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포증혹은 진부함의 공포

 

 

체호프의 단편 공포(Страх: рассказ моего приятеля,1892)에서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광장 공포증(боязнь пространства)과도 유사한 삶 공포증(боязнь жизни)을 호소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가 정확히 무엇이 그렇게 무섭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전부 무서워요. 나는 타고나길 깊이가 없는 사람이고(не глубокий) 사후 세계라든가 인류의 운명이라든가 하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대체로 저 높은 하늘의 문제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저 진부함(обыденщина)인데요,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서 몸을 피할 수 없거든요.”(8: 131)

 

실린이 두려워한 진부함은 불륜으로 구체화된다. 그와 친분 관계를 유지해온 는 오래 전부터 그의 아내 마리야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이 애매한 삼각관계는 와 그녀의 밀회로 이어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흠모해온 여인을 손에 넣은 의 느낌은 불편함과 부담스러움(8: 137)에 가깝다. 한편 실린 쪽에서는 아내와 친구의 불륜을 사실상 그 자리에서 목격했음에도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 이들 부부의 묵직한 권태도, 와 마리야의 심드렁한 불륜도 우리 삶의 한 흐름일 뿐이다. 실린의 말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이다. 자신이 타고나길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양보적인 전제에는 그와 반대되는 자질을 가진 뛰어난 사람의 존재가 상정된다. 만약 진부함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그 출구를 깊이를 가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어떨까.

 

 

 

 

 

 

 

 

 

 

 

 

 

 

 

 

 

 

베짱이(Попрыгунья, 1892)의 여주인공 올가 이바노브나는 예술가를 동경함에도 정작 결혼은 의사와 하게 된다. 결혼식 날에도 남편 드이모프의 단순함과 평범함이 못마땅하고 그 이후에도 예술에 무관심한 남편이 불만스럽다. 그러다 화가 랴보프스키와 연애에 빠지자 로돌프의 유혹에 넘어간 엠마 보바리처럼 그 동안의 설움설욕한다. 보바리 부인의 소설 같은 삶이 올가에게서는 그림 같은 삶으로 실현된 것이다. 고요한 7월의 달밤, 볼가 강의 증기선, 터키옥처럼 짙은 푸른빛 바다, 무엇보다도 기껏해야 생활인에 불과한 남편 대신 진짜 위대한 사람, 천재,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8: 15), 무한한 재능을 타고난 화가와 함께 하는 삶! 그러나 이 대단한 사랑도 시간의 저력 앞에서 환멸을 피하지 못한다.

 

겨울, 남편이 학위논문이 통과되고 강단에 서게 됐음에도 그녀는 완전히 무관심한데 랴보프스키에게 새 애인이 생긴 탓이다. 그 와중에 드이모프가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사망하는데, 전염될까봐 무서워서 아직 단 한 번도 남편의 서재에 가지 않았다고 하느님이 이 순간 자기를 벌할 것만 같”(8: 28)은 그녀의 순진한 죄책감이 실현된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상, 또 올가의 성격적 특수성상 드이모프의 천재성에 대한 그녀의 깨달음(8: 30)은 무척 자연스럽다.

 

드이모프!” 그녀는 큰소리로 불렀다. “드이모프!”

그녀는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고,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고 설명하고 싶었다, 인생은 아직도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다고, 그는 드물고 비범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평생 동안 그 앞에서 공경심을 품고 기도하고 성스러운 공포(священный страх)를 느낄 것이라고(8: 31)

 

그러나 올가의 깨달음을 조롱하듯, 문밖의 거실에서는 코로스첼료프가 하녀에게 후처리를 지시한다. 그의 어조는 앞서 올가 앞에서 드이모프의 위대함에 대한 장황한 찬사를 늘어놓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 실무적인 말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올가의 각성이 그녀의 연애만큼이나 찰나적이고 한시적인 것임이 강조되는 듯하다. 이제 와서 남편이 의학사에 남을 위대한 천재였다는 것이(혹은 아니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코로스첼료프가 하녀를 채근하며 하는 말대로 여기에 묻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8: 31)

 

대체로 그녀의 희비극은 그녀라는 존재가 에피고넨(랴보프스키)의 모방, 말하자면 아류의 아류, 패러디의 패러디(‘제곱 패러디’)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베짱이가 수작인 것은 위대한 사람’(великий человек)베짱이’(попрыгунья)의 이분법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엄정한 인과론적 고리(가령 올가가 예감한 인과응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엉성하게 비켜가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교묘하게 핵심을 찔러버리는 미지의 메커니즘에 종속된다. 바로 이 비의(秘義)삶 공포증’, ‘진부함의 공포의 진앙이기도 하다.

 

 

 

 

 

 

 

 

 

 

 

 

 

문학 선생(Учитель словесности, 1894)의 주인공 니키친은 사랑하는 마뉴샤를 아내로 맞지만 행복하기는커녕 자신을 옥죄는 범속함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론 결혼 전에 문학 애호가인 셰발진이 던진 질문(“레싱의 <함부르크 연극론>을 읽어보셨습니까?” 8: 316)에서 시작된, 명색이 문학 선생인데 그런 것도 읽지 않았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레싱을 읽고 싶은 마음, 혹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것을 읽지 못하게 하는 속된 현실이 대립각을 세운다. “속물적이고 또 속물적인 것(пошлость и пошлость)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지루하고 한심한 인간들, 스메타나 단지, 우유병, 바퀴벌레들, 바보 같은 여자들속물적인 것보다 더 무섭고 모욕적이고 서글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도망칠 것, 오늘 당장 도망칠 것, 안 그러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8: 332) 니키친의 이 일기로 소설이 끝나기 때문에 이후 그의 행로는 알 수 없다. 레싱과 속물적인 것 사이에 낀 문학 선생 못지않게 더 흥미로운 인물은 지리-역사 선생 입폴리트이다.

 

이 노총각은 교사임에도 전혀 지식인답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불그죽죽한 턱수염, 들창코, 좀 거친 얼굴 등)이며 지리 선생으로서 지도 그리는 것을, 역사 선생으로서 연대를 아는 것을 중시한다. 무엇보다도, 화자가 수차례 강조하듯, 주로 침묵하거나 아니면 이미 오래 전부터 다들 아는 말만”(8: 318)한다. , 좀처럼 말을 하지 않다가 간혹 내뱉는 말은 무척 식상한 얘기이다. 그의 말을 모두 정리해보자.

 

1) “, 좋은 날씨입니다. 지금은 5월이니까 곧 진짜 여름이 올 겁니다. 여름은 겨울과는 다르지요. 겨울에는 난로를 떼야 하지만, 여름에는 난로가 없어도 따뜻합니다. 여름에는 밤에 창문을 열어놔도 따뜻하지만, 겨울에는 이중창을 해도 춥지요.”(8: 318)

2) “일어나요, 출근해야지요.() 옷을 입고 자면 안 돼요. 그러면 옷이 망가지잖아요. 잠은 침대에 자야지요, 옷을 벗고서”(8: 319)

3) “그 애(마뉴샤)는 김나지움 다닐 때 우리 반이었어요. 나는 그 애를 알아요. 지리 공부는 무난했지만, 역사는 나빴어요. 수업 시간에는 산만했고요.”(8: 323.)

4) “결혼은 진지한 일보(шаг)입니다.() 모든 것을 곰곰 생각하고 잘 따져봐야지, 그냥은 안 돼요. 현명하게 굴다가 손해 볼 일은 없는데, 사람이 독신 생활을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결혼에 임해서는 특히 더 그렇지요.”(8: 323)

5) “지금까지 당신은 결혼한 몸이 아니어서 혼자 살았지만, 이제는 결혼한 몸이니 둘이 살게 될 겁니다.”(8: 325)

6) “사람은 음식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8: 326)

7) “볼가 강은 카스피 해로 흘러갑니다말은 귀리와 건초를 먹습니다” (8: 328)

 

1)은 날씨가 좋다는 니키친의 말에 대한 응수이며 2)는 문제의 레싱을 읽다가 옷을 입은 채 소파에서 잠든 니키친을 깨우며 하는 말이다. 3)은 마뉴샤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는 말인데, 다소 무례한 동문서답처럼 들린다. 같은 맥락에서 나온 4)는 당신은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니키친의 질문에 상당히 심사숙고해서 내놓은 대답이다. 5)는 니치킨의 결혼식 날 입폴리트 나름의 감동을 담아 건네는 축하 인사이며 6)은 흰 빵 하나로 점심을 때우는 그가 아내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먹는 니키친을 보며 하는 말이다. 끝으로 7)은 임종 직전에 내뱉는 말이지만 화자의 암시대로 인생에 대한 어떤 통찰도 담고 있지 않다. 이렇듯 입폴리트의 말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그 나름의 진정성을 담고 있음에도 기계적인,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동어반복에 가까워 한 학자의 지적대로 정녕 부조리극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소한 만큼이나 철학적인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의 말이 지녔던(혹은 그러고자 했던) 의미와 무게, 그 지나친 있음에 대해 없음으로 맞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매일 학생들이 그린 지도를 고쳐주고 연대기를 작성하는 하는 것이, 숙고 끝에 흔한 말만 내놓는 것이 그토록 한심한가!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도 뭔가 깊은 생각을 한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대단히 큰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필요악과 같은 환상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입폴리트의 동어반복과 같은 삶이 니키친보다 더 열등할 것은, 적어도 딱히 더 지루할 것은 없다는 점이다. 굳이 말하자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다는 사실(입폴리트는 단독(丹毒: рожа головы)으로 죽는다)에 저 진부함의 공포와 비극이 환기될 뿐이다.

 

대체로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체호프가 속물성 앞에서 느낀 우수는 고골의 경우보다 더 암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골에게 그것은 이 인간의 원초적인 작음’, 그 옹색함에 근거한 것으로서 더 높은 이상과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극복해야 하는 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영웅이 사라지고 작은 인간(위대한) 인간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체호프의 세계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이상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저 진부함의 동의어가 된다. 그 때문인지 속물성을 그려 보이는 작가의 시선에서는 우수와 나란히 씁쓸한 자기 연민과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

 

 

 

-- 논문 <체호프의 우수: 지루한 이야기(1889)검은 수사」(1894)를 중심으로>의 1장. 

 

원래 체호프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저 대목, 즉 체호프식 속물성의 소설화 방식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논의의 편의상(-_-;;) 지식인 소설, 관념 소설을 집중 분석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여하튼 위에서 언급한 세 소설 중, 아니, 여러 인물 중 가장 인상적인 놈은 입폴리트입니다...^^;;  이 인물의 존재를 상기시켜준 건 석영중, <뇌를 훔친 소설가>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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