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서 소설로

 

김연경(소설가)

 

어떤 이야기가 나를 찾아올까.

 

*

 

지난 5월 말, 주말에 아이와 함께 연례행사처럼 동물원에 갔다. 홍학부터 기린, 고릴라, 원숭이 등을 둘러보고 코끼리에 이른다. 진짜 코끼리를 구경하고 작은 나무 코끼리 위에 앉아 보고 큰 나무 코끼리를 만져본 다음 넓은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12시 반이다. 김밥과 샌드위치, 과일을 먹는다. 주변의 대부분이 이런 가족들이다. 점심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한 중년 남자가 여자애를 데리고 나타난다. 손녀를 정자에 눕히는가 싶은데, 손녀는 벌써 곯아떨어진 상태다. 한 서너 살? 할아버지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녀의 머리를 받혀준다. 고전적인 체크무늬가 들어간 짙은 베이지색 닥스이고 다림질도 잘 되어 있다. 손녀는 문자 그대로 큰 대자로 누워 있다. 배를 덮어주었으면 싶지만, 날이 더워 다행이다. 갑자기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약간 불안한 기색을 띠던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온다.

저어, 휴대폰 좀 잠깐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어르신의 부탁에 남편의 표정이 굳어진다. 원래도 상냥한 인상이 아니거니와 아침에 면도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 무뚝뚝하니 더 살벌하다. 내가 옆에서 쿡쿡 찌른다.

잠시 빌려드려, 그거 뭐라고.”

휴대폰을 아이 유모차 뒤에 넣어두고 와서요전화 한 통만 부탁드립니다.”

마지못해라는 단어를 온 얼굴에 써 붙인 표정으로 남편은 휴대폰을 건넨다. 할아버지가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다른 번호로 한 번 더 건다. 남편의 삼엄한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점잖은 설명을 덧붙인다.

부인이 안 받아서, 제 휴대폰으로 해봤습니다.”

그 사이, 식사를 끝낸 아이와 나는 화장실을 다녀온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랑이나 곰을 보러 가지 않고 하마 쪽으로 내려간다. 우리가 걸음을 뗀 지 한참 지났음에도 남편은 계속 정자에서 뭉그적댄다. 내가 전화를 한 다음에야 머뭇머뭇 내려온다.

아까 그 할아버지, 영 기분 나쁘단 말이야.”

, ?”

그제야 남편은 지하철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횡행하는 휴대폰 사기를 줄줄이 나열한다.

, 그럼 빌려주지 말지!”

아니, 네가 빌려주라고 했잖아!”

나는 그런 사기가 있는 줄 몰랐지!”

심지어 남편은 그동안 할아버지와 손녀의 동영상까지 찍어두었다. 자기 휴대폰에 찍힌 두 전화번호는 각각 동물원 할배’, ‘동물원 할매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었다. 지금껏 기다린 것은 그 할머니를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딱 봐도 사람 점잖아 보이고 어린애까지 있고, 결국 할머니랑 만났다며?”

사기꾼치고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 어디 있냐? 애도 어디서 잡아 왔을 수도 있고, 전화번호도 이상해. 물론 돈 주고 이런 쉬운 번호를 사는 사람도 있지만, 두 개 다 그렇다고. 할머니 말로는, 할아버지 핸드폰도 유모차가 아니라 집에 두고 왔대. 서로 말을 잘못 맞춘 거지.”

원래 겁이 많은지라 남편의 얘기에 나도 귀가 솔깃하다. 세상에! 그래, 진짜 할아버지라면 손수건으로 아이의 배를 덮어주었을 거야. 무엇보다도, 그는 내 남편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내 아이의 얼굴을 안다. 하지만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이건 말하자면, 쓰이지 않은 소설이다. 상상력은 우리를 불안의 도가니로 안내한다.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월요일도, 화요일도 아무 일 없다. ‘동물원 할배동물원 할매는 완전히 지워진다. 한 보름쯤 뒤 남편이 먼저 그의 존재를 상기해준다.

그 할아버지 있잖아, 그냥 멀쩡한 사람인 거 같아. 업체 하나 갖고 있고 카톡에 사진도 자주 올리고

그게 멀쩡의 증거가 돼?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면?”

다시 시작된 의심의 상상력은 그 촉수가 더 끈질기다. 설마 장기밀매업자? 소설 쓰고 있네, 정말.

 

*

 

프로필을 써야 할 때면 자문한다. 과연 나는 소설가인가. 전업 소설가는 아니지만, 나의 첫 책은 1997년에 나온 소설집이다. 이후 내가 쓴 책과 번역한 책을 쭉 세 보니 권수가 아닌 종수로 따진다면, 그래도 소설책이 제일 많다. 올여름에는 여러 지면에 연재한 세계문학 관련 글을 묶은 책(󰡔살다, 읽다, 쓰다: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민음사)이 나온다. 그동안에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을 교과서 형식으로 편집, 정리한 19세기 러시아문학 연구서도 내년 초에는 출간될 예정이다. 이런 식의 소위 비평적 글쓰기 역시 대학원에 들어간 1997년부터 꾸준히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것이다. 소설에 대한 욕심은 더 크다. 우리의 모든 활동처럼 글쓰기도 이력이 쌓일수록 한동안은 좋아지는 양상을 보이지만 분명히 임계점이 있다. 소설 쓰기는 특히 그렇다. 40대도 절반만 남겨놓은 현재, 왜 나는 20대 초반보다 소설 쓰기가 더 힘든가.

20161학기부터 서울대 국문과에서 개설된 소설창작 강좌를 맡고 있다. ‘후생가외라는 말을 실감하는 수업이다. ‘읽기수업에서는 대개 내가 학생들보다 위에, 적어도 앞에 있지만 쓰기수업은 절대 그렇지 않다. 과연 문예창작’(창작으로서의 문학)학문’(학문으로서의 문학)의 영역일 수 있는가. 비슷하게, 소설작법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가. 실상 작법을 따로 배우지 않은 내가 당장 강의실에서 실천 중인 그 해법이란 아주 원초적이다. 바로, 읽기와 쓰기다. 전반부에는 고전을 읽고 후반부에는 요즘 우리 소설을 읽는다. 전자는 카프카, 보르헤스, 멜빌, 류노스케, 김승옥, 이청준 등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고 후자는 매 학기 절반 이상 바뀌되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은 꼭 읽는다.

읽기와 나란히 쓴다. 나는 학생들이 쓰는 것을 꾸준히 읽고 수업 시간에 공유한다. 이미 완성된 채 왔으되 앞으로는 쓰지 않을 것 같은 학생도 있고, 반대로, 아주 잘 쓰지는 않지만 앞으로 계속 쓸 것 같은 학생도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설가의 길은 결코 권장 사항이 아니다. 소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결국 버티는 놈이 이긴다. 한두 쪽, 한두 편 잘 쓰긴 쉽되 끝까지 밀고 나가기는 힘들다. 그다음, 많은 학생이 한 학기 내도록 특정한 소재를 예의 그 자신의 문체로 소설화한다. 그런데 소재와 문체의 측면에서 같은 작가임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다양하고 넓은 스펙트럼의 소설을 쓰는 학생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만나는가가 그만큼 중요함을 증명한다. 그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 과정에서 무한한 방법론적 고민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요컨대, 어떤 이야기가 나를 찾아올까. 다른 한편, 뛰어난 작가일수록 스스로 이야기를 찾아가고(탐구) 찾아내는(상상) 능력이 뛰어나다. 말이 쉬워 상상력이지, 그 저변에 도사린 건 역시나 피나는 노력이다. 톨스토이는 평생 자기 얘기만 썼던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남의 얘기를 썼다. 주로 사회적 사건을 다루었는데 특정 이야기에 꽂힌 순간, 자기 안의 수많은 가 주인공의 형상으로 살아난다. 청년 김승옥의 소설은 온통 그 자신의 얘기이다. 청년 이청준의 소설 역시 그렇지만, 중장년 이청준은 다소 다르다. 그는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그런 수고와 고생을 하는 작가이다. 그렇게 찾아낸 이야기 속에서 무수한 의 페르소나를 창조한다. 흔히 성실’, 좀 더 무겁게는 장인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고리타분한 자질이 천재성과 동의어임을 알겠다. 소설 쓰기에는 우아한 게으름과 촌스러운 학구열이 다 필요하다.

이 순간에도 기다린다, 나를 찾아올 이야기를.

동시에, 눈을 불을 켜고 찾는다, 그 이야기를.

 

*

 

어제 아침 아이가 갑자기 짜증을 낸다.

가방 메기 싫어!”

가방은 내가 들고 살살 달래며 집을 나선다학교가 보일 무렵 가방을 메 주려고 하자 또 짜증이다.

가방 안 메! 안 멘다고!”

정말이지 너무 속상하고 부끄럽다. 그래도 꾹 참고 간신히 얼러서 학교 안으로 들여보낸다. 다행히 별 탈 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오늘 아침에는 내가 갑자기 짜증을 낸다. 아니, 짜증이 난다, 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잠을 깬 아이가 요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것이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밥을 빨리 안 먹는 것, 계속 종알대는 거, 엘리베이터 놓치는 것, 다 일상사지만 짜증이 난다. 학교 주변이 조용하니 아이도 긴장하는 눈치다. 학교 안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데 또 짜증이 확 뻗친다. 닫힌 교문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서성이신다. 4학년 손자가 필통을 두고 갔다며 손수 들고 오신 거다. 보안관이 교실로 전화를 건다. 막 뛰어나온 학생의 얼굴에는 창피함이 역력하다. 필통, 그거 뭐라고.

학교 주변, 여전히 명실상부한, 명명백백한 지각생이 더러 있다. 저 여유 있는 표정들! 지각, 그거 뭐라고. 학교, 그거 뭐라고. 인생, 그거 뭐라고.

아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 맞다, 모래놀이도구! 하지만 어쩌랴. 손자 필통 들고 뛰어온 할머니처럼 하긴 싫다. 필통, 그거 뭐라고. 사실 할머니 욕심이지. 점심시간쯤 되니 아침의 짜증도 그냥 가시고 없다.

오후 3, 교문에서 아이와 만난다.

“10개를 포함해서 10개 이상 맞힌 사람은 모두 4단원 통과예요! 나도 통과했어!”

단원평가 시험지를 받아보니 75. 반 평균을 웃도는 점수라지만 엄마는 계속 구시렁거린다.

한두 개만 더 맞히지, 하긴 네가 더 아쉬울 텐데 엄마가 자꾸 떠드네.”

나는 하나도 안 아쉬워. 75점이든 80점이든 남이 안 풀고 내가 풀어서 100점이나 다름없거든?”

시험, 그거 뭐라고. 인생, 그거 뭐라고.

아홉 살인 아이는 발달이 장애 수준으로 지체되어 있다. 다행히 학교 잘 다니고 4cm5cm도 잴 줄 알지만 손이 떨려서 마지막 1cm 정도는 구불구불하다. 그런데도 엄마인 나는, 44년 평생 나 자신을 잡아 왔듯, 아이를 잡는다. 내 안에는 여전히 짜증 뻗치는 아홉 살 꼬마가 숨어 있는데, 내 앞에 그런 꼬마가 실제로 존재하고 내 아들이다. , 엄마, 그거 뭐라고.

 

*

 

이야기란 내 머릿속의 관념이라기보다는 내 배 속의 아이 같다. 과연 어떤 아이가 나에게로 올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로 잘 알려진 소설은 이런 두려움에서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소설과 영화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케빈의 엄마인 에바에 대한 이야기도 한 번 더 할 필요가 있다. 출산이 고()의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요즘은 더 절감한다. 아이는 어떤 인간으로 자랄 것인가. 이미 첫 문장, 첫 문단이 쓰인 이야기, 그것은 어떤 소설로 자랄 것인가.

 

*

 

<쓺>에서 청탁이 와서 쓴 글이다. <문학실험실>에서 단행본도 나오고 있다. 물론 주옥(^^;) 같은 작품이 많지만 어느 정도나 반응을 얻고 있는지, 내가 다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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