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 시절에 처음 만나는 이상은 [날개]의 작가(소설가)이거나 [오감도]의 시인이기도 하지만 [권태]를 쓴 수필가이기도 하다. 요즘식이면 정말 작가. '권태'의 놀라운 점은 그 모던(!)함이다. '권태' 자체가 우리식 정서가 아니다. (그 무렵의 한국문학을 잘 모르지만-_-;;) 이광수 <무정>, 염상섭 <삼대> 이런 것이 쓰이고 읽히던 시절, 권태는 너무나 이국적? 너무나 뜬금없는 것? 귀신 씨나락? 아무튼 현실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심리적 정황일 법하다. 병리적, 도착증적, 변태적, 이런 수식어를 붙여도 될 법하다. 한마디로, 이것은 '이식된'(=식민화) 것. 유럽에서 직수입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이중, 간접 수입된 것이다. 원조는 어떠했나.

 

 

 

 

 

 

 

 

 

 

 

 

 

 

영국과 프랑스의 (초기)낭만주의는 '이상'이 중요했던 독일의 그것(1기 - 노발리스, 슐레겔 형제 등)과는 다소 다르게, 권태와 (나아가) 환멸의 정서가 강하다. 러시아에 수입되어 인기를 누린 건 이쪽이다. 독일 낭만주의로는 일세대보다는 말기에 붙은 호프만이 오히려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아무튼 우리(=동양) 문학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몽땅 '서양-것'인데, 20세기 전후 일본 지식인-작가들이 배우고 익히고 닮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물론, 루쉰은 빠져야 할 것이다,행동하는 지식인, '메스' 대신 '붓을 든 작가로서 그의 정서는 권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다시 원조로 가서. 권태란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자가 어찌 감히 권태를!!! 권태를 느끼려면 많은 것이 갖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돈, 돈, 돈이다. 최소한의 물리적 안정 없이 권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다음, 이것을 행동 차원으로 옮기려면(주로 여행을 가는데) 역시나 돈이 필요하고, 그다음은 육체적 자유가 필요하다. 여러 정황상, 여자는 감히 누리기, 혹은 실천(?)하기 힘든 것이 권태이다. 자, 그런데, 1857년(버버리가 <버버리>를 만든지 1년 뒤^^;) 삼십대 작가가 <보바리 부인>이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여자가 감히 권태를! 그것도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러다가 주제 파악 못하고 파멸하는 얘기라니. 그 파멸은, 결코 남자주인공들의 경우와 같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세태극이다.

 

 

 

 

 

 

 

 

 

 

 

 

 

 

 

 

엠마의 여자로서의 열등감은 결코, 적은 비중을 차지 않는다. 그녀가 아들을 바라는 가장 큰 이유는 '복수'하기 위해서다. 여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복수.

 

 이렇게 사내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치 과거의 모든 무력감에 대하여 희망으로 앙갚음하는 느낌이었다.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131-2)

 

'다른 것'의 가능성에 대한 상정에서 권태는 생겨난다. 내가 아닌 다른 나, 여자가 아닌 남자, 이 남자(여자-애인)가 아닌 다른 남자(여자-애인), 이 집이 아닌 다른 집, 이 세상이 다른 세상 등등. 남편 샤를르는 멀쩡 이상의 멀쩡이지만 엠마는 계속 다른 가능성을 꿈꾼다. 그럴 수록 현재(남편)는 싫어지고 권태는 더 강해지고 급기야 환멸로 이어진다.

 

그녀는 우연의 다른 짝맞춤으로 누군가 딴 남자를 만날 도리는 없었을까를 자문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그 사건들, 달라졌을 그 생활, 알지 못하는 그 남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과연 어느 누구도 저 남자와는 닮지 않았다. 그는 미남이고 재기발랄하고 품위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옛날의 수도원 친구들이 결혼한 상대는 정녕 모두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회지에 살면서 거리의 소음, 극장의 술렁거림, 무도회의 광채를 만끽하면서 가슴이 터질 듯하고 관능이 활짝 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의 삶은 마치 햇빛받이 창이 북쪽으로 나 있는 지붕 밑 골방처럼 냉랭했고 소리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70)

 

엠마의 불륜(정사)은, 영화로는 제법 야하게 표현되지만, 소설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너무 '연극적'이고, 작가-화자 입장에서는 너무 분석적, 메타적이다. 권태에 대한 소설적 탐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끝은 결국, 여주인공의 파멸인데,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은, 강조하거니와, 결코 '사랑' 때문이 아니라 '돈-빚' 때문이라는 것이다. 엠마 역시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심지어 모르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로돌프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다가 퇴짜맞고 나온 뒤.

 

물론 아직은 몽롱한 상태였다. 그녀는 자기를 이토록 끔찍한 상태에 몰아넣은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즉 그게 돈문제였음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괴로운 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이었다.”(452)

 

엠마의 음독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에 대한 미학적 단죄이다. 이미 숨이 끊어진 엠마를 염하고 장례 치루는 과정에서 미학적 죽음은 더 잔혹하게 진행된다. 작가는 그녀에게 왜 이리 잔혹했을까. 어쩌면 그보다 마흔도 안 된 작가는 왜, 이렇게 멍청하고(ㅠㅠ) 허영심 많은, 예뻐 본들 중치 수준인 시골 의사의 부인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내세운 것일까.  게다가, 이런 '된장녀-유부녀'의 자살을 완료하는 데 왜 (번역본으로) 20쪽에 가까운 페이지를 써야 했던 것일까.  많은 의문이 생기는 소설, 새삼스럽지만, 걸작임에 틀림없는 소설이다. 명불허전.

 

 

 

 

 

 

 

 

 

 

 

 

 

 

 

 

이미 낭만주의가 저물고 사실주의가 자리를 잡았을 무렵, 작가 자신 역시 감상주의, 낭만주의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왔을 무렵, 1860년대 분위기를 십분 반영한 <악령>에서 도-키는 전형적인 '권태-환멸'의 캐릭터를 창조한다. 스타브로긴. 사십대 중반에 읽는 그는 실은 이춘재(ㅠㅠ)급의 극악범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대가의 붓은 이런 극악범을 '위대한 죄인'으로 만들었다. 스타브로긴의 내면이 조명되는 이른바 <스타브로긴의 고백>(티혼의 암자에서)의 일절. 핵심적인 사건(마트료샤 사건 이후) 한 문장, "... 지겨웠다", 권태에 간만에 꽂힌다.

 

나는 대체로 그 무렵 사는 것이 머리가 멍해질 만큼 몹시나 지겨웠다. 위험이 지나자 고로호바야 사건도 당시의 모든 일처럼 완전히 잊어버렸을 텐데, 내가 겁을 집어먹었음을 회상하며 계속 분해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나는 아무에게나 분풀이했다. 그 무렵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떻게든 삶을 불구로 만들자, , 가능한 한 훨씬 더 역겹게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벌써 1년째 권총으로 자살할 생각을 했다. 뭔가 더 좋은 것이 나타났다. 한 번은 빈민굴에서 잔시중을 좀 들기도 한 절름발이 마리야 티모페예브나 레뱌드키나를, 당시에는 아직 돌아버린 건 아니고 나에게 남몰래 푹 빠져서(우리 패거리도 눈치챘는데(выследили)) 그저 환희에 젖은 백치 여자를 보고서 갑자기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타브로긴이 그야말로 이런 밑바닥 존재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나의 신경이 꿈틀거렸다. 이보다 더 추악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 결단 속에 무의식적으로나마(당연히 무의식적으로!) 마트료샤의 일 이후 나를 사로잡은 저열한 비겁함에 대한 분노가 개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사실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키의 후기작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권태-환멸을 알지만, 이렇게 허랑방탕한 놈은 없었다. 라스-프도, 이반도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자였다. 스타브로긴처럼 '몹쓸 짓'을 일삼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굉장히 문어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 읽으니 (심지어 아이의 엄마로서!) 이런 처 죽일 놈! 어린 아이를! 물론 이런 극악범죄는 스타브로긴의 말그대로 '십자가'를 위해서 필요한 장치였기도 하다. 권태에 절어 방탕과 범죄를 일삼는 귀족 도련님은 그 존재만으로 '악령'이고 그 출처(원조^^;)는 물론 서유럽이다. 서유럽에서 수입(이식)된 권태와 환멸. 확실히 이것은 고급(!)한 것이라 충족을 모른다. 엠마의 권태와 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급(!), 혹은 원시적이고 즉흥적인 권태는 욕망을 채울 대상이 나타나면 이내 해결된다. 가령 <레이디 맥베스>의 권태 같은 것.

 

 

 

 

 

 

 

 

 

 

 

 

 

 

 

-나 리보브나는 빈 방들을 돌아다니며 지루함에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계단으로 이어진, 그다지 크지 않은 다락의 부부 침실로 올라간다. 여기서도 잠깐 앉아 사람들이 광 앞에서 삼의 무게를 달거나 밀가루 담는 것을 내려다본다. 다시 하품이 나온다. 나른한 기분에 젖어 한두 시간 누워 잠을 잔다. 깨어나면 또다시 러시아의 권태, 상인집의 권태가 찾아온다. 그걸 견디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이다. -나 리보브나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는 책이라고 해봤자 키예프의 교부전이 전부였다.(14)

 

저렇게 집안을, 마당을 돌다가 만난 하인과 소위 살을 섞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세르게이의 농간(?)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이런 경우 뭔가의 부재와 권태와 욕망과 그것의 충족 등은 굉장히 단순하게 이루어진다. 소재가 성-섹슈얼리티(치정살인)여서 그렇지, 아니라면, 거의 동화를 읽는 느낌이다. 민중 작가가 파악한 민중의 진면목, 혹은 적나라한 실체이기도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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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ennui. 이 주제를 무척 좋아했다. 이 단어를 좋아했다. 그리고 환멸.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보바리>를 읽으면서 다시 상기되었다. 권태와 환멸의 끝은 구토, 다. 만약에 우리가 '구토' 이후에 살아남아 '놀이(게임)의 끝'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세계멸망(=2차대전) 이후 폐허, 잔해의 정서. 네 늙은이의 놀이에 비하면 19세기의 권태는 굉장히 생산적이고 역동적이고 음탕(!)한 것이었다. 심지어 연애도, 섹스도, 살인도 한다! 젊으니까, 젊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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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소설집은 중고샵에서 사주지만 2018년 경장편은 '매입불가', 흑. 전자에는 '권태/환멸'이 있다. 후자에는 '권태/환멸'이 없다. 소설들이 쓰인 시기를 놓고 볼 때 '비포-애프터'. '비포'에는 권태와 환멸이 가능했고, '애프터'에는 그게 불가능하다. 엠마 보바리는 '비포-애프터' 변화가 없는 훌륭한(아이러니다!^^;) 인물, 훌륭한 여자다. 갓난아이를(더불어 어린아이를) 내팽개치고 연애에 몰입하기 쉽지 않은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이 때의 에너지는 성적, 육체적 에너지라기보다는(물론 이것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소설처럼!" 되고자 하는 모방 욕망, '형이상학적 욕망'의 엄청난 에너지다. 작가는 그녀를 명백히 바보로 그렸지만, (비단 플로-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엠마 보바리, 혹은 워너비-엠마인 것을, 어쩌랴! 말마따나,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연애!^^;

 

권태여(환멸이여), 다시 한 번!

Yesterday, onc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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