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여행을 가려다 남편 일정이 안 맞아 기차여행으로 급선회하기로 했다. 1박2일 짧은 일정을 고려하여 거리도 가깝고 후배도 볼 겸 제천을 골랐다. 표가 좀 비싸다 했더니 지나치게 복고풍 디자인이 부담스러운 관광열차다. 2월인데도 산타열차라는 때지난 컨셉도 아쉽다. 하다못해 관광열차라면 안내방송이라도 관광안내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친절한 승무원 덕분에 가족석으로 자리를 바꾼 건 만족. 방치되어 있던 발마사지 독점도 좋았고.
숙소가는 셔틀버스 시간을 떼우기 위해 역전시장 구경. 소머리를 파는 정육점의 위엄이라니. 기웃대다 떡도 사 먹고 약초비누도 샀다.
솥뚜껑에 전부치는 포스는 멋졌는데 막상 맛은 그냥 저냥. 그래도 전병이랑 메밀국수랑 꿩만두국까지 싸고 푸짐하게 먹긴 했다.
밥 먹고 나오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마트에서 비옷 사입고 제천역 맞은편 GS25 앞에서 셔틀버스를 탔다. 그런데 점점 세지는 빗줄기. 숙소에 도착하면 짐만 내려놓고 청풍랜드에 갈 작정이었는데 망했다. 대안이었던 모노레일도 유람선도 아직 얼음이 다 안 녹아 운행 안 한댄다.
어쨌든 마운틴뷰 침실에 짐만 내려놓고 일단 나왔다.
호텔 옆 호반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정말 얼음이 제법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다는 번지점프가 있는 청풍랜드는 빗속에 텅 비어 있다. 흑흑흑. 내친 김에 더 걸어 청풍대교까지 넘어갔다.
관람객이 딱 우리 셋뿐이라 툇마루에 앉아 빗소리 즐기는 고즈넉한 정취가 참 좋았다. 석조여래에게 소원도 빌었는데 자기 나이만큼 돌을 돌려야 한단다.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팔힘을 길러 그 힘으로 열심히 매진하라는 뜻인 듯 하다.
한벽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은 으뜸으로 좋은데, 참 좋은데, 아 춥다. 진짜 춥다. 결국 나머진 휙휙 돌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제천여행을 온 동기가 된 후배는 알고 보니 증평에 살고 있었다. 그래도 먼 길 마다 않고 보러와준 후배와 맛난 저녁. 떡갈비보다 다양한 산채반찬에 포식했다. 제천에서는 '약채락' 표지가 붙은 음식점은 다 괜찮다는 고급 정보도 얻었다.
일어나보니 비는 그치고 하늘은 맑다. 아침은 1층 마트에서 산 빵이랑 계란 소시지 등으로 간단히 때우고 자드락길 걷기 시작.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세 짚와이어랑 번지점프는 안 된단다. 아쉽지만 빅스윙 하나로 만족. 높은 데서 처음 떨어질 때는 호수로 휘잉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체험 강추.
제천시관광정보센터가 있어 2코스 가는 길을 다시 확인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풍력발전소도 있다.
어제는 비 때문에 제대로 감상을 못 했는데 호수와 산이 겹친 모습이 후배 말대로 내륙의 다도해 그 자체다.
청풍대교에서 학현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정식 자드락길 코스지만 지나치게 도는 듯 해 호반을 따라갔더니 계속 도로다. 다행히 차량 통행량이 적어 망정이지 걷기 좋은 길은 아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됐는데 음식점은 커녕 집 한 채도 없다가 처음으로 만난 게 청풍 얼음골 된장마을. 마을 초입에 힐링까페가 있어 신나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요기거리는 없어 칡차와 개복숭아차를 마시며 다리쉼을 했다.
동네의 원래 이름은 도화리라는데 마을 신수 주변을 빙 둘러 금줄이 처진 모습이 이채롭다.
정방사 가는 길이 계속 시멘트길이라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아들래미가 실수로 넘어져 무릎을 살짝 절뚝거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한참만에서야 시멘트길을 벗어나 산사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다.
정방사에 가면 꼭 해우소에 들리라는 관광안내소 말씀이 고맙다. 재래식으로 들어가면 뻥 뚫린 창문으로 산바람 맞으며 볼 일을 볼 수 있다. 수세식은 창문이 있어 아쉽지만 역시 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 따라가보니 지장여래전이다. 지장여래가 조각된 암벽을 배경으로 제북을 치는 여승의 모습을 한침 감상했다. 깎아지른 절벽 앞의 부처님을 올려다 보면 있지도 않은 불심이 생길 지경이다. 얼음낀 약수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시멘트길이 아니라 그 옆의 파란 리본 있는 오솔길이 자드락길이라는 걸. 아. 허탈하다.
아들이 계속 다리를 저는 게 안쓰러워 인생 용기를 긁어모아 히치하이크 시도. 운 좋게도 제천 시내 나가시는 어르신들의 차를 탔는데 황공하게도 호텔 안까지 들어와 내려주셨다. 돈은 극구 사양하셔서 된장마을에서 산 말린 모과를 드리니 그건 받아주셨다.
4시간을 걸었는데 20분 만에 돌아오다니 애들은 좀 허탈해 한다. 어쨌거나 점심을 못 먹은 터라 푸짐하게 각종 메뉴를 시키고 여행의 마지막 호사를 누렸다.
18시20분 셔틀버스를 타고 귀가길에 올랐다.
짧은 여행이 서운해 하염없이 창밖을 보는데 보름달이 따라오며 아쉬움을 달래준다. 배웅을 감사하며 기차에 오르기 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에필로그
제천은 역시 여름에 와야 하나 보다. 비수기라 문 연 식당을 찾는 게 힘들고 운영하지 않는 시설도 많고. 그래도 한가로운 슬로체험은 제대로 했으니 나쁘지 않은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