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에서 전범으로: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페터 한트케이다. 그의 이름은 낯설 수 있어도 관객모독이라면 누구나 알 법하다. 그 덕분에 그에게는 베케트 이후 가장 전위적인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듯하다. 1965년에 쓰이고 1966년에 초연된 이 희곡은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충격적인데, 우선은 등장인물이 없다. 이른바 등장인물인 배우 네 명에 관한 한, 성별, 나이, 생김새 등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 대신 <배우를 위한 규칙들>이 있지만 건달이나 게으름뱅이가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이나 슬롯머신 앞에서 도박하는 모습을 관찰할 것처럼 너무 세부적이어서 오히려 추상적이다. 텅 빈 무대 위의 네 배우에게는 말하는 순서와 자세, 말의 분량에 대한 지시가 주어진다. 맨 처음 대사는 이렇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작품은 일종의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들어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보았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들었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17)

 

첫마디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기존에 듣고 보지 못한 것도 없고 또 기존에 듣고 봤던 것도 없다면 뭐가 있다는 소리일까? 이후 대사는 이런 식의 오묘한 궤변의 연속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은 자기들끼리 말하지 않고 관객을 향해 말한다. 그로써 관객은 모독의 객체-대상이 아니라 연극의 주체로 부상한다.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는 만큼 어떤 행동도, 어떤 이야기도 없다. ‘몸짓의 연기 대신 언어의 표현이 핵심이 되는 언어극의 탄생이다. 배우들이 끊임없이 호명하는 여러분은 연극을 존재하게 하는 동력이다. 마지막에는 욕설의 객체가 되지만 그 욕설조차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은유로 가득하다.

관객모독공연은, 한트케의 첫 소설 <말벌들>과 달리, 뜻밖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지금 읽어도 작가의 젊음과 치기, 미학적 도발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러시아 형식주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엿보인다. 에세이 문학은 낭만적이다(1966)의 문학 버전으로서 일종의 순문학 선언, 언어 제일주의 선언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발표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 역시, 소설이라는 장르의 틀을 고려하면, 전위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9)

 

어느덧 카프카 소설의 첫 문장처럼 유명해진 이 도입부에서 이미 주인공의 상태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블로흐는 현장감독의 힐끗시선을 해고 표시로 받아들였을까. 거리를 배회하다가 매표소 여직원과 하룻밤을 보낸 그는 오랫동안 축적되었을 광기와 분노를 기어코 토해낸다.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24) 이 평범한 질문에 맞서는 주인공의 교살 행위에 은근한 공감이 이는 것은 왜일까. 이후 소설은 거의 전적으로 국경으로 도주한 주인공의 불안과 공포를 추적하는 데 집중한다. 소설 내내 대사가 거의 없던 블로흐는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골키퍼의 불안을 큰따옴표 속에 담아낸다. 여러모로 독자의 학구열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이런 전위의 근원을 비슷한 시기에 쓴 <소망 없는 불행>(197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요일 밤 A(G)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9) 지역 신문 일요일 자 부고란에 실린 기사의 주인공이 화자의 어머니다. 그로부터 거의 칠 주가 지난 다음 그는 어머니의 인생을 복기한다. 슬로베니아계 혈통의 목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학창 시절에 성적이 좋고 영리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것을 모두가 불행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소망 없는 불행에 빠지지 않고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불태운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배움이 아니라 첫사랑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는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나치 당원이자 은행원이었던 경리 장교와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게 된다. 그녀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훨씬 많고 거의 대머리였던 그는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유부남이었다. 임신부인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자기를 사랑해온,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도 상관이 없다고생각한 어느 독일군 하사와 결혼한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지만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의무감, 또 누군가가 자기에게 호감을 보인 사실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다.

나머지 이야기에서 화자는 생부든 의부든 다 제쳐놓고 오직 어머니만 회상한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벌써 그 당시에는라는 말을 곧잘 하던 그녀의 우울한 삶에서 강조되는 것은 지적인 성향이다. 그녀는 신문을 즐겨 읽고 정치에도 관심이 있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곱씹기를 즐긴다. 화자와 함께 책을 읽는 일도 잦다. 크누트 함순, 도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 윌리엄 포크너 등 독서 수준도 제법 높다. 어머니가 화자에게 보낸 편지가 그 방증이다.

 

<어제 난 텔레비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온순한 여자를 보았다. 밤이 새도록 아주 끔찍한 것들을 보았단다.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았던 거다. 몇몇 남자들이 벌거벗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성기 대신에 창자를 덜렁거리며 달고 있더구나. 121일이면 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다. 매일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75)

 

어머니의 부음을 받은 다음 날 저녁 오스트리아행 비행기를 탄 화자는 그녀의 자살에 긍지를 느껴서 제정신이 아니었노라고 고백한다. 자살은 그녀의 지적인 인생의 정점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뿌듯한얘기만 있었을까. 가령 화자는, 어머니에게 침으로 아이들의 콧구멍과 귀를 닦아주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침 냄새가 너무 싫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글로 쓰는 작업을 할 때 가끔 나는 그 모든 솔직함과 정직함이 지겨워졌다. 그래서 약간 거짓말도 하고 진의를 숨길 수도 있는 그런 것, 예를 들면 희곡 같은 것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83) 요컨대, 󰡔관객모독󰡕거짓말-기교의 텍스트라면 󰡔소망 없는 불행󰡕솔직함과 정직함의 텍스트다. 그만큼 그에게 출생, 특히 어머니의 존재는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가로 알려진 한트케의 소설과 산문이 의외로 쉽게 읽혀서 놀랐다. 알량한 겉멋과 현학을 고급스러운 문학의 징표인 양 착각하는 일단의 작가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다. 덧붙여, 오늘의 전범은 대부분 과거의 전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문학이 전위-혁신에서 전범-고전으로 갈지는 훗날 문학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지난 10월(11월?) 민음사 ??에 실은 글이다.  (중간에 표현이 좀 '쎈'(-다고 평가된) 부분은 편집자가 수정했다. 다른 책도 좀 들추었으나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 더 쓰지 못했다. 마침 수업에서 (처음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하려던 참이라, <관객모독>까지 덤으로 얘기해보았다. <고도>, 더 정확히, 공연물, 영상물 대본에 대한 반응 내지는 관심이 높아 다음 학기에도 읽어보려고 한다. 서울대 수업에서 <고도...>를 다루는 일이 있을 줄 몰랐는데, 큰 영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수업을 하면서 알았다, 너무 어려운 텍스트라는 것을. 이런 것도 있어야, 그러나, 공부할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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