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보이 2020-02-18  

안녕하세요, 2017년에 <닥터 지바고> 출간 일정에 대해 문의 드렸던 사람입니다. 어제부로 선생님이 번역하신 <닥터 지바고>를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선생님이 옳았습니다. 처음에 열린책들에서 간행한 박형규 교수님의 번역을 읽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읽다가 포기했는데 얼마전에 문학동네에서 같은 분 이름으로 번역을 대폭 손질해서 민음사와 비슷한 시기에 내놓았더군요. 두 번역을 이리저리 비교해본 결과 민음사 판에는 문학동네 판의 장중한 문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 저에겐 민음사 판의 가벼운 문체가 더 편하다고 생각하고 선생님 번역으로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옳았습니다. 열린책들이나 문학동네 번역에서는 멋을 부리기 위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이 번역된 표현들이 선생님 번역에서는 명쾌하게 표현되어 있더군요. 파스테르나크 책의 특성상 사건간의 인과관계나 서사구조의 흐름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들이 여전히 눈에 띄는데 그건 소설 자체의 결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번역을 읽고야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 - 파스테르나크 책은 번역하기에 죽을 맛이라 하셨습니다만 - 그러면 선생님 입장에서 번역하기 재밌는 책은 어떤 책일까요? 아니면 번역 자체가 괴로운 일일까요?
 
 
푸른괭이 2020-02-18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자체가 힘든 일이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일-직업은 다 힘들지요. 소설가는 소설쓰기가 제일 힘들고요^^;

제 입장에서 <지바고> 번역이 유난히 힘들었던 것은, 가령 앞서 번역한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덜 좋아해서, 덜 존경해서(^^;) 그런 것이 크고요. (이 점은 역자 해설에도 어느 정도 밝혀두었습니다.) 아마 그래도 현재로서는 이 작품에 접근하기 편한 번역본일 겁니다. ˝가벼운 문체˝라고 쓰셨는데, 그건 제 문체라기보다는 작가의 문체입니다. 번역자가 작가의 문체를 바꿀 수는 없지요. 그리고 ˝사건간의 인과관계....˝ 역시 작품 자체의 특징입니다. 그 역시 번역자가 손댈 수 없는, 그래도 안 되는 부분입니다.

모던보이 2020-02-1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오해 마세요. 저는 사건간의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은것은 소설 자체의 결함이라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거만하게 들릴까봐 조심스러운데 파스테르나크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비교할만한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닥터 지바고>는 전반적으로 시인이 쓴 어설픈 대하소설 같은 느낌입니다. (시인으로서의 그가 뛰어났다는 것은 소설 말미에 실린 유리 지바고의 시들만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바고와 라라와의 사랑도 결국 불륜인데 이것조차 미화되는 하나의 영웅 서사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라르식 욕망의 삼각형 구조를 대입해보자면 라라에 대한 지바고의 사랑을 더욱 불붙게 한것이 코마로프스키라는 중개자일수 있는데 소설은 이 점을 끝까지 은폐하고 낭만적 거짓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듯 합니다. 쿤데라가 정의했듯이 소설 예술이라는 것이 상대성의 세계라면 파스테르나크의 얼터에고 지바고는 자신이 햄릿-그리스도이고 나머지(소비에트 체제)는 모두 바리새주의에 빠져있다는 선악의 도식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를 속세의 지옥 속에서 주인공이 각성하여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마술이 펼쳐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는 감히 비교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