼈던 엘리자베스는 가드너 부인을 앞에 두고 반문한다.

 

근데, 외숙모, 결혼에 있어서 돈만 밝히는 것과 신중한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신중함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고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딘가요?”(219)

 

강조하건대 열정과 낭만은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 생활의 생리에도 무관심하다. 소설은 오직 결혼에 이르는 길을 지배하는 심리적, 사회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데, 그 메커니즘이 곧 오만과 편견이다. , 성격과 신분-계급과 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한 오만, 또 그것이 낳은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는 과정이 곧 이 소설의 내용이다. 오만이 거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긍심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 소설도 끝난다.

 

 

 

 

 

 

 

 

 

 

 

 

 

 

가령,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허영은 진짜 결점인 반면 오만은진정으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면 늘 그것을 잘 통제하기 마련이고, 그건 오만이라기보다 자긍심이라고 해야”(84)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성격이 꽁한 편임을 고백하면서 자기한테 한번 잘못 보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장”(84)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실제로 그의 언행은 오만의 극치처럼 보인다. 특히 메리턴의 무도회 이후 베넷 부인도, 엘리자베스도 심한 모욕감에 치를 떤다. 반면 샬럿 루카스는 차분하다.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그분이 오만한 게 나한테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아.”하고 살럿이 말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

그건 맞는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그 사람의 오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거야.”(31)

 

오만과 편견은 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상황과 관계의 맥락에 종속되기 쉽다. 그것을 잘 조율한 결과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한다. 전자는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꼭 필요한 명민한 아내를 얻고, 후자는 신중’, 즉 실용적인 가치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중간계급(중산층) 여성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킨다. 한편, 애초부터 오만과는 거리가 멀었던,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은 어떠한가.

 

 

 

 

 

 

 

 

 

 

 

 

 

 

 

 

 

그녀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가 무참히 거절당한 콜린스 씨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177) 더욱이 소설에서 수차례에 걸쳐 강조되거니와 그녀는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는 여자”, 즉 박색이다. 아무리 분별 있고 똑똑해도, 적어도 엘리자베스처럼 그럭저럭 봐줄 만은한 수준의 외모도 타고나지 못했으니 어쩌랴. 샬럿은 자신의 선택을 치졸한 정략결혼쯤으로 보는 엘리자베스의 반응에 예의 그 특유의 담담함으로 응수한다.

 

네가 놀라는 것도 당연해. 무척 놀랍겠지. (중략)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181)

 

대체로 <오만과 편견>은 인간의 속된 욕망과 생활의 논리(짝짓기와 돈!)를 건전하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훌륭하게 묘파하면서 재기발랄한 위트와 유머, 경쾌한 현실 풍자와 비판마저 곁들인 수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세계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가장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결국 중용타협의 원칙을 좇음으로써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다. 한데 정작 작가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고 고로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그녀가 남긴 적지 않은 편수의 소설은 거의 다 구혼을 다루고 있다. 사실상 첫 소설인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처럼 되고 싶은 희망을 슬쩍 내비친 그녀가 실은, “식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못생긴 편이라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 열심히 공부”(38)한 메리에 가까웠던 것은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싸늘한 비가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경쾌하고 밝은 소설을 골라 봤습니다. 사춘기 때는 썰렁하게 여겼던 소설인데 서른 넘으니 오히려 재미있게 읽히더라고요. 영화도 많지만(특히 키이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 베넷 역을 맡은), BBC에서 만든 드라마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에마>(엠마), <맨스필드 파크> 등의 드라마 버전도 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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