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읽다, 쓰다

 

 

 

 

* ‘얕고 넓음에서 좁고 깊음으로: 학자의 책읽기

 

올해 출간될 독서에세이집의 서문을 구상하던 중 나의 44년 인생을 요약해보았다.

 

19751, 태어났다.

10, 공부했고, 자랐고, (부모) 집 떠났다.

20, 공부했고, 소설 썼고, 담배 피웠고, 연애했고, 번역했다.

30, 공부했고, 강의했고, 논문 썼고, 소설 썼고, 번역했고, 결혼했고, 담배 끊었고, 아이 낳았다.

40, 공부하고, 강의하고, 논문 쓰고, 소설 쓰고, 번역하고, 책 내고, 아이 키우고,

암과 치매와 실명 없는 노년을 꿈꾼다.

 

십대부터 지금까지 빠지지 않는 것이 공부였다. 공부가 진척될수록 그 대상은 문학에 집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하강일 수 있는 문학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으슥한 산골에서 의무 교육만 간신히 받은 농부의 장녀로 태어난 나에게는 시종일관 상승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여름, 부산에 사는 삼촌의 결혼식에 가던 길에 아빠의 손을 잡고 조만간 내가 다닐 학교를 구경 갔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부산의 어느 산동네에 단칸방을 얻었다. 이듬해 봄,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이 역사적인 1981년에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책의 세계에 진입했다. 질 나쁜 종이에 조잡한 그림이 들어간 교과서가 전부였음에도 그것은 문학의 형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문학은 놀이가 아니라 공부였지만, 신통방통하게도, 공부가 곧 놀이이기도 했다.

이른바 책읽기는 대략 중학교 시절 문고판으로 시작되었다. 장학금과 과외비 덕분에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대학 시절에는, 과장하건대, 읽고 쓰는 일만 했다. 고전에 한정되었던 독서에서 이청준, 김승옥, 최인훈, 박완서 등 현대 작가로 영역을 넓혔다. 각종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명화집과 사진집도 많이 사보았다. ‘얕고 넓은독서의 절정이었다.

19973,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독서의 양상이 달라졌다. 3년에 걸친 유학 기간 동안에는 일부러 우리말 책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러시아의 도서관은 대부분 폐가제인데, 최대한 일찍 기숙사를 나서서 하루 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빛바랜 원서를 읽고 요약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독서의 범위는 더 한정되었다. 러시아문학, 19세기 소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분신혹은 분신 테마. 2001, 레닌 도서관 귀퉁이에 앉아 서지를 훑어보는 데만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좁고 깊은책읽기의 쾌락을 최대한 만끽하던 시절이다.

20043, 처음으로 모교의 강단에 섰다. 이후 15년 동안 러시아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으로,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번역가로 살았다. 여전히 비정규직 신분임에도 어느덧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아이들 앞에서 강의하고 그들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을 사랑한다. 스물다섯 살에 <악령>을 시작으로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번역한 것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년 초에 출간된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번역 역시 이 소설을 아끼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리라 생각한다.

 

* ‘좁고 깊음에서 얕고 넓음으로: 소설가의 책읽기

 

나름대로 아카데미즘을 고집하던 내가 대학 밖의 공간에서 틈틈이 강의를 시작한 것이 2010년쯤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카프카의 변신, 이광수의 <무정>과 염상섭의 <삼대>까지 다시 읽었다. 이런 식으로 좁고 깊은독서에서 얕고 넓은독서로의 회귀를 시도해보았다.

2016년부터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개설하는 소설 창작 강좌를 맡게 되었다. 커리큘럼의 절반 이상이 동서양의 고전 중단편인지라 여중고시절 같은 세계문학 공부의 쾌감을 다시 맛본다. 더불어, 대학 시절에는 방학 때 강의실 밖에서 읽었던 요즘 소설들을 강의실 안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는 호사를 누린다. 보르헤스 말마따나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이다. 요컨대 읽기가 지적노동이라면 쓰기는 육체노동이다. 대학교 4학년이었던 1996년 소설가로 등단, 곧바로 첫 소설집(<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을 낼 무렵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작품의 수준을 떠나 일단 쓰고 보는 학생을 보면 이십여 년 마흔을 넘기면 소설이 한 줄도 쓰이지 않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라던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나 역시 마흔을 넘긴지 오래, 한 문청을 통해 내 꿈을 환기해본다. “꿈을 꿀 무렵의 나, 꿈속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꿈꾼 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다시, 스침들>(2018, )) 어쨌든 사람은 원래 자기가 원하던, 그래서 걸어가던 그 길의 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성취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가 원하던 모습을 하고 있다. 소설가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죽을 때는 소설가로 죽고 싶다.

 

* 동물-인간에서 사람-인간으로: 아이 엄마의 책읽기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 2010121일을 맞이하는 새벽,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담배냐, 아이냐.’ 열아홉 살부터 15여년을 하루 두 갑, 명실상부한 골초로 살아온 나에게는 사느냐 죽느냐수준의 문제였다. 결국 아이를 선택했으나 솔직히 담배가 피우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문제는 출산 이후였다. 담배를 안 피워도 나는 사람이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포유류의 암컷일 뿐이었다. 물론 이 역시 숭고한 실존이지만 그 와중에 책의 삶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조리원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읽었다. 9월부터는 강의 준비 차 러시아명작을 다시 훑었다. 2학년이 될 아이 역시 책을 읽기 시작한지 오래다. 동물-인간에서 사람-인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지금껏 공부는 내 인생의 거의 전부였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나, 여전히 모범생일 필요가 있다.

 

https://blog.naver.com/todayslibrary

 

지면이 좁아 많이 못 썼다. 나중에 책 나올 때 마저 써야지, 했는데 지금 보니 딱히 더 안 써도 되겠구먼. 그게 말의 본성이기도 한지.

원고료가 설 연휴 전에 들어왔다. 20만원 넘었다, 캬아! 너무 오랜만에 받아보는 것이라 무척 기뻤다.

 

*

  

 

 ландыш покупаем. 은방울 꽃. 할머니들이 근처 숲, 들에서 꺾어와 시장에서 들고 다니며(가만히 서서) 판다. 너무 약해 보여 산 적은 없는데, 지나고 나니 그립다.  들꽃을 많이 꺾어본, 그래서 집안까지 많이 가져와 본 경험상, 들꽃은 그렇게 피어 있을 때(만) 아름답다. 정말 금방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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