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창건과 발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 주산인 백악(白岳, 표고 342.4m)의 남쪽에 임좌병향(壬坐丙向 ; 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으로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景福宮)의 명칭은 태조의 명을 받아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이다. 궁궐의 이름은《시경(詩經)》〈주아(周雅)〉편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에서 경복(景福)이라는 글자를 따서 경복궁이라 지었다. 위의 구절은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는 의미로 ‘경복’의 의미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392년 조선왕조를 고려수도의 개경에서 개창한 이래, 한양 천도를 확정짓고 개경을 떠난 태조 이성계 일행은 1394년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한다.

당시에는 머무를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한양부 객사를 이궁(離宮)으로 삼고, 12월 4일 종묘와 궁궐의 공사를 착공하였다. 마침내 이듬해 9월 29일 종묘와 새 궁궐이 완공되었다. 당시 종묘는 대실(大室) 7간과 부속건물 등을 합해 총 64간 규모였다. 또한 궁궐은 내전지역 173간, 외전지역 192간, 궐내각사와 기타 건물등 390간을 합해 총 755간의 규모였다.

경복궁은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나서야 완공된 것이다. 궁궐은 건물을 먼저 짓고 담장을 나중에 쌓았으며, 담장의 동서남북 방향으로 문을 내었다. 완공후 며칠이 지난 10월 7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했다.

경복궁(景福宮)의 궁궐 명칭을 비롯한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오문(현재 광화문) 등의 주요 전각 명칭이 이때 비로소 지어졌다.

한편 그 과정에서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이궁으로 창건하여,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을 오가며 궁궐을 경영하는 '양궐체제'를 이룩하기도 한다. 이후 태종 11년(1411) 경복궁에 금천을 파도록 하고 이듬해 경회루를 조성하게 된다.

하지만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은 세종이 경복궁에 본격적으로 임어한 이후부터다. 세종 8년(1426) 왕명을 받아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 올리게 된다.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이후 세종11년(1429) 사정전과 경회루 중수를 시작으로 경복궁의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대대적으로 중수하게 된다.

즉 세종이 경복궁에 임어한 세종 8년(1426)부터 세종31년(1449)까지 경복궁은 법궁으로서 그 면모를 일신했던 것이다. 그 뒤 명종 8년(1553) 큰화재가 발생한 일 이외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해 갔다.

그러던 중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왜군에 의해 경복궁이 모두 불에 타버린다. 그 뒤 고종 2년(1865) 신정왕후의 명을 받들어 경복궁 영건이 결정되기 전까지 경복궁은 무려 273년간 재건되지 못한 채 방치된다.

경복궁의 재건은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해 가기도 했다. 마침내 고종 5년(1868) 7월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고종이 이어한다. 역사상 가장 장대한 규모로 경복궁 재건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종 10년(1873) 고종은 지금의 향원정 뒤편에 건청궁을 짓도록 하고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본격적인 정무업무를 맡아보게 된다. 이후 몇 차례의 화재로 경복궁 내전 일대가 크게 손실되자, 또다시 창덕궁과 경복궁을 오간다.

그러던 중 1895년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한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다.

결국 고종은 아관파천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다 1897년 10월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 덕수궁)으로 환궁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경복궁은 1896년 아관파천을 끝으로 궁궐로서 그 기능과 역할을 마감하게 된다.

일제에 의한 훼손과 수난

그러나 경복궁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는 수난을 겪으며 파괴된다. 왕조국가에서 궁궐은 국권과 자치능력을 상징했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그냥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 영제교 등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1914년에는 이듬해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헐린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종의 산업박람회로 '낙후된 조선이 한일합방후 일본에 의해 눈부시게 발전을 했다'는 일제의 왜곡된 선전장으로 활용되었다. 이때 철거된 자선당은 일본무역상을 통해 일본으로 옮겨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한다.

1916년 6월 현재 흥례문 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게 되면서 흥례문과 그 일대가 완전히 철거된다. 이듬해인 1917년에는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불이 나자 이를 재건한다는 핑계로 일제는 1918년 경복궁 내전 건물의 대부분을 헐어 창덕궁으로 옮겨 짓는다.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되자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지만 반대여론에 부딪히자, 1927년 9월 광화문을 건춘문쪽으로 옮겨 버린다.

또한 1929년 5월에는 신무문 북쪽에 있던 융무당, 융문당 등을 헐어 한강변 용광사 건물을 짓는데 쓰기도 한다. 같은해 10월 시정 20주년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어 경복궁이 또 한번 크게 훼손되고 만다.

1932년 10월에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이 이등박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로 팔려나기도 했다. 1935년에는 건청궁을 헐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 병탄 25주년 박람회장을 만들었으며,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으로 헐려나간 무수한 전각들은 방매되어 일본인들의 사저 등으로 이용되었고, 전각이 있던 빈자리에는 궁궐과 관계없는 불탑, 사리탑 등 유물들로 채워지게 된다.

복원을 위한 노력

이런 과정을 통해 경복궁의 전각 규모는 본래의 1/10정도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원형이 크게 파괴되고 만다. 한편 해방후 경복궁 복원을 위한 시도는 1989년 경복궁의 기본 궁제를 복구, 복원하려는 계획이 수립되면서 본격화된다.

현재 경복궁의 옛모습을 찾기 위해 1990년부터 2009년까지 전각 93동의 복원 사업이 추진 중에 있다. 1995년 8월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같은해 12월 강령전, 교태전 권역을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하였다. 동궁 권역 중 자선당과 비현각은 1999년 12월, 흥례문 권역은 2001년 10월에 복원되었으며 건청궁과 태원전 흥복전 등이 복원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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