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판타지- 50년생 유숙이의 시점  






1.



"엄마, 저어기 갈 때 우리 형우 술 버릇 좀 가져가줘요."

아흔 일곱 살 노인에게 한 부탁이 잘못 전달되었는지 

다음날 마흔 두 살 아들이 저어기로 갔고 

빨간 양귀비 머그잔이 손에서 툭, 와장창 깨졌다


2. 


이 세상에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고 

모든 문제는 살아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

죽음이란 딴 세상의 소풍일 뿐인걸,

이제는 아무 문제 없으리라 안심했건만  

이게 웬일인가 


일, 소 팔러 다니는 아비 손 잡고 야밤의 산길을 걷고  

이, 아무리 졸라도 어미는 장날 풀빵 하나 안 사주고

삼, 나뭇판자 얼기설기 이어 놓은 통시에 백열등이 뜨겁고

사, 업고 걸리고 똥 치우고 동생들은 언제 클지 까마득하고 

오, 두 딸은 밥 달라고, 아들은 젖 달라고, 남편은 술 달라고 보채고 

육, 따도 따도 담뱃잎은 무성하기만 하고 심어도 심어도 모내기는 끝이 없고

칠, 슬레이트 지붕 집 쪽방은 헐값에 내놔도 들어오는 사람 하나 없고 

이하, 중략할 수밖에 것은 

내 인생의 나지막한 네모칸은 텍사스의 모텔처럼 무한대로 이어지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고, 그럼에도

다시 저기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죽은 뒤에도 

인생은 진퇴양난, 아니, 새옹지마


3. 

  

죽으면 아무 문제 없으리라는 생각은 죽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신곡>조차 읽지 않은 우리의 천진난만한 바람일 뿐, 

저어기 들어가는, 여기 들어오는 우리는 모든 희망을 버릴 것,

이것이 바로 저승 판타지의 기본 전제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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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세상의 소풍... 최정례, 빛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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