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만료 1년이 넘도록 방은 빠지지 않았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일단 계약 끝날 무렵에 내용증명을 보내두기는 했으나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는 주인의 말에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1년이었다. 틈만 나면 자기 큰아들이 의사, 둘째 아들이 변호사라는 자랑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그의 말이 거짓인 줄은 알았지만, 나는 누군가와 ‘대적’한다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집주인의 행태는 능히 그 두려움을 떨칠 만큼 가증스러웠고 나는 마침내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전세보증금 반환 청구소송을 냈다.

그저, 판결이 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겉보기엔 일상과 다름없었지만 아무 일 없어도 심장은 요동을 쳤고, 하루에 서너 번은 대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건 내용을 조회했다. 사건진행 내역에 한 줄이 추가될 때마다 철렁, 떨어지던 심장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 어려운 법률용어는 또 어떻고. 사회적으로 배울 만큼 배웠다는 학력을 갖고 있는 내게도 그들 세계의 용어는 너무 낯설었고, 그렇기에 무서웠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내 전 재산을 부당하게 쥐고 있는 건 그쪽인데도 나는 마치 범죄 피의자라도 된 것 같았다. 그쪽으로는 아예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어느새 온갖 검색 사이트에서 보증금 반환 관련 정보를 미친 듯이 찾고 있었다. 단언하건대, 그 기간이 조금만 더 지속됐어도 난 틀림없이 신경쇠약에 걸렸을 것이다. 그 무렵에 이미,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는 걸 나도 느꼈으니까. 오죽하면 그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길거리에서 발작적으로 울기까지 했을까.

지난한 과정을 거쳐 나는 결국 소를 제기한지 세 달 만에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집주인은 여전히 집주인이고, 그는 답변서를 부치는 데 든 우편요금 외에는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파 먹힌 내 시간은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내 일에 매진해야 할 금쪽같은 시간 몇 달을 그냥 날려버렸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돈 받은 걸로 만족해야할 수밖에.

예전의 평온함을 되찾아 갈 무렵, 민우회 홈페이지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았다. 괴기스럽고 과장되게 큰 학교 정문 앞에 피켓을 들고 혼자 서 있는 사진.

5년 동안 아무런 절차 없이, 으레 해 오던 근로계약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학교가 갑자기 3년이 넘은 사람과는 재계약할 수 없다고 통보했단다. 그게 작년 가을의 일이다. 차라리 무슨 잘못을 저질러 당한 해고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게. 마음이라도 편하게.

보증금 반환 청구소송 때 느꼈던 것들을 나는 아직 말로 풀어내지 못한다.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았지만, 그래도 또래보다 제법 많은 일을 겪은 내게도 그 시절은 여전히 끔찍하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녀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늘 그렇듯 조근조근 잘 웃고 있지만 간혹 신경이 끊어질 듯하기도 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모두들 도와줄 용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작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나를 버티게 한 힘은, 나는 결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믿음이었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학교는 왜 그녀가 “저임금의 불리한 위치로의 복직”을 원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어렵고 고된, 용기 있지만 외로운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1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법원까지 이끈 힘이 아닐까.

김연자님의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5분 전까지 악을 쓰다”를 읽으며 처음으로 내 출신고교가 자랑스러웠다. 이제 그녀를 보며 난생 처음으로 출신대학을 자랑스러워하는 나를 본다. 물론, 그녀처럼 멋진 사람을 배출했다는 점에 한해서 말이다. 자랑스런 우리의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과 지지, 무엇보다 존경을 보낸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본 사건 관련 내용은 한국여성민우회 홈페이지(http://womenlink.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조만간 졸업생의 지지연명을 받을 예정이라고 하니,
주위에 숙명여대 졸업생이 계시다면 널리널리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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