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 북쪽, <베덴엔하> 역 주변의 햇볕이 따사로웠다. 한 시간이 넘도록 음습한 지하를 질주하는 동안 11월의 지독한 습설이 수그러들었다. 이곳에는 역의 명칭 그대로 소비에트연방 시절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는 거대한 박람회장이 있었지만 나의 목적지는 반대쪽이었다. 고가 도로를 옆으로 낀 채 눈길을 쭉 걸어가니 아름다운 교회가 보였고 한참 뒤에 야트막한 주택가가 나왔다. 조금 더 걸어가자 P대학의 자연대 건물이 나왔다. 담배부터 피우려고 건물의 후문을 찾아갔다. 후미진 곳,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놓은 울타리 옆에서 담배를 꺼내는데 손놀림이 영 둔했다. 햇볕이 아무리 그윽해졌어도 장갑을 벗기가 겁날 정도로 쌀쌀한 날씨였다.

공터 한가운데에 한 중년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싸구려 보드카 병이 들려 있었다. 내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았을 때 그는 울타리에 어설프게 기대다시피 하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미 반쯤 벗겨진 바지를 마저 내린 뒤 엉거주춤 선 자세로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싯누렇고 두툼한 똥 덩어리가 모락모락 김을 풍기며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무던히, 서서히 눈 덮인 땅 위로 떨어졌다. 그는 뒤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대충 바로 세우고 배를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두 다리 사이에 헐렁하게 달려 있는 조그만 생식기에서 싯누런 오줌 줄기가 흘러 나왔다.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는 벌벌 떨리는 두 손을 그리로 가져갔다. 햇볕을 가르는 이 고마운 오줌에 꽁꽁 언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혹한의 고통을 달래는 그의 표정이 천진난만하고 행복해보였다.

울타리 안 벤치에는 여학생들이 전깃줄의 참새들처럼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젊은 담배 연기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흡연하는 동양인 여자에게 잠깐 호기심을 보였다.

에잇, 쳐다보지 마세요! 항상 저러는 걸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거기서도 여자애들이 담배 피워요?”

 

서류 하나를 처리하고 나니 오후였다. 한층 더 그윽해진 초겨울의 햇살이 얼굴을 간질였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거북이처럼 걷다보니 아침에 본 교회가 나왔다. 근처 벤치에 몇 겹의 누더기를 두른 카자크 노파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손짓을 했다.

이봐요, 아가씨,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내 말 맞지? 아이쿠, 하지만 이를 어째, 마가 끼였어, 마가! 액땜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논문 심사를 앞둔 나는 낯선 노파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다. 노파는 내 두 손을 잡고 주문을 외우더니 조그만 실몽당이를 꺼내 손안에 꼭 쥐어주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다가 사흘 뒤에 역시나 아무도 모르게 불로 태우라고 덧붙였다. 이어 복채를 요구하는 노파의 표정이 살벌했다.

안 그러면 아가씨 인생에 큰 재앙이 닥친다! 내놓으면 복 받을 거야. 좋은 신랑감도 나타나고 아들도 낳고. 많이 내놓으면 큰 복 받고 적게 내놓으면 작은 복만 받는 거야.”

노파의 말이 군데군데 썩고 빠진 잇새로 새나오는 바람과 함께 기괴한 주문이 되어 살가운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나는 노파에게 100루블짜리 지폐 한 장을 주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만 해도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

 

모스크바의 남쪽, <유고-자파드> , 다시 습설이 퍼붓고 있었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802호로 올라갔다. ‘은 지난달에 일본인 룸메이트가 이사를 간 다음 31실에 조카뻘 되는 대학생 과 둘이 살고 있었다. 빈 침대를 보며 불안 섞인 자유의 쾌감을 맛보는 것도 잠시,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새 룸메이트는 중국인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방안에는 중국 대륙처럼 거대한 그림자가 깔렸다. 190센티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키에 둥그렇고 넙적한 배가 한 눈에 들어왔다. 각종 소가 가득 든 중국식 왕만두를 서너 배 부풀려 놓은 것 같은 얼굴, 조막만한 입과 얇은 입술, 끝이 둥글둥글한 조그맣고 나지막한 코, 새카만 검은 까까머리, 그리고 검은 깨 가루처럼 작은 두 눈에는 두툼한 오목렌즈가 끼워진 안경을 쓰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도피유학을 온 아이였다. 아이의 첫 번째 트렁크 안에서 화구가 와르르 쏟아졌다. 두 번째, 세 번째 트렁크, 몇 개의 가방도 속을 드러냈다. 10인용 전기밥솥, 믹서, 프라이팬, 식기국자주걱뒤집개 등 주방 용품이 마룻바닥과 비어 있던 침대를 가득 채웠다. 국수 뽑는 기계, 어묵 만드는 기계, 전자레인지까지 튀어나왔다. 각종 향신료와 양념, 밑반찬, 납작하고 쫄깃한 두부 전병과 육포, 죽순을 비롯한 밀봉된 나물 등 먹거리의 틈새에서 화구가 초라해졌다.

훙은 반쯤 혀를 끌끌 차며 이름을 물었다.

, , 리첸첸, --.”

중국 아이는 커다랗고 넙적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며 한자도 또박또박 써주었다.

李沈沈. 이 침침한 아이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

 

(- 2015년 ??호 <문학나무>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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