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구의 위엄

 

 

 

 

1

 

2021년 신축년 구정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김없이 서울역에 갈 것이다

서울역은 싸늘하겠지만 우리는 서울역의 거지와

햄치즈 샌드위치와 바닐라향 뜨거운 커피에 감동할 것이다

 

우리 열차는 지금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부산역에서 내리시는 손님 잊으시는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부산역은 심드렁하겠지만 우리는 부산역의 화장실과 

메마른 거지와 기름진 비둘기의 조합에, 왁자지껄한 지하철이나 괴팍한 택시에 열광할 것이다  

 

우리는 황령산 자락, 부산진구 전포교회 아래

다락방이 딸린 2층짜리 주택에 머물 것이고

그렇다, 태종대 근처 영도구에도 갈 것이다

 

 

2

 

1926년생 제동댁 김점순은 영도구에서 아흔여섯번째 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녀는 145cm 40kg 정도의 체구에 건더기 없는 된장국과 김치만 먹고 살았다 

온순한 그녀가 괄괄한 유씨 남자와 낳은 아이 중 총 일곱 명이 성년에 이르렀다

장남 은율은 알코올 의존증이 유발했을 치매와 공황장애에도 불구하고 잘 살고

장녀 숙이는 암 투병 중인 남편과 부전시장에서 과일과 유자차 떼다 팔며 잘 살고

차남 종율은 환갑에 애 딸린 여자와 결혼해 '하나님' 안에서 알콩달콩 잘 살고

차녀 을이는 시집 간 직후 양잿물 마시고 친정까지 기어와 시름시름 앓다 죽고

삼녀 정이는 아들 딸 남겨둔 채 마흔도 넘어 술병으로 간이 붓고 복수가 차 죽고

삼남 성율은 쉰 살에 뇌경색, 목숨도 건지고 산재보험도 건져 얼씨구나 잘 살고

사녀 득이는 요양보호사에 무자식이 상팔자, 노모 돌보며 착하게 잘 살고 있다

 

영도구의 위엄은 그 덕분에 유지된다

좁다란 임대 아파트와 모진 슬레이트 집들

그리고 사람들, 오 가난한 사람들!

오 굴욕과 상처 가득한 무참한 사람들!

오 달동네 옥탑방과 지하방, 죽음의 집에서 부활하라! 

 

3

 

부산행 KTX 열차 안에서 우리는 터널 안팎을 드나들며

간밤에 잠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변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어머니, 왜 사람은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것일까요?

- 오 아들아, 그런 멋진 말은 어디서 배웠느냐?

- <원효대사 해골물>에서요

- 오 꿈에서 원효대사를 만나거라, 일체유심조를 배우거라

 

아흔해가 넘도록 잘 살고 있는 사람은

어딘가 초월적인 데가, 신의 관념과 형상을 닮은 데가 있다 

우리의 제동댁 김점순 여사는 백살을 넘길 것인가

'신'이라는 낱말에서는 인육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

 

도-키, <가난한 사람들>, <학대(상처) 받은 사람들>(The Insulted(Humiliated) and The Injured)), <죽음의 집의 기록>

나보코프 <절망>: 신이라는 관념에서는 인육 냄새가... (?)

 

*

 

 

작년 1월 1일에 부산에 있었으나 아이가 급-아픈 바람에(진짜 또 영화 한 편 찍었다) 가지 못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한다. 그녀는 아무튼,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들 중 유일한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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