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같은 '핵금수저'에게는 굳이 관념이 필요 없었으리라. 현실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현실의 추한 측면은 역시나 현실의 코드로 수정, 개선하면 된다. 그래서 사회소설. 그게 안 되면 종교의 세계로 가는데, 톨-이의 러시아정교는 극히 행동규범 지향적(?), 윤리적, 뭐랄까, 현실적인 것이다. 미국식 청교도와 많이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아주 동의되는 바이다.)
반면, 도-키 같은 애매한 흙수저는 애초부터 현실과 대결, 불화한다. 아주 흙수저라면 먹고사느라 정신 없었겠지만, 불행히도 '애매한' 흙수저라 그렇다. 그 불화의 한 양상이 키릴로프인데, 옛 친구가 무척 좋아했던 인물로서, 오랫동안 그를(어쩌면 그 친구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제라고 마땅히 이해가 되는 건 아니고, 마냥 웃긴다, 좋은 뜻이다.
야밤, 스타브로긴의 야행, 첫 방문의 상대가 키릴로프이다. 가가노프와의 결투에 입회인이 되어달라고 말한 다음, 대화는 자연스레 저 '관념'('바로 그 생각' - 자살, 인신 등)으로 간다.
“그럼 스무 걸음으로 합시다, 단, 더 이상은 안 돼요. 아시다시피, 그는 진지하게 싸우고 싶어 하니까요. 권총을 장전할 줄은 아시죠?”
“압니다. 나도 권총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그런 것으로 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겠습니다. 그의 결투입회인도 약속할 겁니다. 두 벌의 권총에 동전 던지기로 그의 것과 우리 것을 결정하는 거죠, 예?”
“멋지군요.”
“권총을 좀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키릴로프는 구석에 놓인 트렁크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아직 다 풀지는 않았지만 필요할 때마다 물건을 꺼내곤 했다. 그는 밑바닥에서 내부가 붉은 벨벳으로 된 종려나무 상자를 끌어내더니 그 안에서 굉장히 멋스러운 값비싼 권총들을 꺼냈다.
“전부 다 있습니다. 화약, 총알, 탄창. 연발 권총도 있어요. 잠깐만요.”
그는 다시 트렁크를 헤적여 미국식 6연발 권총이 든 다른 상자를 끌어냈다.
“무기가 상당하군요, 그것도 몹시 값비싼 걸로.”
“몹시. 굉장하죠.”
가난하다 못해 거의 빈곤한, 그럼에도 결코 자신의 빈곤을 인지한 적이 없는(замечавший) 키릴로프가 지금은 자부심까지 역력히 드러내며 틀림없이 굉장한 희생을 치르고야 획득했을 귀중한 무기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잠시 침묵한 뒤 스타브로긴이 다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로 그 생각이죠.” 키릴로프는 목소리만으로도 무엇을 묻는지 즉각 알아채고 짧게 대답한 다음 탁자에서 무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는 이번에도 잠깐 침묵하다가 훨씬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이 키릴로프는 상자 두 개를 트렁크 안에 넣고 아까 그 자리에 앉았다.
“그건 나한테 달린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이 말해 줄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 질문이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았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질문에는 대답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예의 그 광채 없는 검은 눈을 떼지 않고 스타브로긴을 바라보았고 왠지 평온하지만 선량하고 반가운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물론 자살을(застрелиться) 이해합니다.” 3분쯤 의미심장한 기나긴 침묵이 흐른 다음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나도 가끔 어떤 상상을 했고 그때마다 항상 어떤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어요. 만약 악행을 저지르거나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짓, 즉 치욕스러운 짓을, 단, 몹시 비열할 뿐더러… 웃긴 짓을 저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천 년 동안 기억하고 천 년 동안 침을 뱉어 줄까, 싶은데,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관자놀이에 한방만 쏘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때는 사람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들이 천 년 동안 침을 뱉는다고 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그걸 새로운 생각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키릴로프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잠깐 생각하다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느꼈습니다.”
“<생각을 느꼈다>고요?” 키릴로프가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그거 좋군요. 항상, 또 갑자기 새로운 것이 되는 생각들이 많이 있죠. 그럴듯해요. 난 많은 것들이 지금은 꼭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저 대사가 아주 잘 꾸며진 저택의 거실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지금과는 무척 다른 느낌일 것이다. 아무튼 '권총자살'에 대한 키릴로프의 집착은 거의 페티시즘 수준이다. 이어지는 부분도 무척 좋은데, 논다고 못 고쳤다. -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키릴로프는 이런 이미지인가 보다. 음, 글쎄, 어떻게 해도 소설 속 인물에는 2프로 못 미치는 것 같다. 어쨌거나 글자(책)는 '관념'(이론)이고, 이미지(실제)는 그것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겸사겸사, 사진으로 봐도 그렇지만 러시아 남자들은 러시아 여자들에 비해 인물이 어쩜 이렇게 빠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