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기적, 검은 구원






1. 


빨간 우체통 지나 야트막한 계단 올라

도서관, 사랑하는 우리 학교 도서관 

서고 앞, 전화기 없는, 빨간 전화 부스

큼직한 체경은 사라지고 하얀 벽만 무심하네.


숫자와 알파벳, 보르헤스와 에코의 미로

현기로워라, 돌고 돌아 또 제자리

발자크와 디킨스와 도킨스의 시간

아, 셋 다 이름이 세 글자군요! 


다시, 야트막한 잿빛 계단 아래 

빨간 우체통, 귀엽지만 얄밉네요.  

아무도 안 쓰는데 너는 왜 여기 있니? 

아무도 안 찾는데 왜 기도 안 죽는 건데?


설원을 등지고 선혈처럼 빨간 실존,

행정관 앞 옛 풍경은 어땠지, 생각나?

묵묵부답 빨간 우체통을 뒤로 하고 

하얀 눈 위에 나 혼자 걸어간 검은 발자국.



2. 


띄엄띄엄,

큼직한 빨간 셔틀 버스를 탔고

앉아서 갔다. 가면서 생각했다. 


우리의 뇌는 이기적 유전자를 배반하고 

그것에 저항할 만큼 성장했다. 돌연변이라니, 

어떻든 운명을 결정할 유전 인자는 없다지 않는가.



3. 


아이의 두개골 틈새로 검은 피가 흐르고

빨간 수도꼭지 밑에서는 온수가 흐른다.

온수는 때와 피만 씻어주는 게 아니다.

영혼을 씻어준다. 손과 몸만 데워주는 게 아니다.

영혼을 데워준다. 세포와 신경을 속속들이 녹여

혼의 동사를 막아준다. 그리하여 이 시는 


원래 거룩한 온수 예찬이 될 것이었으나 -  


싯누런 뇌수와 검은 피를 씻어낸 아이는 다시

빨간 피를 쏟고, 그때마다 나는 생리혈을 흘리며

두통에 시달린다. 두통조차 나이가 드는지, 매달

빨간색이 너무 좋다. 빨간 스웨터 입은 비노쉬가 

너무나 예뻤던 영화는 나쁜 피였지. 따뜻한 물에 

검은 피, 나쁜 피, 더러운 피를 씻으며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 - 


빨간, 아주 새빨간 기적,

그리고 속 시커먼 구렁이 같은 검은 구원.

(2022. 12. 27.)


















* 레오 까락스 <나쁜 피> /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30주년판 서문. “... 우리는 다윈주의로부터 우리의 가치관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우리의 뇌는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항해서 배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이는 정도로까지 진화했다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피임 도구를 사용할 때 분명히 사실로 드러난다이것과 동일한 원리가 광범위한 규모로 작용할 수 있고또 작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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